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전 일입니다. 사순시기였던 어느 일요일 오전 11시, 특별한 미사에 참례했답니다. 북부 뉴저지에 소재한 뉴튼수도원에서 한인 첫 종신 서원자이기도 했던 나 베다 수사가 신부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집전하는 날이었거든요. 뉴욕과 뉴저지 인근의 한인교우들 100여 명이 참석하여 한적한 시골수도원이 모처럼 성황을 이룬 가운데 그레고리안 성가가 나지막이 흐르듯 경건함 속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점심식사 후, 아직은 바람결 꽤 매운 수도원 숲길에 마련된 <십자가의 길> 14처를 기도드리며 걸었습니다. 사순시기였던 당시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를 다 함께 바쳤습니다. 윈터스톰으로 인해 정정한 거목들이 자로모로 쓰러져 누운 전나무 숲에는 사슴 가족이 무리 지어 놀러 다녔습니다.
이날의 감회 어린 미사 스케치는 마음 깊이 새겨두기로 하고 오늘은 기적의 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연전에도 올린 바 있는 내용을 되풀이합니다만, 기적의 배를 알게 된 것은 미국에 온 첫해 어느 수사님의 선종 소식을 접하면서였습니다. 그 기사는 2001년 가을 뉴욕판 중앙일보에 실렸더랬지요. 눈길을 끌게 한 것은 전쟁통의 한국이 찍힌 한 장의 사진이었어요. 한국전 중반,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의 대대적 반격으로 얼어붙은 장진호에서 유엔군은 대패합니다. 북으로부터의 철수명령에 따라 유엔군은 눈보라 치는 한겨울 흥남에서 대규모 철수작전을 펴게 됩니다.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두로 밀려들지요. 그곳 체제에 몸서리치던 북한동포들이었어요. 남부여대, 피난 보따리를 저마다 이고 지고 달구지에 끌고서 말입니다. 입성인들 변변할까만, 12월 모진 해풍에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오직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고자 바다에 뛰어들었지요. 자유의 땅, 따뜻한 남쪽나라를 향하여....
선창을 따라 빽빽하게 운집해 있는 피난민들은 저마다 배를 타려고 아우성쳤습니다. 바로 시오리 남짓, 아군 방어선을 바짝 죄어오며 북한군과 중공군이 해일처럼 밀고 내려오는 중이었거든요. 피아간에 쏘아대는 대포소리, 기총사격 소리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답니다. 등 너머 흥남 시가는 이미 포화와 포연으로 자욱한 게 지옥도가 따로 없었지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동족상쟁의 비극인 한국전. 그 6 25로 무고한 백성 150만이 죽어갔습니다. 무수한 이산가족의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슬픔으로 남아있구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흘러간 옛 가요 속의 흥남 부두에는 십만에 가까운 피난민이 정들었던 삶의 터를 뒤로하고 자유를 찾아 무작정 수송선에 올랐던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배를 타려고 찬 바닷물에 뛰어든 피난민들로 북새를 이룬 한겨울 흥남부두. 그때 피난민들을 우선적으로 태운 한 화물선이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레너드 P. 라루라는 이름의 37세 선장은 한국의 흥남 부두에 대기 중이었답니다. 그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해외 군사시설에 보급품과 장비를 수송하는 1만 톤급 화물선이었지요. 빅토리호는 가으내 인천 부산 일본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12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 도쿄에서 화물을 싣고 목적지인 흥남으로 향했지요. 화물은 연포 공항에 있는 해병대 항공단에 보급할 10만 톤의 제트연료였습니다. 그러나 해병대는 후퇴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부산에다 연료를 하역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부산으로 가서 하역작업 중 철수 작전을 돕기 위해 즉시 흥남으로 돌아오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졌습니다.
