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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05. 2024

홍신자, 여전히 도전 멈추지 않아 젊은 그녀



'미친 듯' 시작한 무용만 생각하며 한눈팔지 않고 눈코 뜰 새 없이 꼭 십 년의 세월을 보내자 뉴욕 최고의 무용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공연 요청이 이어졌고 관객들은 늘 나의 몸짓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나에게 찾아온 삶의 갈증까지 해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도로 가는 짐을 꾸렸다. 마치 한 생애를 끝내고 다른 생애를 시작하는 기분으로 뉴욕 생활을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더 이상 사람들이 보내는 찬사나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은 일생 동안 나를 쫓아다닐 물음을, 내가 태어나 꼭 풀어야 할 것 같은 근원적 숙제를 잠재울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002년 홍신자 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중에서, 17p-


여타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춤꾼 홍신자다. 영원히 자유로운 맨발의 순례자이자 구도의 춤꾼인 그녀다.  30대의 그녀는 인도로 떠나 여러 해에 걸쳐 명상 수행을 하며 구도자로 살아간다. 문명세계로 귀환한 이후 그녀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만일 힘들고 거친 구도의 여정을 걷지 않았다면, 그때의 자양분이 받침 되지 않았다면, 위와 같은 글을 자유자재 써내릴 수 있었을까.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하루가 열리듯 지금도 새롭게 시작될 작업이 기다려지고 그래서 설렌다는 그녀다. 아직도 남아있는 생의 비밀과 자연의 신비를 좇아 호기심 어린 눈빛 반짝이는 그녀. 서귀포에서 그녀가, 용천수처럼 샘솟는 창작 예술에의 물꼬를 터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가령, 치유의 숲에서 그녀의 자연 명상과 연동된 명상 캠프를 열어 시민들과 함께 진행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도 있겠고. 출신지가 어디이건 현재 서귀포에 적을 두고 거주하는 문화예술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서귀포 사람이므로 이 점, 문예 부문 시정 운영에 필히 참작되었으면 좋으련.


바다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어 찾은 서귀포에 노매드의 일상을 부린 그녀다. 어언 그 세월 덧쌓여 십여 성상, 서귀포 예술의 전당을 마주 보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새해 첫 태양이 떠오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나씩 겹쳐지는 연륜이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이를 보태나간다. 만 80이 되던 2020년, 서귀포 사계 해변에서 진행한 <장례> 퍼포먼스를 통해 그녀는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란 걸 보여주었다. 우리와 늘 함께하고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열 살 나이에 겪은 6·25는 그녀에게도 참담한 경험이었다. 생과 사가 순간에 갈리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는 건,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 어린 시절을 전쟁의 광기 속에서 지독히도 두렵게 보냈기에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게 각인돼, 아마도 그때부터 죽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었을지.



앞으로의 버킷리스트 첫째이자 정점이라면 '마지막은 바다 위에 작은 배 하나 띄워 그 안에서 한없이 멀리 떠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는 그녀. 고향에 가는 듯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두둥실 수평선 너머로 스러지고 싶다고. 그렇게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그녀. 애써 외면하려 하고 모른척해 봤자 생명 받은 존재는 한결같이 모두 종내는 소멸하기 마련이다. 해서 '하고 싶은 것이면 언제든, 무엇이든 시작한다'며 여든 넘어서도 여전히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추구하는 젊은 그녀에게서 초월적 에너지를 전이 받을 수 있었다. 내년이면 데뷔 50주년이 되는 해, 서귀포 바닷가를 무대로 그녀의 예술혼 뜨거이 불타올라 더 환희롭게 더 높이높이 비상할 수 있기를!


피아골 계곡은 깊디깊었다. 골짜기는 한없이 계속됐다. 고행하듯 걷고 또 걸은 산행 뒤의 노곤함. 기진맥진한 심신을 지리산 아래 토담집에 뉘었다. 비 오듯 와글거리는 청개구리 소리. 거기에 아주 낮게 그러나 틀림없는 간격으로 울리는 소쩍새 울음. 애소하듯 종내는 피 토하듯 소쩍새 소리는 허공 가르며 비수처럼 시리게 꽂혀들었다. 순간, 80년대 어느 날 홍신자의 공연을 처음 접했던 고도(古島) 무대가 떠올랐다.

