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끼니 걱정을 하면서 살다가 이제 겨우 밥술이나 먹게 되니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은 잊었나 본데 그게 불과 반세기 전의 대한민국 실상이었다.
그때를 잊었는가
김일성의 육이오 도발과 3일 만에 함락당한 서울과 부산임시수도와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과 백마고지와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와 DMZ를 경계로 생긴 이산가족들..
자, 당시의 연대기를 한번 훑어보자.
1945.8.15 : 한국 독립
1948.8.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남한)
1948.9.9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북한)
1950.6.25 : 북한군 전면남침 개시, 한국전쟁발발
1950.6.27 :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한반도 군대파병 결의, 남한정부 대전으로 이전
1950.6.28 : 북한군, 서울점령
1950.6.29 : 미국 B29폭격기, 평양 최초 폭격
1950.6.30 : 북한군, 한강이남으로 남하
1950.7.5 : 미국 스미스부대, 북한군과 최초 접전
1950.7.7 :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으로 임명
1950.7.8 : 북한,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 공포
1950.7.15 : 남한 이승만대통령, 미군에 남한군작전지휘권 이양
1950.7.16 : 금강방어선붕괴, 남한정부 대구로 이동
1950.7.20 : 북한군 대전점령
1950.7.28 : 남한과 미국간 유엔군 비용지출에 관한 협정
1950.7.30 : 미국, 유엔군에 협조하지 않는 나라에 마셜플랜원조 중지 결정
1950.8.1 : 미 제8군 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1950.8.18 : 남한정부, 부산이전
1950.8.31 : 북한군 9월 공세 시작
1950.9.7 : 소련의 '유엔공군 한국폭격 중지' 결의안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부결
1950.9.15 : 맥아더, 인천상륙작전개시
1950.9.19 : 남한의 이승만대통령, 인천상륙 축하회에서 한만국경까지 진격한다고 발언
1950.9.28 : 남한군, 서울탈환
1950.9.29 : 남한정부 서울로 귀환
1950.10.1 : 남한군 38선 이북 진격개시
1950.10.10 : 남한군 원산점령, 38선 이북 전 지역에 계엄령선포
1950.10.19 : 남한, 유엔군 평양점령, 한강가교 준공식
1950.10.22 : 서울에서 부역혐의자 1만여 명 체포
1950.10.25 : 중공군 참전
1950.11.12 : 압록강 철교 폭파
1950.11.21 :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1950.11.27 : 장진호전투 시작
1950.11.30 : 투르먼 원폭사용도 불사하겠다고 발언
1950.12.5 : 북한군, 평양 탈환
1950.12.14 : 남한군, 유엔군, 피란민 흥남철수(~12.24)
1950.12.30 : 유엔군, 모든 전선에서 38선 이남으로 철수
1951.1.4 : 남한군, 유엔군 서울철수(1.4 후퇴)
1951.2.19 :중부전선에서 중공군 철수
1951.3.14 : 남한군, 서울 재탈환
1951.4.11 : 맥아더 해임, 극동사령관에 리지웨이 임명
1951.6.6 : 철의 삼각지대에서 격전 계속
1951.6.23 : 말리크 소련대표, 유엔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전회담 제안
1951.7.1 : 북한, 정전회담 제안 수락
1951.7.3 : 유엔군, 정전회담 수락
1951.7.8 : 정전회담 양측대표단 확정
1951.7.18 : 유엔함대, 원산폭격
1951.8.25 : 미 하원 군사위원회, 정전회담 결렬 시 원폭을 사용하라고 언명
1951.9.21 : 판문점으로 정전회담장소 이동
1951.10.30 : 북한, 현재 접촉선을 기초로 군사경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 제안
1951.11.7 : 북한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이 한국전쟁실패책임을 놓고 서로 싸움
1952.1.13 : 지리산에서 빨치산 300여 명 사살
1952.4.28 : 유엔군총사령관에 마크 클라크 임명
1952.5.7 : 거제도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 포로들에게 납치됨
1952.10 : 북한, 남로당파 인사 숙청 시작해 1955.12, 박헌영은 1955.12.5에 사형
1952.10.6 : 백마고지전투 시작
1952.10.31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집단시위, 포로 178명 부상
1952.11.10 : 박헌영 북한 외상, 유엔총회 의장에게 북한 폭격 중지 요청
1952.12.15 : 봉암도 포로수용소에서 집단시위, 82명 사망
1953.3.5 : 스탈린 사망
1953.4.11 : 유엔, 공산 양측 부상병포로교환 협정 정식 조인
1953.4.20 : 부상포로 교환 개시(~4.27)
1953.6.18 :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1953.7.21 : 한국은 정전협정조인식에 대표 파견 않겠다고 선언
1953.7.27 : 정전협정 성립, 오후 10시를 기해 전투 중지
-인민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불타고 있는 흥남을 뒤로하고 남하하는 연합군 측 수송선-
길버트의 <기적의 배>는 몰라도 한국인이라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에~' 노래는 알 것이다.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지나간 사실의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옛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 기억을 제대로 되살린다고 해도 당시의 그 아픈 기억들을 고스란히 되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모자이크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조각들 사이의 아주 작고 섬세한 틈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는 것처럼... 당시의 피난민들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유와 생명과 희망에 대한 갈구를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실제적인 상황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 기적의 배 한국판을 옮긴이의 마무리 글이다.
