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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Nov 29. 2024

영실 존자암 가는 길, 첫눈 오신  날


천백고지에 첫눈 뿌옇게 눈보라 치며 흩날린 다음날, 해가 떠오르자 한라산 자태 눈부셨어요.

눈 하얗게 쌓인 백록 봉우리가 어서 오라고 눈짓을 하지 뭡니까.

설렘으로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지요.

늦잠을 잔 터라 부리나케 아점을 때운 뒤 영실로 달려갔답니다.

영실 입구에서부터 이미 승용차가 꼬리를 물고 길게 줄지어 서있더군요.

시간 관계상 아무래도 윗세오름까지는 무리였어요.

아차! 더군다나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스틱도 아이젠도 준비하지 못했더군요.

존자암이라면 설경 방문지로는 오히려 위험부담도 적어 최적이겠다 싶더라고요.

평상시는 계단으로 죽 이어진 길이라 걷기 힘들지만 눈 덕에 층계가 사라져 오르기도 수월했어요.

오르막 언덕 따라 계속된 층층의 계단길에 눈 두터이 쌓여 걷기 아주 편했던 거지요.

초대받은 설경으로 향하면서 자꾸만 헤실헤실 입이 벙글어졌어요.

어찌 그러하지 않겠어요, 하늘빛 푸르른 데다 바람결 따라 무성한 조릿대 이파리 서걱대는 소리 경쾌했으니까요.

존자암 가는 길은 미답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다행히 적설량 적당하고 빙판길은 아니라서 어려움은 없었어요.

추울 것 같던 날씨조차 온화하기 그지없어 장갑을 끼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였지요.

사진 찍으려면 성가시게 거치적거리는 장갑이잖아요.

둥둥 감았던 머플러도 풀어 젖혔고 재킷 지퍼도 열어둔 채 걸었습니다.

원래 눈 쌓인 다음날은 하늘빛 청유리알처럼 싸늘하게 보여 무척 쌩할 것 같아도 푹한 편이지요.

숲에 어리인 청량감에 심호흡 절로 되고 신명이 올라 노래까지 흥얼거려졌네요.

이 청쾌한 설경을 누릴 수 있는 축복 주심에, 어찌 하늘 우러른 감사에 감사가 아니 나오리이까.



침엽수 외에는 거진 다 낙엽 져, 가지만 앙상한 나목의 숲에서 까마귀 까각거렸지요.

워낙 날씨 맑은 날이라 그마저 음산하게 들리지는 않더군요.

더구나 존자암 오르는 내내, 눈 구경 온 가족 단위의 산행인이 이어져 전혀 휘휘한 감을 느낄 새가 없었지요.

눈 덮인 산길 걸으며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재잘거리는 아이들 해맑은 소리도 듣기 좋았고요.

눈길 뽀드득거리는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사이로 물자 운송하는 모노레일이 이웃지기처럼 따라붙더군요.

몇 번의 오르내림이 계속되더니 작은 계곡이 나타나고 드디어 저만치 길 가운데 우뚝 선 일주문이 보였습니다.

그새 존자암에 거진 다 온 거지요.

어딘가 허술해 뵈는 건물이 앞장서 마중을 나왔는데요.

현판은 안 보이나 뜰에 수곽이 있어 약수 흐르기에 내심 법당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설마 그럴 리가요.

우측 종각은 설명이 없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단청 입힌 기와집이라서 뭐야? 할 만도 하나 종무소이고요.

종무소를 돌아 뒤로 가자 그럼 그렇지, 4단 축대 위에 둥드렷 날아갈 듯 팔작지붕 추켜올린 대웅보전이 정좌했더라고요.

대웅전 지붕 위 눈 녹아 줄줄이 흘러내리는 낙숫물, 마치 계류 소리처럼 들리는 고즈넉한 오후.

볕바른 대웅전 마당을 돌아 뒤꼍으로 가다가 숲 속 나무 둥치에 산호처럼 빛깔 고운 열매가 조랑조랑 달려있더라고요.

