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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04. 2024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건

협곡 트래킹

여행은 삶의 묘약이며 보약이라고 한다. 여행은 자신에게 건네는 시원한 생수 한잔이고 삶의 선물이자 보상이며 건조한 일상을 버티게 하는 작은 위로다. 여행은 아름다운 혹은  진기한 경치를 보는 외에, 지평선 너머에서 전해오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고 꽃 향기를 숨 낮춘 채 느껴보는 침묵의 순간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다. 여행이란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이라고 멋지게 정의한 은희경.

 
혹자는 삶에 활기를 찾아주는 충전이라고도 한다. 일상의 관성과 타성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그리울 것을 만들기 위해 떠나는 일이며 낯선 세상을 친근하게 바라보는 일이라고도 하였다. 그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온 시간들을 재검정 해보며 반복되는 일상에게 잠시나마 작별을 고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채우고 오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의식을 젊어지게 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며 자기 내부의 공간 깊숙한 데로 향해 가는 일이라고도 한다.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가진 것에 감사함을 알기 위해 떠나는 거라고도 하였다. 아무튼 길 떠나 오감을 연 채 길 위에 서면 우리는 새로운 그 무엇과 만나게 되어 있다.  낯선 곳에 가서 새로운 풍물들을 보고 즐기려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킨다는 단순한 관광 그 이상인 여행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해서 한두 해는 추억을 반추하며 행복스러운 미소 지으며 살아 낼 수가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을 낯선 곳에 세워놓고 바라보노라면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렇다. 또 다른 발견 말이다.  

  
하지만 다들 사는 일이란 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닌 까닭에 옭아매는 이런저런 제약이 있어 번번 발목이 잡힌다. 건강이 여의치 않다거나 경제적 시간적 여건이 제동을 걸기도 하고 기타 현실적인 여러 부분이 따라주지 않으면 선뜻 나설 수 없는 게 여행이다. 나부터도 이틀거리로 물을 줘야 하는 여름 꽃밭이며 울집 파숫꾼인 강아지가 우선 걸린다. 이처럼 기쁨을 주고 안정감을 주던 생명체들이 책임지고 거두어야 하는 부담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그러나 매사 그러하듯 간절한 맘을 두고 살다 보면 이룰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오게 마련이다. 이번 역시 여행을 주저주저하다 합류하기로 용단을 내린 것은 언니의 은근스런 독려도 있었지만 아들과 딸내미의 사려 깊은 성원 덕이었다. 암튼 여행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는 이들의 아쉬움을 뻔히 알면서 자랑이나 늘어놓기보다 고생담 하나.....

첫날 닿은 자이언캐년. 크림빛 핑크빛 붉은빛을 띤 수직 절벽군이 웅장하게 둘러선 자이언캐년. 7~8천 피트급 암봉들이 압도하듯 다가선다. 자이언 캐년의 진면목이 시작되는 Canyon Junction에서 오후 막간의 짬을 활용해 셔틀을 타고 피안 너머 천상의 세계로 입성했다. 먼저 오른 곳은 Weeping Rock, 벽공으로 치솟은 거대 암산의 반궁형 암벽을 따라 드넓게 흘러내리는 물이 마치 수정눈물 같아서인가. 그보다는 기와집 추녀 끝에 낙수 져 내리는 빗물과도 같다. 줄줄이 하염없이 내린다. 고개를 바짝 치켜들면, 부여 고란사 뒤뜰 샘터의 고란초를 연상케 하는 양치식물인 maidenhair fern가 바위틈마다 싱그러이 하늘하늘, 소녀의 긴 머릿결 같은 보드라운 잎새를 너울댄다. 홀로인 젊은 유럽인이 카메라를 내밀며 한 장 찍어달랜다. 저 멀리 자이언 연봉을 배경 삼아 물방울도 넣어 셧터를 눌러준다.


둘째 날 일찌감치 장비 단단히 챙기고 Narrow로 향했다. 버진리버 물길을 따라 시종 걷는 16마일 트레킹 코스라 카메라와 갈아입을 옷과 점심거리인 샌드위치와 간식 등은 배낭 안 지퍼백에 잘 간수시키고 야무친 각오로 양손에 스틱을 들었다. 얕은 곳은 발목이나 적시지만 깊은 데는 가슴까지 온다는 물길이다. 비가 잦은 여름철이라서 시냇물은 맑지 않았으나 개의치 않고 발을 담갔다. 뭉게구름이 가득 낀 하늘에 바람은 선선했고 물도 찼다.



