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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Nov 26. 2024
템플스테이와 사하촌
일주문인 조계문, 사천왕상이 지키는 천왕문, 해탈문인 불이문을 지나 금강 계단이 있는 보제루에 이르러야 비로소 대웅전 우러르는 절 마당.
범종각이 아닌 보제루 하단 옆자리 건물에서 지심 깊이 스며드는 범종소리 울렸다, 정상에 바위로 된 금샘이 있는 금정산이 저만치서 이마 드러내고.
대숲과 단풍이 대비도 선명히 조화 이룬 11월 말의 범어사 언덕에 고개 갸웃 내민 마지막 단풍빛 꽃처럼 곱다.
보물 제25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과 고색창연한 이층 누각인 범종각 색채야말로 만추 분위기와 제대로 어우러지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될 만큼 언제 사진에 담아도 운치 있는 범어사 감싸 안고 휘도는 담장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이나 탱화 등 걸개그림을 걸어두는 두 개의 돌기둥인 당간지주도 의상대사가 범어사 창건 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
범어사 템플스테이 장소인 선 문화원 입구에 도착하니 아이러니하게도 요산 김정한 문학비가 서있었다.
"새벽마다 당산 등에서 여우가 울어 대고, 외상 술도 먹을 곳이 없어진 농민들은 저녁마다 야학당이 터지게 모여들었다."
당연히 소설 <사하촌>이 생각났다.
이는 193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부산 출신 김정한 작가의 단편소설이다.
수탈당하는
농민의 저항의
식을 리얼리즘 기법으로 그린 소설로 극심한 가뭄과 지주의 횡포에 시달리던 소작농들이 집단행동에 나서게 된다.
보광사라는 절의 논을 소작하며 살아가는 성동리 마을 농민들이 지주들의 생존권 위협에 집단으로 저항하는 대립상은 점차 험악해진다.
겨울 재촉하느라 잔뜩 흐린 날씨 때문인가, 당연히 사찰 경내에 있으려니 한 템플스테이 장소 찾으려 한참을 헤매다녀 열이 올라서인가.
온전한 쉼을 위해 템플스테이하러 가면서 하필이면 왜 저항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 간의 갈등이 뼈대 이룬 사하촌이 떠올랐을까.
내가 처음 범어사를 찾은 건 1969년 여름의 일이다.
부산에 사는 같은 과 친구네를 여름방학 때 방문했는데 그녀가 송도해수욕장을 거쳐 범어사로 안내했다.
친구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님이셨고 집은 동대신동이었음에도 부산 최고의 사찰이라며 앞장 서준 그녀와 청룡동까지 버스 타고
가
산길 걷고 또 걸었다.
그때 친구가 귀띔해 준 '소설 사하촌'의 배경이라는 남루한 빈촌을 거쳐 뙤약볕 내리쬐는 산언덕 황톳길 한 시간쯤 걸어 산문에 이르렀다.
80년대 중반 부산으로 이사를 와 문단 언저리에 걸터앉게 되면서 여러 차례 문학기행을 따라다녔다.
김정한 선생 추모 소설가 모임에서 그분 소설 무대라는 사하촌을 찾았을
때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글로 일제에 저항했던 요산 선생 문학비가 범어사 가는 길목에서 우릴 기다렸다.
우린
그날
어느 허름한 막걸릿집에서 파전 안주 삼아 어지간히 술잔을 비웠다.
사진 하는 친구가 소개해 줘 범어사 구석구석, 계곡 건너 호젓한 부도탑이며 등운곡을 철 따라 찾았고 가을엔
억새
은사처럼 나부끼는 내원암 등성이 올랐다.
범어사를 기점으로 원효암으로 해서 금정산성 북문과 금샘, 고당봉을 둘러보거나 범어사 앞 봉우리인 계명봉에 올라 대마도를 조망하기도 했다.
부산불교방송 사보 편집을 맡아 일하던 1992년엔 신임 주지 취임 둘러싸고 기왓장 집어던지며 투석전 벌리던 범어사 분규 현장을 목격한 바도 있다.
밀밀한 편백숲 안개 어렸나, 등운곡 등꽃 피었나, 메타세쿼이어 녹슨 철사빛으로 변했나, 한해에도 몇 번 걸음, 이래저래 여러 수십 번 찾은 사찰이다.