나무 휘감아 얼크러진 줄기에서 익어가는 열매가 무언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사진 확대해 보니 노박덩굴 열매였어요.

창천에 대비도 선명하게 꽃인 양 익어가는 노박덩굴 열매.

하도 어여뻐 목 아프도록 바라보다가, 발길 은 눈 바닥 골라 아예 누워서 한참을 지켜보았네요.

등판 축축해져서야 겨우 일어나 대웅전을 돌아 뒤쪽으로 올라갔는데요.

통상 거기엔 규모 조촐한 삼성각이나 독성각이 자리 잡는데 이곳은 명칭 특이한 국성재(國聖齋)가 무게감 있게 서있었어요.

국성재는 매년 첫여름 달인 4월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재를 봉행하던 제각이라고 합니다.

제주목·정의현·대정현 현감 중에서 한 명을 뽑아 목욕재계하고 이 암자에서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해요.

그보다 더 상층인 언덕 위에는 부도탑 한 기가 모셔져 있었는데요.


미끄러운 눈길이지만 설명글을 읽고나니 꼭 참배드려야겠다 싶어 조심조심 언덕 위로 올라갔더니 탁 트인 시야가 일품이었습니다.



제주의 중심축인 한라산이지요.

한라산에서도 가장 신령스러운 장소로 여기는 백록담과 더불어 영실은 이름 자체부터 영험스러운 기운이 서렸는데요.

해서 제주민들은 한라산 전체를 기도처이자 부처님 도량으로 여겨 이곳에 불국정토 이루기를 기원했다고 하네요.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뜻의 불래(佛來), 그리 믿었기에 봉긋한 오름 이름을 불래오름이라 짓고 거기에 존자암을 건립했지요.

존자암은 그리하여 1,362m 불래오름 남사면의 밋밋한 능선 마루에 정좌해 있게 되었어요.

대웅보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측에는 이곳에 불교를 전했다는 발타라 존자, 우측에는 산신을 봉안했고요.

동국여지승람에 나한을 모셨던 절로 기록돼 있으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소속 사찰이라고 합니다.

존자암은 부처님의 16 아라한 중 발타라 존자가 초전법륜한 성지로 알려진 곳이기도 한데요.

현재 존자암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습니다.

존자암지 자리 중에 맨 위에 자리한 세존사리탑은 고려 말 혹은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내 유일의 부도라고 해요.

부도란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묘탑이랍니다.

명칭으로 유추컨대 아마도 탐라국에 불법을 전한 발타라 존자가 인도에서 세존의 사리를 모셔와 세운 사리탑이 아닐까요.

팔정도를 상징하는 8 각형 기단 위에 둥근 굄돌을 놓고 탑신을 얹은 후 옥개석과 보주를 올린 단아한 모습의 탑.

이 부도는 제주석으로 만들어진 석종 모형의 사리탑으로 유려한 곡선미를 지녀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답니다.

존자암 절터에서 가장 상부에 속하는 언덕 위 부도탑에 올랐다가 살푼 언 돌층계가 조심스러워 멈칫거렸는데요.

앞선 청년 하나가 층계 옆 잔디밭에서 주르르 미끄럼을 타고 언덕을 내려가길래 따라서 단숨에 미끄러져 내려왔네요.

차츰 해가 기울며 고도가 있어서인지 산바람이 차워졌어요.

이제 조심조심 안전하게 하산하면 되므로 옷깃 단단히 여미고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답니다.

여러 사람이 발자국 디뎌 다져진 길보다는 눈 쌓인 곳이 안전해, 길가 눈 속으로만 헤집고 걸어 하산했지요.

그 통에 등산화 속으로 눈이 들어와 양말은 푹신 젖었지만 20여 분 만에 무탈히 영실 버스정거장에 닿았어요.

눈 속으로 초대받아 설경산수에 취했던 한나절, 그 은빛 여정을 이 겨울 축복처럼 모두들 누릴 수 있기를!

소재지 : 서귀포시 하원동 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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