12월 20일 저녁 흥남에 도착한 메러디스 호에 미 육군 제10군단 죤 H.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지요. 그는 러니 선장에게 상황설명을 하면서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지만 피난민 얼마라도 구할 수 없겠는가를 물어왔던 겁니다.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답니다. “가능한 한 많은 피난민을 태우겠습니다.” 마구 총을 쏘아대며 뒤쫓는 공산정권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지는 피난민 행렬. 오직 생존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수많은 피난민들이 운집해 있는 부두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 멀리 흥남 시가지는 화염에 싸여 벌갰답니다. 승선 작업은 12월 22일 저녁부터 시작돼 밤을 새우고도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됐지요. 드디어 배에는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사람들로 채워졌답니다. 14.000명 승선에 부상자 열일곱 명 만삭의 임산부 다섯 명.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승선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한 공간이 있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못자리 논처럼 촘촘히 겹쳐 탔던 거지요. 화물선으로 건조된 그 배는 그 많은 숫자의 피난민을 수용할 아무런 시설도 갖춰있질 않았답니다. 12명의 상급선원과 승무원 35명을 태울 수 있도록 설계된 메러디스 빅토리호.
배 안에는 여분의 구명보트도, 구명구도 없었습니다. 물과 음식물도 없을뿐더러 화장실도 의사도 통역관도 없었습니다. 연근해 10킬로미터 안에는 기뢰가 거미줄처럼 매설되어 있는데 기뢰 탐지 장비도 없었습니다. 적의 잠수정은 그 수역에서 계속 활동 중이었고 그 어떤 적의 공격이든 대항할 수단은 전무했던 겁니다. 일단 항구를 떠나면 철저한 보안 때문에 무선통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혼자 공해상을 헤쳐나가야 했는데 따르는 호위함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배에는 아직도 300톤의 제트연료가 실려있어 여차하면 대형화재사고가 발생할 소지도 충분했지요. 승무원들로서는 죽음의 공포와 이웃한 항해였습니다, 피난민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함께하는 3일간의 항해였지요.
아무 사고 없이 무탈했던 3일간의 기적 같은 항해. 모든 논리의 법칙으로 볼 때 인명손실이 엄청날 수 있는 조건임에도 한 명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기적이었답니다. 오히려 그 배 안에서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지요. 당시 상급선원이었던 뉴욕 주 변호사 러니씨는 그때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깊은 감명을 이렇게 전합니다. ”힘든 상황의 연속 속에서도 피난민들은 놀랄 만치 침착하게 대처했으며 조용히 인내했습니다. 위대한 해상구조의 중요한 역할자는 피난민 자신들로, 자유에의 갈망을 불굴의 투지로 이뤄낸 것입니다."
1924년 뉴저지 북서부 뉴튼지역에 설립된 ‘뉴튼수도원’은 한때 수사를 끝임 없이 배출하며 활발한 기도 공동체로 성장하던 곳이었습니다. 뉴튼수도원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수도원도 도왔는데요. 성 베네딕도회 소속인 이 수도원은 지난 52년 왜관수도원을 설립한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초대원장)를 아낌없이 지원했다고 하네요. 이런 일련의 일들을 통해 아름다운 인연의 고리를 거듭 생각케 됐습니다. 어려울 적에 우리가 받은 은혜를 훗날 이렇게 갚는구나 싶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구요.
한국전 때 수많은 인명을 구조한 상선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라루씨는 후에 수사가 되어 뉴튼수도원에서 은거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을 싣고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수행한 라우 선장이 뉴튼수도원에 입회하므로 더더욱 한국과 인연이 깊게 되었답니다. 1954년부터 2001년까지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수사생활을 하며 트리 농장을 일구셨는데, 그동안 수도원 밖으로 나가본 일이라곤 병원 가는 일외엔 오직 한번 1960년 미국정부가 주는 공훈장을 받느라 워싱턴 행을 가진 것뿐.
처음으로 빅토리호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찰스 리갈 기자가 한 칼럼에 썼다지요. ”역사상 어떤 화물선도 이처럼 많은 사람을 태운 적이 없으며 어떤 배도 이렇게 대단한 화물을 실은 적이 없다.”고. 한 척의 배가 이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구조작전으로 전대미문의 세계기록을 세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뉴욕 롱 아일랜드에 있는 상선사관학교 내의 미국상선 박물관에는 <용감한 배>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답니다. 2004년 영국 기네스북 본부로부터 인증된'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세계 기록'을 세운 빅토리 호.