전에 삼사순례차 또는 인연 따라 절에서 알짜배기로 하룻밤 유해본 기억이 있어서 웬만한 템플스테이로는 기대치 부응키 어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안개 뭉텅이로 흘러 다니던 운주사의 새벽, 일출 눈부시게 장엄하던 남해
보리암 뿐인가, 눈 쌓인 밤 데일 듯 뜨겁던 오세암의 아랫목이며 기진맥진 허기
진 배 채워준 봉정암 비빔밥의 맛을 그 무엇이 어찌 채워줄 수 있으랴
그래도 기대컨대 새벽 도량송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 싶었고 장작불로 따끈해진 구들목에 지지고 싶었으며 풍경소리 더불어 사찰 경내의 고즈넉한 분위기 욕심냈으나 이 시대에 가당키나 한 노릇이겠는가.
그 대신 템플스테이 덕에 범종각 둘레에서 열 사흗날 맑은 달빛 아래 시방세계로 퍼지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불전사물(佛殿四物)의 깊디깊은 여운에 잠겨볼 수 있었음은 예상 밖의 고마운 선물이다.
특히 이번 기회에 노을처럼 번지는 범종의 맥놀이에만 취해있던 내 청각을 새롭게 일깨운 소리가 있었으니 바로 법고, 북이었다.
부처님 뜻 뭇 생명에 널리 퍼져라 양손에 북채 들고 무아의 경지에 들어 소리 공양 올리는 스님 모습은 곧 도(道) 요 예술 자체였다.
축생도에 떨어져 괴로워하는 무지한 일체중생 부디 해탈하라는 천상의 북소리에 쩌르르
전율 같은 반응이 일며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마음 문 두둥둥 두드리는 법고 소리,
해가 짧아도 너무 짧아진 요즘, 다섯 시만 되어도 어둠살 내리는데 저녁 예불 시각인 여섯 시 반은 어느 결에 칠흑 한밤중으로 일주문 지붕 위 보름 향한 달빛 교교했다.
법고 소리는
'나무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죽과 북채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곧 나지 않는 것이라.
이 무음은 부처님의 소리이고, 부처님의 소리는 곧 원음(圓音)이다.
그러므로 북소리는 부처님의 소리'라 하였던가.
또 하나, 정갈하게 차려진 공양시간도 좋았지만 생애 처음 음미해 본 백련화 꽃차 향에 젖어 스님과 나눈 대중 다담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통상 사찰에서는 녹차를 나누는데 여기 준비된 다기 일습을 보니 대형 백 자기와 유리잔이라 무슨 차일지 내심 의아했다.
70도 정도로 식힌 물에 냉동시킨 연꽃 봉오리를 올리고 조금씩 보온병의 물을 따루어 보태자 얼었던 이파리가 사르르 피어나며 연꽃이 만개했다,
마산 친구한테 배워 둔 바 있는 냉동실 얼음통에 매화를 따서 즉각 얼려 만드는 매화차와 같은 원리였다.
스님이 일러주신 효능으로는 연꽃차에는 케르세틴(Quercetin)이란 독특한 성분이 들어있는데 이는 항산화물질로 알려진 플라보노이드의 일종으로 채소류나 과일류에만 함유되어 있다 하였다.
그 성분은 염증 반응을 억제하고 면역계를 자극하며 항바이러스 작용을 하고 암세포의 성장을 막아주며 기운을 돋우는 링거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
동의보감에서 연꽃차의 효능을 이르길 체력이 허한 사람의 기운을 돋게 해 주고 장복하면 잡병에 걸리지 않고 몸이 튼튼하도록 돕는다고 한 대로다.
노인의 기력저하를 보해주며 어혈을 풀어주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준다고도 했으며 천하절색이라는 양귀비가 피부 미용을 위해 즐겨 마신 차로 알려진 연꽃차다.
연한 식물이 풀어내는 향같이 은은한 풀 향기에 더해 쌉쌀한 듯 담담한 연꽃차와는 첫 만남인데 느낌이 좋아 앞으로 자주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큼직한 백자기 안에서 비로소 봉오리 연 백련화, 향기 은은한 연꽃차로 환생하는 순간의 고요
.
다구 일습 준비하고 차를 우려내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곧
선(禪)
.
다담 시간은 생의 어느 한 점 아주 잠시 수유(須臾) 일 따름이나 영원으로
이어질
듯
범어사에서 소장한 삼국유사가 국보로 승격했다는 현수막이 걸렸으나 전시품은 아니었던 성보 박물관,
그 앞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선 석탑과 은행나무 누가 더 나이 들었을까?
템플스테이와 불교대학 등을 운영하는 선 문화원 저편에 단정히 솟은 계명봉 그리고 정상 아래 계명암 법당과 요사채 어렴풋했다.
저 아래 하계,
휘황한 조명과 화려한 간판의 숲으로 놀랍게 변해버린 사하촌의 오늘을 김정한 선생이 본다면 "대단해!" 하셨을까? "말세로고!"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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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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