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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13. 2024

초겨울과 한겨울 사이

친구는 아들들이 사는 수도권으로 이사를 간다.

내가 부산에 생활의 닻을 내린 80년대 중반, 박물관학회에서 만나 가까워진 친구로 지금 여든 고개를 넘었으며 바깥분은 여든여섯이다.

양주 분 공히 연세 무색할 정도의 건강체로, 친구는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외양이나 날랜 동작으로는 나이 짐작이 어렵다.

바깥분은 더 활동적인 분으로 고비사막이며 히말라야 트래킹을 십 년 넘게 다닐 정도의 활력 넘치는 생활을 즐기신다.

하지만 연륜의 무게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

삶을 정리할 시기가 가까워지며 무슨 일이 닥치기 전, 자손들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녀들이 사는 곳 가까이로 이사 갈 생각을 굳혔다.

서른세 해를 살아온 아파트가 팔리고 내년 구정 지나면 아들 집 근처의 평수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요즘 들어 친구는 미리미리 짐 정리하느라 은근히 분주하다.

워낙 큰 살림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묵은 살림이라 정리해야 할 짐이 태산 같다.

특별히 맞춘 흑단 가구 세트와도 이제는 작별, 그릇도 꼭 필요한 거 외엔 눈길 두지 않기로 했다.

거기다 친구는 70년대부터 서예 수석 다도 분재 사진에 몰두했기에 거기 딸린 잡다한 용품들 허다해, 각기 분류하는 데만도 지레 지친다.

수석과 분재는 지금까지 호사 취미 양껏 즐긴 걸로 만족하고 원하는 이들에게 안겨보내며 과감히 인연을 끊었다.

큰방부터 짐 공략에 들어가는데 들출수록 할 일 무진장 늘어난다며 부질없는 여러 도락에 어지간히 빠져 살았다고 스스로를 탄한다.

말년에 자신의 서도 작품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는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처럼 친구는 매달려온 것들 뒤돌아 보며 헛되고 헛되도다, 자조하듯 뇌까렸다.

애착했던 작품들 선별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나눈 뒤 종류별로 포장하는데 도무지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

양이 많아서다.

시간이 넉넉하니 시나브로 한다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신의 손이 가야 할 일들이다.

어제는 일괄처리해야 할 기념패 상패 감사패, 끄집어 내니 그 양이 어마무지해 머리가 다 띵하더라고 했다.

축하박수받으며 들고 온 이런 '패'만큼 처치 곤란한 물건도 없다는 걸 이미 경험한 바 있어서 잘 안다.

나무 금속 크리스털 대리석 등의 재질이라 무겁기는 또 어이 그리 무거운지.


 버리기 전 무게감과 씨름하며 글씨판을 떼내거나 유성펜으로 이름 지우는 작업도 여러 수십 개라면 상당히 성가신 일거리다.



바깥분도 농 속에 든 양복을 죄다 꺼내 일일이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십수 년 전의 옷들이나 그렇다고 멀쩡할 걸 내버리기 아까워 입을 일은 거의 없지만 내동 묵혀뒀던 정장들.

미련 없이 버리겠다며 한 무더기 양복을 거실에 내다 놓고 돋보기 끼고는 세탁소 표식 떼내며 옷마다 안주머니를 손보더란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는 양복점, 나사점이라는 간판 달린 맞춤집에서 맞춰 입은 양복이라 안 포켓에 이름이 새겨있기 마련이다.

본인 이름 석 자를 잘 드는 카터 칼로 뜯어내는 작업에 하도 골똘하길래 왜 이름을 없애냐 했더니, 가령 이 옷이 질 나쁜 범죄자 손에 들어가게라도 되면 골치 아프지 않겠냐고.

만사불여튼튼이란 말대로 가정이지만 딴은 맞다.  

뭐니 뭐니 해도 이삿짐 정리하는데 버릴까 말까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건 책이다.

많기는 좀 많은가, 그 숱한 책장의 책을 정리하는 작업 또한 예삿일이 아니다.

책마다 일일이 갈피를 펼쳐가며 혹시나 싶어 속을 확인해 보고 이름이라도 쓰여있다면 지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일삼아 책갈피를 들추다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이파리들이 있기에 주워서 모아놨다고 한다.

바스러져 가루로 날리는 마른 잎이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며 그중 성한 것만 골라 찍어 보낸 것이 위 사진이다.

아주 오래전 색 고운 단풍잎 주워서 묵직한 책을 골라 갈피에 눌러두곤 잊어버린 잎, 언제 적인지 기억에도 없다고 했다.

하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젠 잎맥만 남은 앙상한 잔해로 남은 낙엽이 마치 다가올 자기 모습 같다며 음성이 추연해진다.

나이 어느새 12월에 이르렀으니 이사가 아니라도 삶의 주변을 정리해야 할 시기.


 '큰 이사' 전에 '작은 이사'하는 덕에 마침 잘 됐노라 훌훌 거침없이 짐 정리한다던 친구는 기분전환 겸 지장암의 단풍 든 메타세쿼이아나 보러 가자고 한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날씨 청량한 오후 지장암으로 향했다.

산길 걸으며 친구에게 백세시대에 벌써 겨울 타령이냐고 핀잔을 주며 아직은 초겨울이라 했더니 이미 한겨울이야, 7학년과 8학년은 감이 영 다르더라 하기에 오십보백보라고 우겨댔다.

한사코 바쁘게 따라잡는 나이인 데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 채 사는 우리..


하지만 누구에게나 틀림없이 겨울은 공평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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