범종의 긴 여운 속에 스며드는 북소리 음울했으며 땅속으로 퍼져드는듯한 괴기스러운 징 울림이 길게 꼬리를 끌었다. 최대로 절제되고 응축된 춤꾼의 몸짓은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섬보다 더 적막해 섬찟하도록 긴장 감도는 전율이 일었다. 맨발에 무명으로 지은 허술한 옷가지 걸친 채 탐욕 자르듯 낫으로 무심히 머리카락 내리 자르는 행위에 몰두해 있는 그녀. 그러고는 하늘 우러러 초혼하듯 절규하듯 내지르는 한 서린 곡성. 이어서 마구 허공을 난자하는 낫의 번뜩임에, 영혼 광기 절망 구원 혼미 경악 공포 허무 따위 단어 낱낱이 외떨어져 저 혼자 서성댔다. 졸작<표류하는 섬> 중에서-


오래전 <표류하는 섬>이라는 졸작에 등장했던 홍신자 선생을 이중섭 문화거리에 있는 뮤직 펍<프레드 허쉬>에서 인터뷰 건으로 만났다.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지만 그녀에게 붙은 '세계적'이란 타이틀의 무게로 약간은 긴장됐다. 연륜을 가늠하기 어려운 꼿꼿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긴 세월 춤과 명상으로 다져진 내공이 읽혔다. 카리스마 넘치는 강한 첫인상과는 달리 악수하며 잡은 손길은 어린아이처럼 보드랍고 따스했다. 그렇게 수인사를 트고 나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낸 막역한 친구처럼 우린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영혼의 춤사위가 그러하듯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롭고 진솔한 성격이라 초면임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 나눴다. 틀에 박힌 문답형 대담보다는 서로 격의 없이 민얼굴로 솔직 담백하게 풀어나가는 인터뷰 스타일을 선호해 온 터. 격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굳이 거추장스러운 치장이나 거품 따윈 거두고 편안하게. 이 나이에 덧보탤 것이나 슬쩍 뺄 것이 무어냐며 우린 진진한 수다 삼매경에 끝 모르게 빠져들었다.


맨발에 흰 무명 옷을 입고 자유자재, 거침없이 무대를 누벼온 그녀다. 탄탄대로의 미래가 확고부동하게 펼쳐질 것이라고, 이미 70년대 초 뉴욕 타임스가 예견한 대로였다. '동양 전통에 뿌리를 둔 서양 아방가르드 무용의 꽃'으로 데뷔 이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그녀다. 한풀이 의식이었던 그녀의 데뷔작 포스트모던 댄스 <제례>의 파격적인 성공에 그러나 안주치 않았다. 정상에 서자 더 이상 도전정신이 생기지 않게 되면서 그녀는 다시 탈피를 시도했다. 늘 추구해온 명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질문 또한 무시로 조여왔다. 그녀는 영광의 자리를 박차고 훌훌 인도로 구도의 여정(旅程)을 떠나 고행의 길 위에 선다.


76년부터 몇 해 동안 인도에 머물면서 라즈니쉬와 마하라지의 제자가 되어 그들의 가르침과 명상법을 익히며 치열한 수행자로 살았다. 특별히 마하라지에게서 우주가 품은 내밀한 섭리에 관해 심도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인도를 떠나기 전,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를 찾아 히말라야로 향했다.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인 영적 지도자로부터 동병상련의 연민어린 위로를 받은 데다 그의 축도까지 듬뿍 받은 그녀. 그러나 허술한 음식으로 인한 영양실조에다 남루한 잠자리에서 추위 견뎌내며 여러 해 혹사시킨 몸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듯 반역을 일으켰다. 마침내 그녀는 혼자 걷기조차 버거워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뉴욕으로 돌아왔다. 병원 다니면서도 오랜 기간 꾸준히 호흡 수련과 명상 수행을 실천하는 동시에 운동요법과 식이요법을 병행해 나가야 했다. 그녀는 새로운 육신으로,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나 완전히 회복되어 무용계로 복귀하기 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춤을 추는 순간만이 올곧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강한 자기 확신이 들었던 그녀다. 신들린듯한 몸짓이 바로 사랑하는 자신을 표현해 내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여겼던 터였다. 그러나 '홍신자 표 춤'이라는 그녀만의 독보적 무용에, 선과 명상이 보태져 춤꾼 홍신자의 세계는 더 넓고 깊고 유현해졌다.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흙바닥 맨 아래까지 내려가 목숨 내건 채 고행한 결과였다. 영적 감응의 시간들을 통해 스스로를 가일층 연마한 그녀는 예리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자신을 승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전위적인 현대무용가에서 구도의 춤꾼이 된 그녀는 깨달음을 찾아가는 순례 중 또 하나의 자아와 마주 설 수 있었던 것.


점점 글에 매료돼갔으며 그렇게 쓰기 시작해, 춤꾼 홍신자가 아니라 작가 홍신자로 거듭나자 인쇄돼 나오는 글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출간된 책들은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글에서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타인의 시선에 맞추지 말고 홀로 춤추듯 살라고 조언한다. 황사로 희뿌연 대기에다 코로나로 번아웃되고, 불투명한 미래로 암담해하는 현실이라 앞으로도 산소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는 그녀다. 그간 <자유를 위한 변명>, <나도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나는 춤추듯 순간을 살았다> 등등을 썼다. 그 외에 영시집 <Dance of Silence>, 작품 화보집 <입에서 꼬리까지>도 남겼다. 옮긴 책으로는 <마하무드라의 노래>, <사라하의 노래>, <아주 오래된 선물> 등이 있다.  


