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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Nov 29. 2024
부도밭 지키는 calico cat
범어사 부도탑은 범어사 불자라도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계곡 건너편 호젓한 장소에 위치해 있는데요.
새벽안개 자욱한 날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준다며 사진 하는 친구가 안내해 준 덕에 오래전 알게 되었지요.
정확히는 천왕문과 직선거리에서 마주 보이는 바위 더미 널브러진 계곡 입구로 들어가 약 오백 미터쯤 걸어가면 되는데요.
거대한 바위 표면에 나있는 희끄무레 닳은 발자취만 따라가다 보면 이정표 없이도 해묵어 이끼 덮인 부도밭에 이르게 되지요.
소나무 숲 둘레에 지금은 산죽과 차나무만 푸르지만 참나무 등 활엽수 그늘 짙은 여름철엔 으슥하다 못해 휘휘한 감조차 들어요.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만추의 부도밭 분위기는 또 어떨까? 휘적휘적 찾아갔습니다.
바윗길 끝나고 잠깐 이어지는 솔밭 언덕 아래짬 익숙한 길 따라 내려가자 은자처럼 숨어있는 부도탑들이 이마 드러냈어요.
돌의 침묵만이 적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곳, 절대고요를 덧들이지 않는 산새소리만 가끔 들려올 뿐이었지요.
부도밭으로 내려서자 초입에 웬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파수꾼이듯 언뜻 시선에 들어왔어요.
산중에서 느닷없이 고양이를 만나면 괴담 생각나 섬뜩할 만도 한데 그간 길냥이들과 친하게 지내 오히려 든든한 감마저 들더라고요
오도카니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인기척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고양이.
마치 참선 삼매에 깊이 든 듯 눈도 뜨지 않았습니다.
생사 해탈의 도를 이생에선 기어코 깨우치리란 서원 태산 같아 꿈쩍도 않는 걸까요.
사진 찍느라 이리저리 다니며 낙엽 밟히는 소리를 냈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조각처럼 여전히 사려 앉은 자세를 풀지 않더라고요.
얘, 넌 왜 외따로 여기서 이러고 있니? 산속에서 무얼 먹고사는 거니? 말을 걸어봐도 내내 아는 체하지 않더군요.
현생의 묘생(猫生), 문득 어떤 업을 지었길래 고양이로 태어났을까 궁금해졌고 하필이면 왜 여기 머물고 있을까 의아했지요.
이 고양이는 대체 무슨 인연으로 만추의 쓸쓸한 부도탑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흔하디 흔한 흑묘, 백묘도 아닌 Calico cat은 부도탑과는 대체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요.
캘리코 캣은 흰색 터럭에 황토색과 검은색 무늬가 있는 삼색 고양이를 이르지요.
복을 불러오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알려진 삼색 고양이는 대부분 암컷이라는데요.
그렇다면 어느 부도탑 큰스님을 평생 시봉해 온 상좌승은 아니겠고 스님 죽도록 흠모해 온 양가댁 참한 규수였을까요.
아니면 범어 선원 청규를 어기고 수행정진 설렁설렁 게을리한 과보, 그도 아니면 시은(施恩) 소홀히 했던 벌 지중해서 축생도에 떨어진 걸까요.
잡초가 밭을 망치듯 욕심이 중생을 망친다고 법구경이 설했듯 중생심 벗어나기 힘든 수행자 속세 인연 가벼이 놓지 못하고 절간에 머물러도 상(相)에 집착, 풀소유 욕심내다 그만 짐승 몸 받은 걸까요.
부도밭을 떠나려는데 고양이가 그제사 눈을 뜨고 무상심한 표정으로 건너다보더라고요.
자르르 윤기 나는 냥이, 비쩍 여윈 상태 아니라도 마침 배낭에 점심 대신 받은 떡가래가 있길래 여러 쪽으로 나누어 바위 헌식돌 삼아 얹어놨지요.
이슬 마시고 사는 식물 아닌 고양이라서이겠지요, 먹이를 보자 비로소 몸을 일으키더니 떡이 놓여있는 데로 와서 천천히 먹기 시작하더군요.
식사시간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다 먹고 난 뒤 가만히 움직였지요.
잘 있어~ 손 흔들고는 훌훌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솔밭 언덕을 넘어서려다 뒤돌아 보니 의외로 고양이가 저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제가 멈춰 서서 바라보면 고양이도 걸음 멈추고는 오도카니 앉아 제가 움직일 때까지 가만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어디까지 따라오나 보자 싶어 뒤로 걸어가면서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어요.
제가 걸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또 따라오고 돌아보면 멈춰 서서 딴전 피우다 슬그머니 꼬리 사려 앉아버리고... 그러길 수차례 반복하더군요.
사각거리는 마사토 소리 또렷한 걸 보면 계곡 마무리되는 끝자락, 큰절 거의 다 와서였어요.
이제 안녕~어서 네 자리로 돌아가렴, 훠이 손사래 칠 거도 없이 일정 거리에서 스스로 쿨하게 돌아서더군요.
오똑 서서 한동안 마주 보더니 뒤돌아 뒹굴 댕굴 재롱 한번 부리고는 온 길 되짚어가다 또 멈칫 서서 이쪽 바라보고는 이윽고 바위 뒤로 사라지데요.
첫추위 물러나고 날씨 화창해지면 범어사 부도밭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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