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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Oct 28. 2024

이중섭 거리, 전설이 된 화가의 11개월 그리고 훈장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주말.

우산을 쓰고 갈만한 곳이라면 미술관이 제격일 거 같았다.

그렇게 들른 이중섭미술관이다.

벚나무 낙엽이 인근 골목길과 공원 바닥에 흥건했다.

예약제 운영이면 그냥 돌아서려 했는데 미술관 입장 곧바로 가능, 게다가 경로우대로 입장료도 면제였다.

진작부터 염두에 둔 바 있는 '이중섭거리 몽마르트르 언덕을 꿈꾸며' 전시회장은 의외로 아주 한산했다.


로비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입구 왼편 벽에 걸린, 선 굵은 붉은 황소는 강렬한 표정 여전스러웠다.

1층은 전처럼 이중섭 작품 전시, 2층이 기획전시실이었다.

좌측 전시실은 이중섭거리 선포 25주년 기념사진전, 우측은 숭고한 기증 4부 '이태성, 서지현, 최열 기증자료전'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박수근과 더불어 한국적 미를 탁월하게 그려내었다고 평가받는 이중섭이다.

천재화가이자 불우한 생을 살다 간 고독한 예술가, 또한 애절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신화가 된 화가, 우린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허나 그게 전부는 아니란다.

화가 이중섭(李仲燮 : 대향), 그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심도있게 연구한 사람이 있다.

추측과 환상으로 채색됐던 삶의 주요한 순간들을 낭만이 아닌 사실 기록에 충실하고자 한 미술사학자.

그의 생애, 삶과 예술을 올바르게 규명하여 어긋난 사실을 바로잡고자 최열은 <이중섭 평전>을 원고지 4천 매에 담았다.

예술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작가가 처한 시대적, 개인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평양 종로보통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칠 만큼 이중섭은 유복한 외가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긴 했지만 평양 농공은행장을 지낸 집안의 외손자로 그는 스케이트와 음악 미술을 즐겼다고 한다.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 문화학원에서 공부했다.

열여덟에 전조선남녀 학생작품전람회에 <원산 시가>로 입선한 후 1943년 일본에서 돌아올 때까지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1945년 일본인이자 도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원산에서 결혼, 두 아들을 두었다.

해방 이후 원산미술동맹·원산신미술가협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1950년 12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월남, 제주도에 머물다 부산에 정착했다.

1952년 7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홀로 남은 그는 1953년 잠시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혼자 돌아왔다.





이후 통영·진주를 거쳐 1954년 6월 서울로 이주했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화랑, 4월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병으로 대구 성가병원, 서울 수도육군병원을 거쳐 성베드로신경정신과병원에서 회복하여 6개월의 정릉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재발하여 청량리 뇌병원을 거쳐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눈을 감았다.

대표작인 '통영 들소'는"강렬하고 처절한 긴장으로 무장한 분노의 들소는 전후 황폐한 시절을 견뎌나가는 시대정신의 상징이며 고난의 시절을 견디는 이중섭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라고 평자는 짚어냈다.

미술사학자이자 이중섭 평론 저자인 최열 씨 자료 175건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이중섭에 대한 석사학위논문을 작성한 서지현 씨로부터 그동안 연구 과정에서 수집해 온 자료 53건 등 총 228건을 기증받아 이중섭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다.

기증받은 자료들은 이중섭의 삶과 작품세계를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

앞으로 이중섭미술관이 전문 작가 미술관으로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전시품 중에 유독 눈길을 끈 것은 문화훈장이다.


197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30주년을 기념해 故 이중섭 화가에게 추서된 은관문화훈장이 그것이다.


당시 이남덕 여사가 1978년 10월 20일 문화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훈장을 직접 전달받았다.


어머니가 생전에 아들인 이태성 씨에게 이중섭미술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이 훈장을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고 한다.


이중섭 화가의 차남으로부터 기증받은 이 추서 훈장은 타계하기 전까지 간직해 온 이남덕 여사의 유품이기도 하다.





이중섭 이남덕 부부는 아들만 셋을 낳았는데, 장남은 생후 1년도 안 돼 디프테리아로 요절했고, 차남 이태현은 2016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현재는 유족 중 삼남인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 씨만 생존해 있다.


야스나리 씨는 지난 2005년, 이중섭 작고 50주기 기념사업 추진 차 일본에서 들고 온 미공개작 4점 중 일부가 진위 논란 스캔들에 휩싸였었다.


위작 논란을 수사한 검찰은 전문가 감정과 과학 감정, 자료 감정을 통해 그림들을 위조품으로 결론 내렸다.


그림 감정 결과 이중섭 화백이 작고한 뒤에 개발된 물감 성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그림은 여러 개의 원작에 있는 소품들을 짜깁기해 베낀 흔적이 역력하다는 게 주요 근거였다.


당시 한국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이중섭 위작 스캔들'은 대법원의 위작 확정판결이 나며 12년 만에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정직한 화공'에게 주어진 훈장이라 부정직한 후손이 지니기엔 아무래도 양심에 걸려서였을까.





한편 화가의 11개월을 브랜드화 한 분, 애초에 '이중섭거리'라는 길을 튼 분은 누굴까, 매우 궁금했었다.


시청 관계자들과 여러 문화예술인들을 만나

물어봤으나 똑 부러지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결국 이중섭 거리가 만들어진 시기를 역추적 끝에 당시 시장이었던 분에 대해 검색해 나갔다.


그럼 그렇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시대를 앞지른 탁견과 특별한 안목으로 이 일을 추진한 분다이, 당시 시장님은 제주 법대 출신으로 탐라대에서 관광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분이었다.


아하, 그렇다면 능히 당위성이 설명되고도 남는다.


제9대 민선시장인 오광협 시장은 재직 시 서귀포의 관광명소가 된  이중섭 거리를 구상하고 조성하였던 장본인이다.


이중섭 화백의 기일인 9월 6일, 이중섭이 피난시절 서귀포에서 살았던 초가집을 복원하고 1997년 이중섭거리 선포식을 가졌다.


그뿐 아니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건립과 2002 한일월드컵 서귀포시 유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지도자의 자질과 역량은 이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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