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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Nov 24. 2024
발치를 둘러볼 때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게 정한 이치다.
따라서
오리알에 섞여서 부화된 백조 동화가 아니라면 오리 둥지에서는 당연히 오리만 태어난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두는 뻐꾸기가 다녀가지 않는다면 지빠귀 둥우리에선 지빠귀만 나온다.
만추, 나무 발치에 오롯하게 모여 앉은 낙엽을 바라보다가 얼핏 '감자꽃' 동요가 떠올랐다.
낙엽 지는 철이다.
앞뜰 잔디밭에는 뽕나무 널찍한 잎이 눗누렇게 떨어져 있다.
바람이 거칠게 휘몰지 않은 담에야 나무마다 제 발치에 소롯이 내린 지체들을 깔아 두고 있게 마련이다.
계절 감각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 캘리포니아 기후대에 포함된 우리 동네 역시 11월 말에 들어서니 비로소 낙엽이 진다.
뜨락의 뽕나무도 누군가의 시처럼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고'
무욕의 수도승처럼 자신을 말끔히 비우고 無로 돌아갔다.
삼월 초, 집을 처음 보러 왔을 적이다.
빈집 뜰에 허여멀건 나목 두 그루가 좌우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무 외피나 수형을 보면 대충 수종이 짐작되기도 하지만 아직 청년기의 나무라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아 분간하기 애매했다.
지역마다 유행처럼 즐겨 선택하는 수종이 정해져 있기에 리얼터에게 무슨 나무냐고 물어도 모른다고 한다.
먼저 살던 뉴저지의 집을 처음 보러 갔던 때도 겨울철이었다.
굴뚝가에 아주 커다란 교목이 헐벗은 채 삭풍에 떨고 서있는데 목질을 보니 체리나무 같았다.
동네 이름이 체리힐이듯 인근에 벚나무와 체리나무가 무척 많았고 가로수도 거의가 왕벚나무였다.
그렇듯 나목으로 선 이 나무 역시 이곳 여건에 적합한 수종이거나 지역민들이 관상수로 선호하는 나무 중의 하나일듯한데
몸통 밋밋하니 연회색 줄기를 가진 나무 이름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침 담장 코너 쪽 땅바닥에 낙엽 두어 장이 눈에 띄기에 주워 들었다.
마른 뽕잎이었다.
장을 담글 적에 오가피 등 생약제 삶은 물을 쓰기도 하나 우린 오월에 딴 뽕잎을 그늘에 말렸다가
그걸 달인 물을 써온 터였다.
헌데 뽕나무가 두 그루나 있어 다른 데로 일부러 구하러 갈 필요 없으니 안성맞춤, 아주 잘 된 일이었다.
뽕나무 비슷하다고 믿었던 대로 봄이 무르익어 새잎이 돋아나자 그 나무는 틀림없는 뽕나무였다.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하였지만 이와 같이 그 잎을 통해 그 나무를 알게도 된다.
은행나무 아래엔 샛노란 은행잎이 내린다.
단풍나무 아래엔 새빨강 단풍잎이 내린다.
참나무 아래로는 갈색 낙엽이 내려앉는다.
이렇듯 자기 그림자나 발자국으로부터 누구도 도망 치진 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따라다니는 또는 끌고 다니는 또 하나의 자기 분신인 것이다.
무슨 나무인가 일부러 관찰하지 않아도 낙엽을 보면 그 나무를 얼추 알아챌 수 있듯
사람의 경우도 발치의 흔적을 살펴보면 인격 내지는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사람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라 할 수는 없다.
한 단면만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정의 내리기 힘든 다중, 다면체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은 한마디로 설명될 수 없는 아주 복잡 미묘한 존재이기에
섣불리 흑백으로 성향 판단을 한다거나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
다만 보편성에 입각하여 유추할 따름이다.
그때 기준이 되는 것이 말씨로 그 사람이 즐겨 쓰는 말로 미루어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하기도 한다.
나이, 직업, 신분, 위치에 따라 일상용어에도 차이가 난다.
당연히 학자나 지성인이 다루는 언어 다르고 양아치 건달들의 어투가 따로 있다.
그동안의 언행들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졌는지, 얼의 꼴이라는 자기 면 깎일 행적은 남기지 않았는지
내 발치에 차곡차곡 깔린 것들을 점검해 볼 시간이다.
발치에 노랑 금화를 깔아놓은 건 안 봐도 은행나무다.
발치에 핏빛 보자기를 펼쳐놓은 건 보나 마나 단풍나무다.
나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 계절, 내가 흘린 말부터 곰곰 한번 둘러봐야겠다.
말이 씨가 된다 했듯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 사람의 운명의 행로를 만들어 나간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머리, 영혼, 마음, 정신에서 나오며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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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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