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깜짝 놀라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깼지만 꿈이 하도 허무맹랑하다 못해 기상천외해 한동안 얼떨떨했다. 잠을 너무 많이 자서 별의별 꿈을 다 꾸는 건가. 아니면 영화를 하도 즐겨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으나 꿈치고는 참 별나고 희한스러웠다. 암튼 영화의 한 장면같이 선명한 현장감에 포성과 포연까지 실제처럼 느껴졌었다. 웃지 마시라, 사수가 없는 탱크의 포를 직접 조작해서 무슨 기어 같은 걸 힘껏 잡아당겨 포탄 한방을 날린 꿈을 꿨다. 문제는 포탑을 옳게 조절할 줄 몰라 포탄이 적진이 아닌 아군 진지로 떨어지는 바람에 지하벙커에 가둬놨던 일본군 포로들이 다 달아나버렸다. 탱크라고는 전시된 녹슨 탱크 구경이나 했고 컴퓨터 게임이라면 탱크 전투는커녕 블록 무너뜨리기도 하지 않았으니 꿈이라도 너무 현실성이 떨어졌다. 도대체 뭔 예시람? 가만, 짚이는 데가 있다. 그 때문이었구나. 흠!
얼마 전 이웃 동네에 한국인 부부가 이사를 왔다. 너무 반가워 인사를 튼 뒤 서로의 집을 번갈아 방문했다. 그 댁에서 두툼한 책을 하나 빌려 왔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이니 웬만한 소설이라면 상. 하권이 나올 분량이었다. 책 제목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었다. 신문지상에서 성함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자세히는 잘 모르는 분이었다. LA에 그분 이름을 딴 중학교도 있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한인 2세라는 것, 대단한 전쟁 영웅이라는 정도의 사전 지식만 가지고 책을 읽어나갔다. 계속 전선, 전투 이야기가 이어졌다. 엄정한 다큐멘터리, 철저한 논픽션으로 쓰인 본문 중 거의 98%를 차지한 서술은 거개가 전쟁 관련 내용이었다. 요즘 며칠째 잠자리에 들기 전 이 책을 읽었으니 탱크 꿈을 꾸고도 남을만하였다. 다음은 그 책에서 옮긴 내용들이다.
대령 김영옥은 19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김순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출범시킨 대한인 동지회의 북미총회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시립 대학에 들어갔지만 1년 후 자퇴하고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라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기 힘들어 미군에 입대를 했다. 세계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은 일본계 미국인들을 모아 100대대, 속칭 ‘니세이 부대(二世部隊)'를 만들었다. 하와이의 젊은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본의 진주만 침략에 협조하여 사보타주 등을 행할까 두려워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가둔 정책의 연장선으로 사실상 인질로 잡은 격이었다. 당시 장교 후보생 학교를 나와 소위로 임관한 김영옥은 한국계가 아닌 일본계로 분류되어 이 100대대에 배치되었다. 일제에 항거하다 조선에서 망명한 아버지의 조국은 이미 일본에 합병된 다음이라 인사 기록에 모국어가 일본어라고 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2차 대전에 참전, 유럽 전선에서 독창적인 전술로 독일군을 무찔러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가최고무공훈장, 미국특별무공훈장 등을 받은 역전의 용사였던 그. 그가 전투를 치른 프랑스 동북부 비퐁뗀느 마을 성당 입구 동판에 영웅으로 이름이 새겨진 김영옥. 미국 전투 교본을 다시 쓰게 한 탁월한 작전장교이자 미군 역사 최초의 비(非) 백인 야전 대대장이었던 김영옥 대령. 그는 지도 읽는 눈이 정확하고 치밀한 천부적 자질을 가진 군의 리더였다. 2차 대전 시 나치즘과 파시즘에 맞서 싸우며 병사들에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고 전투에 임하면 용맹스럽게 솔선수범을 보이므로 존경과 신뢰를 받은 전설적 전쟁영웅이었다. 살아있는 신화였던 그가 휴가차 귀국할 때 LA 타임스는 유니언 역에서 어머니와 재회하는 장면의 사진을 싣고 '영웅의 귀환'이라는 환영 기사까지 내보냈다. 귀대하려는 중 대전이 종식되어 1946년 제대를 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 사업을 시작했다.