생과 사의 기로에 선 1만 4천여 명을 죽음에서 건져낸 라루 선장, 그는 1954년 세속을 떠나 뉴저지 주 뉴튼에 있는 성베네딕도 수도회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흥남에서의 기억이 출가의 절대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신앙심 깊은 그를 수도원으로 인도한 여러 요소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었을 겁니다. 그분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끝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다가옵니다."
그는 이후 2001년 10월 선종할 때까지 46년을 한결같이 한 자리에 머물며 마리너스 수사라는 수도명으로 순명과 청빈의 수도자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일하면서 기도하라’는 수도원 정신대로 그는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을 가꾸다가 만년에는 수도원 내 성물판매점을 돌보며 아주 고요히 살았습니다. 마리너스 수사에게 어떤 이가 질문을 했답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피난민들을 구하겠다는 운명적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성경 구절을 들려주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위 내용 중 일부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인 빌 길버트가 쓴 <기적의 배>란 책에서 발췌했습니다. 그 책을 재작년 뉴튼 수도원에 갔다가 사 왔는데 일독을 한 후 친구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교민 2세인 그녀는 예일을 졸업하고 한국전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기에 참고자료의 하나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요. 오묘한 하늘의 섭리인가 인연의 귀결인가요. 수많은 북한 피난민을 사지에서 구해낸 라루 선장, 2001년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그 마리너스 수사가 머물던 수도원이 미국 내 수도자가 없어 폐쇄지경에 놓이자 뜻밖에도 왜관 분도수도원에서 위탁운영을 맡게 되었고요. 그 후 10년, 문을 닫으려던 수도원은 현재 한국인 수사들로 하여 생기롭게 깨어나고 있습니다. 오래전 흥남에서의 은공에 대해, 형태를 달리 한 한국인의 아름다운 보은이랄지요.
다시 뉴튼 수도원. 1924년 독일에서 건너온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수도자들이 세운 이 수도원은 성장을 거듭해 1947년에는 초대 아빠스(대수도원의 최고책임자)를 배출했습니다. 나아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제3세계 선교 활동에도 크게 기여했던 수도원이었답니다. 헌데 마리너스 수사님이 계시던 수도원이 현대사회 어느 곳이나 비슷한 현상이듯 성소자 감소로 폐쇄 위기에 처했구요. 그즈음, 독일 베네딕또 본원에서 한국 왜관 분원으로 SOS를 보냅니다. 수도원은 그간 캠프장, 피정의 집을 운영했으며 인근 미국인들에게는 세인트 폴 성당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수도원 부속고등학교도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70년대 중반부터 26년 동안 수도원을 이끌어 갈 단 한 명의 수사도 배출하지 못했지요. 해서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베네딕도연합회를 통해 2001년 왜관수도원에 운영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왜관 분도수도원의 김구인 신부님을 비롯 몇몇 분이 현지답사 차 뉴튼 수도원에 닿은 건 2000년 봄.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었던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에서 온 수사들로 해서 이듬해 안심하고 눈을 감습니다.
그해 겨울, 김보스코 신부님과 5명의 수도자가 도착하여 2002년 1월 정식으로 수도원을 인수합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수도사들은 문 닫을 위기에 처했던 수도원을 푸르게 푸르게 재건시키지요. 뉴저지주 써식스 카운티 뉴튼이란 전원풍의 마을 북서쪽 한 모퉁이, 약 62 만평의 광활한 대지에 자리 잡은 수도원. 건물 안에는 한 때 80여 명에 이르는 수도자들이 고등학교, 여름캠프, 크리스마스 농장을 운영하면서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전통대로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태가 변하면서 수도 생활에 헌신하려는 성소자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지요. 수도원은 명맥을 잇지 못해 급기야 그 자취가 영영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였었지요. 그런데 이렇듯 한국에서 구조대가 도착했던 겁니다.