-12월 말의 얼음같이 찬 바닷물에 무작정 뛰어들어 남으로 향하는 수송선을 타려는 북녘 사람들, 왜? 왜? 왜?-
북녘의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알몬드 장군 휘하의 미 10군단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12월 10일부터 흥남부두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해안에 미조리 함을 비롯한 미해군의 주력부대가 집결하여 흥남외곽을 둥글게 화망폭격, 흥남에 집결한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를 질서있게 철수하도록 도왔다. 한국인 피난민들도 많이 몰려들었다. 동부전선에 들어가 있는 군인은 12만 정도였는데 이들과 함께 탱크, 대포, 장갑차, 차량, 화약 등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美해군기록에 의하면 이때 해군철수작전으로 철수한 군인수는 10만 5천 명, 화물은 탱크 1만 7천5백대, 포탄 등 군수물자 35만 톤, 그리고 민간인 9만 1천 명. 철수 군인에 거의 맞먹는 민간인 피난민을 실어날았다. 세계 군사 역사상 군인과 맞먹는 숫자의 민간인 피난민을 철수시킨 예는 없었다고.
-저 숱한 사람들이 왜 고향을 뒤로한 채 남으로! 남으로! 떠나왔을까-
이처럼 1950년 12월 중순 연합군의 주축이 된 미 육군과 해병대는 장진호 포위를 돌파하고 함정들이 대기하고 있던 흥남을 통하여 철수한다.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철수했고, 도시는 적의 포화에 의해 화염에 싸여 있었다. 다가오는 대포 사격과 공습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탈출이 매시간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비행기용 제트 연료를 가득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해안에 남아 있던 14,000 명의 피난민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포화가 쏟아지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 배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현 뉴욕 변호사)씨는 “선장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구출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라고 증언한다.
살을 에이는 12월의 강추위 속에서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갑판과 화물칸에 들어찬 피난민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무언으로 증거한다.
빅토리호에는 물이나 먹을 것, 화장실이나 의료진이나 통역관마저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적군의 기뢰를 뚫고 3일 만에 거제에 도착하기까지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5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생명의 기적"이 펼쳐졌다.
한국전쟁 후, 빅토리호 선장은 1954년 미국 뉴저지주의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로 일생을 봉헌하다가 2001년 10월 14일 선종하였는데 그를 포함한 47명 선원들은 세계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의 하나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흥남철수 당시 네드 앨몬드 미 육군 10군단 사령관의 부관이었던 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은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우리는 흥남 해안으로부터 군 병력과 피난민 모두를, 즉 미국인들과, 적국인 북한의 많은 남녀노소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적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은 우리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특히 미 해군과 상선의 선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10만 명의 피난민이 구조를 요청하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고 그들을 안전하게 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어느 누구도 피난민들의 국적이나 정치 성향을 문제 삼지 않았고 신분증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죄 없는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오직 구출해야 할 생명들이었을 뿐입니다. 피난민들을 탈출시키기로 한 결정의 현명함에 대해 나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생명의 문제라는 것이 저의 확신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 불쌍한 사람들을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거제에 도착한 빅토리호에서 작은 어선으로 옮겨타 섬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
Meredith Victory라는 10만 톤급 유조선인 이 배는 당시 미군 비행기에 연료를 보급하기 위해 흥남에 들어갔다. 그러나 철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을 내려줄 필요가 없어 회항할 예정이었다.
12월 20일, 선장 Leonard P. Larue 씨는 바다에 뜬 배를 바라보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바라보면서 도무지 뱃머리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배는 유조선이어서 사람을 태울 수 없게 되어있고 사람을 태우면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어서 한동안 고민하다 마침내 작심했다. 저들을 구할 수 있는 데 까지 구하자.
선원 40여 명만이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 전부였고 유조선이기 때문에 화재위험도 높았다. 뱃머리를 차마 돌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그는 John Childs 대령의 도움을 받아 유조선에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피난민들을 태웠다. 물경 1만 4천 명이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배는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숫자이다.
1950년 12월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은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언제 기뢰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천만다행히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만원이라 12월 24일 밤(크리스마스이브) 거제에 도착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3백 톤의 화물선 위에서 모진 추위와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이 3일을 여행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거제항에 도착했다는 건 기적이다. 오히려 배 위에서 5명의 새 생명도 태어났다니 이는 하느님의 돌보심이 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의 선한 이웃인 한국인들이 흥남 해안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며 탈출해야 했던 것은 여러 면에서 그 비극적인 전쟁 중에 일어난 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전 인류를 노예화하려는 결심으로 - 그 결심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 공산주의자들이 계획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시작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을 할지라도 최소한의 도덕성은 지켜져야 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악에 맞서기 위해, 그리고 국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으로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악한 세력에 맞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끈기를 주시고, 십계명을 성실하고 완벽하게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매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