좁고 긴 협곡 양옆으로 까마득 솟구친 암벽들의 장엄미저마다 경탄 보낸다. 비경들 사진에 담고 싶어도 불투명하니 바닥의 돌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라 장님 길 더듬듯 조심해야 하는 발걸음. 온 신경을 발끝에 모으고 걸어 나가는데 갑자기 우레소리가 들렸다. 와우~ 일행들은 저마다 두렵다는 듯 비명을 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암벽에 되울려 퍼지는 뇌성은 음향효과 한번 끝내줬다. 게다가 잠시 후 노란 옷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구급환자를 실은 구조대 보트가 강을 따라 급하게 내려왔다. 그래도 계곡을 거슬러 전진하던 우리였으나 곧 발을 되돌리게 한 것은, 넋이 빠진 듯 물가 바위에 기대듯 누워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아가씨를 본 이후였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심상찮은 표정도 그러하지만 탈진해 망연자실에 빠진 그녀 얼굴을 보자 전의를 완전 상실하고 말았다.  


퇴각을 결정하고 물길을 빠져나와 길가 반석을 찾아 자리를 펴고 점심부터 먹었다. 어둑신하던 하늘에 반짝 해가 났다. 그냥 포기해 버리기엔 아쉬움이 짙었다. 가벼워진 배낭을 메면서 의기투합, 재도전에 나섰다. 한 시간 넘게 물길을 걸으며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농도 하면서 얕고 깊은 여울을 계속 걸어 나갔다. 구절양장이 따로 없었다. 한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비경, 비경의 연속이었다. 신이 나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는데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한다. 기상예보는 강수확률 20%, 세수수건만 하게 길줌하니 올려다보이는 하늘은 잿빛이었고 요상한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일며 비를 흩뿌렸다. 천둥번개마저 우르릉 쾅 번쩍~골짜기를 강타했다.


어느새 비는 굵고 거센 소나기로 바뀌었다. 사고는 바로 이런 경우 발생한다. 협곡에 불어나는 물은 감당키 어려울 거고 급한 마음에 우왕좌왕하다 다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무척 춥다. 옷이 젖어서인지 저체온증으로 양손이 마비되는 듯해 겨드랑에 끼고 녹여보는데 설상가상 입술이 새파래진 조카네 막내가 떠는 걸 보니 더 위기감을 느끼겠다. 달리 방법이 없다. 무조건 이 상황에서 속히 벗어나는 길 외엔.

황톳물 수위는 점차 높아졌다. 무릎까지 빠지는 물길이라 몸이 휘청거린다. 긴장 늦추지 않은 채 부지런히 걸음 옮기다 보니 물 깊이가 얕아졌다. 거진 다 와간다고 서로 격려하며 걷고 또 걸었다. 진짜 입구가 저만치 보인다. 살았다.

 
언니와 형부 조카는 물길에 엎어지고 미끄러지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히 협곡을 빠져나왔다. 뭐가 못마땅한지 하늘은 여전히 으르렁거리고 먹장구름이 바삐 달아나며 가끔씩 비를 퍼부어댄다. 안전한 길에 올라온 이상 까짓~ 겁날 거 없다. 유유히 셔틀에 올라 뒤로 멀어지는 내로우 협곡을 내다본다. 도로 옆으로는 버진리버가 하얗게 물거품을 내며 흐른다. 뒤돌아보니 저곳이 바로, 영락없는 인생 여정의 축소판이구나 싶어 진다. 저마다 한세월 굽이돌다 보면 가파른 비탈길 넘어지면서 걷기도 했고 험한 오르막 편안한 내리막길에도 서게 된다. 사노라면 이런 날 저런 날 만나게 되며 따라서 희로애락 오욕칠정 속에 생로병사를 겪으며 살아내야 하는 인간사라 절로 깊어지는 연민. 누군들 매일 잔잔하니 맑기만 하고 평화롭기만 한 날들이었을까. 풍파 몰아치는 날도 있는가 하면 온화한 햇살에 싸 안길 적도 있었으리. 더러는 평지도 걷지만 뫼도 넘고 강도 건너고 가시덤불진 황야도 지나고 거친 돌팍 자갈밭도 걷게 되는 인생길. 삶이란 원하든 아니든 햇빛과 그늘이란 음양의 무늬를 새겨 넣으며 직조물을 짜는 일,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으나 환희의 눈부신 꽃길을 지날 때도 있다.


삶은 그런 거다. 그 와중에도 여행과 변화를 꿈꾸는 사람은 생명이 제대로 살아있는 사람이란다. 바그너의 말이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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