당시의 목격자들에게 그 광경은 반 세기 전에 베푼 인도주의적 헌신, 즉 훗날 수도자가 된 한 선장이 '수천의 한국인을 구조한 일'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되돌아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인가 돌려줄 때라고 믿습니다." 조용히 김구인 원장 신부는 말했습니다. 이처럼 뉴튼수도원은 현재 베네딕토 왜관수도원에서 파견 나온 한인 수사들에 의해 활기차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기도하며 일하라’는 베네딕도회 전통대로 한인 신부와 수사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한국인 고유의 은근과 끈기를 바탕으로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폐허처럼 변한 수도원 구석구석을 일일이 손보아 고쳐가며 그렇게 온기를 불어넣었던 거지요. 기도는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수도자의 가장 기본이라고 가르친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생활을 하면서 적절히 노동의 균형을 맞췄다고 하네요.
뉴욕타임스 기사는 몇 해 전 한국에서 온 수도자들이 인근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중이라 했더군요. 수도원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설치하고 문 닫았던 피정 시설을 재운영하는 등 수도원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며 뉴튼수도원을 자세히 보도한 바 있습니다. 적막강산되어 수도자의 맥이 끊어져가던 수도원에 이번에는 기적처럼 사제가 탄생하기도 하였구요. 그렇게 십 수명의 한인, 미국인, 탄자니아인 수도자들이 함께 생활하는 다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뉴튼수도원. 특히 뉴욕 인근에 사는 한인 천주교인들을 위한 피정이나 세미나 등을 수시로 열어 그들의 영성생활을 신장시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남부 뉴저지에서 약 두 시간 여 거리인 그곳, 수도원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나서야 저도 그 배가 닿았던 한국의 거제도에 들러 자취를 더듬어보았답니다. 지난번 한국에 간 김에 일부러 짬을 내어 거제 포로수용소도 찾아보았던 거지요. 육이오 당시 강보에 싸인 아기였으니 직접 전쟁의 고통을 겪진 않았다 해도 한국인이라면 어찌 그 참담한 동족상쟁의 비극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더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기류가 미묘하게 흘러가는 판인 데다 국내정세까지 정체성이 실종된 채 비틀거리는 상황이라 생각사록 억장이 막혔더랬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단 수용소로 내몰리고 종당엔 아우슈비츠에서 연기로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참상이 벌어지던 때에 한 독일인이 나서서 일단의 유태인을 구해냅니다. 나치즘이 시퍼렇게 위세 떨치고 있던 전시, 군수 공장을 운영하던 쉰들러가 바로 그 사람이지요. 그가 전 재산을 털어서 작성시킨 명단에 오른 천여 명의 유태인은 그렇게 사지로부터 구출됩니다. 이미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십자가 아래 잠든 그를 일으켜 세워 나치의 포악성을 거듭 고발케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세상을 일깨운 영화 쉰들러 리스트. 영화의 후반부. 독일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체코 땅을 떠나는 쉰들러. 그가 목숨을 건져준 유태인들이 감사의 표시로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 반지를 만들어서 그의 손에 끼워 줍니다. 무리 지어 그를 전송하던 유태인들은 그 땅에서 번성하였고 세대가 바뀐 지금도 쉰들러의 이름은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의 천여 명보다도 몇십 배, 물경 1만 4천이란 숫자입니다. 스필버그 그가 유대인이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거작을 세상에 내놓을만한 수준에 이른 우리 영화계. 기적의 배, 용감한 배라는 제목을 단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미국에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스필버그처럼 마리너스 수사의 삶을 세상에 알릴 감독 어디 없을까요? 공지영 소설가를 비롯해 여러 르포 작가들이 뉴튼수도원을 다녀갔다니, 그들의 정밀하고 원숙한 필력이라면 기적의 배가 다시 힘차게 부활할지도... 거듭거듭 기대해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