애치슨 라인 선포는 한반도로 전쟁을 불러들이는 초청장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전쟁의 비극은 초기에 북한군이 불과 2개월 만에 남한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이 역시 두 달 만에 북한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더니 중공군 개입 이후 다시 두 달 뒤에 38선 이남으로 전선이 내려앉으며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는 통에 고통이 더 커졌다. 서울만 해도 두 번이나 공산치하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러니 피난살이에 지친 힘없는 백성들은 "우리는 들풀이오. 어제는 소가 밟고 지나가더니 오늘은 말이 밟고 지나가는군. 소에 밟히든 말에 밟히든 들풀에게는 마찬가지요."라며 자조에 빠져있었다. 전장에서는 전장대로 힘겨운 상태로 적군과의 교전에 의한 피해도 심각했지만 아군에 의해 아군이 희생되는 오인사격, 오인 포격도 빈번했다. 그의 휘하 부대를 궤멸하다시피 하고 대대장인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중상을 입은 것도 미 공군기의 오인 포격 때문이었다. 그 무엇보다 전쟁이 터지면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통을 받는 건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긴 예나이제나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였지만 부모님의 나라 한국에서 전쟁 발발 소식이 들리자 1951년 초봄 대위 계급으로 군에 복귀해 최전방에 섰다. 흥남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서 선발한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그 후 정보참모가 되어 대대를 맡았으나 당시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영옥 대위가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이었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자신감을 고양시켜 한국에서도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의 불패신화를 재현했다. 그의 창의적인 전술이 빛을 발한 수안산 공격으로 중공군을 타격해 38선이 북쪽으로 60km 북상하는데 큰 역할을 한 그였다. 철의 삼각지역 북방에서 펼친 이때의 작전명이 바로 Operation Piledriver이다. 대령으로 예편한 김영옥은 한국 정부로부터 후에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된다.
국가나 지역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려가며 앞장서서 기여한 사람을 미국에서는 영웅이라 부른다. 그런 이들에게 영웅 칭호를 붙여주고 동상을 세우거나 길 또는 건물에 이름을 새겨 기리는 미국이다. 그리하여 붙여진 이름 Young oak Kim Academy-Central Los Angeles Middle School이다. 한국에 처음 닿아 부산역 인근에서 본 피난민 아이들의 참상이 뇌리에서 가시지 않아 전쟁고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그다. 72년 대령으로 예편한 그는 사회봉사, 특히 약자인 여성과 유색인의 권익 확보에 일생을 바쳤다. 미국 최대의 한인 봉사 단체로 성장한 한인 정신건강 정보센터를 만들었고, 한인 2세들을 위한 한인 청소년회관, 한미 연합회도 그의 리더십 아래서 태동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평화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던 사람. 희생과 헌신 정신이 바로 김영옥 정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었다' 마크 클락크 前 유엔군 총사령관은 회고했다. 그가 인정한 대로 조지 위싱턴, 맥아더 등과 나란히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인으로 선정된 바가 있는 그. 김영옥 대령에게 미국에서는 특별 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공로 무공훈장, 전상 훈장 등을 수여했고 한국에서는 태극무공훈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프랑스에서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십자 무공훈장을, 이탈리아에서는 십자 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 등을 수여했다. 표면에 드러난 무수한 공적보다 더 뛰어났던 인품,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 나는 책으로 쓰일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비전과 용기를 가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고백한 겸손한 사람이 그였다. " 내가 만일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이다. "라고 올곧은 헌신의 정신을 밝힌 사람이 그였다. " 명예롭게 죽어 승리하는 것이 겁쟁이로 싸워 나라도 잃고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훨씬 시대가 좋아진 오늘날의 교민들, 특히 이곳 LA 한인들은 같은 남자로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시간을 축내고 있는지? 국가와 사회와 이웃을 위해 아니 최소한의 자기 본분이라도 충실히 하며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