한국에서도 인도의 뛰어난 구루이자 철학자인 오쇼 라즈니쉬를 추앙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1980년대 초반 미국 오리건에 세워졌던 현자들의 유토피아인 라즈니쉬 명상센터는 꽤나 유명했다. 명상센터는 캘리포니아 곳곳에서도 붐을 일으켰으나 한때의 일시적 성공은 결국 공식적 실패로 끝이 났다. 현대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갈증과 공허감이 수많은 히피족을 만들어 내던 때였다. 동시에 동양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던 미국인들이다. 탐스러운 흰 수염 늘어뜨린 라즈니쉬에 일부 열광했지만 그보다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다수인 나라여서일까. 아무튼 현자는 미국에서 자치공동체를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했다. 그러나 공동체가 불미스러운 범죄와 연루되며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롤스로이스 애호가였던 그는, 열혈 광신자들로부터 선물받은 차 에 둘러싸여 지내다 인도로 추방된 후 60세에 숨을 거두었다. 한국에도 그 비슷한 하버드 출신의 곱상하게 생긴 스타급 승려가 있어 추종자 꽤 많았다던데.


헛되고 헛되도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게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구약 전도서의 한 대목이다. 저마다 헛된 바람을 좇고 있음을 일찍이 간파한 첫 번째 지혜의 인간 솔로몬의 말이라던가. 욕망의 덫에 걸려 스스로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정상을 향해 죽자 사자 무한 질주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도 끝내 채워지지 않는 미진함이 공허해 다시 허기를 느낀다. 목표점에 깃대를 깊숙하게 꽂지만 성공이라는 최고 지점에 도달하고도 환희심은 잠시다. 마음은 춥고 가슴 또한 왜 그리 허전한지. 번뇌의 근원인 미망(迷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생사, 건너다보면 저마다 안쓰럽기 그지없다.

살면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목표 삼은 것에 닿으면 그때 우리는 충만한 행복감으로 뿌듯할 거 같다. 내 삶에서 이거면 충분하다고 느끼는 그 목표를 달성하면 당연히 행복해진다, 아니 행복해져야 한다. 이때 충분하다는 그 정도를 자신이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행복은 내 것이 아니다. 여기서 특히 염두에 둘 부분이 있으니 지나친 욕심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 바로 이 지점을 놓치기에 우리는 헛헛해 마냥 헛손질을 하며 바닷물을 들이킨 듯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린다. 수행자가 아니라도 일상성을 초월하면 비로소 그때 높이 날아오르게 되면서 황홀경에 든다는데... 초월의 경계는 완덕의 경지처럼 아득히 멀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영혼과 깨달음에 대해 묻는다면 여전히 아득해진다는 그녀. 삶의 노정을 완성시켰다고 호언하는 이 있을 수 없듯 불완전한 우리 모두는 미완의 삶을 살아갈 뿐이기에.


한국에서의 그녀는 맨발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면서 자유란 어휘와 동격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을 수 있는 게 곧 자유다. 순간순간마다 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충실했다면 그 자체가 자유로운 것. 무엇을 했을 때 진정 자유롭고 충만스러웠는지, 어떤 일을 할 때 보람과 희열을 느꼈는지를 되짚어 보라. 목표를 향해 성큼 다가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이를 이루고 나면 우리는 충족감으로 자유 안에서 헤엄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자 한다면 따라서 치열한 구도자의 자세로 임하는 수련이 필요하겠고 밑바닥부터의 수행정진 역시 필수겠다.


자유로운 영혼이자 영원한 자유인인 그녀. 그러나 자유로워지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일, 욕심을 놓아버리는 일, 집착을 끊는 일이란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충실해야 자유로울 수 있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자유롭게 되며, 무엇에 건 매이지 않을 때 자유인이 된다. 과감히 버리고 떠나야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다는 걸 대부분 간과하나 그녀는 진작에 알았다. 그녀는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했으며 모든 애집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롭다는 걸 체득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한 절대로 노인이 아니다, 진 로스텐드의 말이 맞다. 1940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호텔경영학을 공부하다가 스물여덟 나이에 뒤늦게 무용계에 입문해 컬럼비아대 무용과 석사가 된 그녀다. 어느 날 알윈 니콜라이의 전위 무용을 보던 중 ‘우연을 가장한 숙명’으로 춤이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의 문하에서 무용에만 집중했다. 그것은 필연적 숙명이자 축복 어린 인연, 분명 운명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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