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Apr 05. 2024

마중물 되어


유년기 우리 집 마당 한켠 감나무 아래엔 시원한 우물이 있었다. 바닥이 세숫대야만 하게 보이던 깊은 우물은 언젠가부터 펌프로 바뀌었다. 일일이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수고를 덜어주는 펌프는 편리한 대신, 반드시 처음에 마중물을 부어줘야 했다. 한 바가지 정도의 마중물을 부어서 펌프질을 해야만 땅속 저 아래 물길이 마중물을 따라서 올라왔다. 자석이 물체를 끌어당기듯이 마중물은 땅속 깊은 곳에 있는 물을 마중 나가 불러올리는 힘이 있었다. 그처럼 글에도 마중물 역할을 하는 마중 글들이 있다.


새로운 쓸거리를 마련하게 해주는 글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마중물은 도처에 깔려있다. 마음 깊은 곳에 고인 것들을 흔들어 깨워 기지개 켜게 하는 마중물이 되어주는 것들. 시인의 눈에 비치면 아무리 하찮고 예사로운 것이라도 의미가 부여된다던가. 마찬가지로 밭일을 하다 풀꽃 하나 핀 걸 보고, 책을 읽는다거나 영화를 보다가도 무언가가 잡힌다. 여행을 가거나 거리를 걷다가, 아침뉴스를 훑다가도 한 건 걸린다. 다른 불로거의 포스팅을 보고서도, 누군가의 댓글 한 문구에서도 퍼뜩 머리를 스치는 참신한 소재를 접하게 된다.


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김영란 대법관을 만나 진짜 잘난 분이다 싶어 절로 글이 엮어졌다. 어느 분의  포스팅 중 자연살상세포에 대한 글을 보고 연달아 쓴 글이 죽음의 키스였다. 국제시장 포스팅을 보자마자 절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따라 나왔다. 방문객의 댓글에서 마중물이란 단어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이 제목으로 글을 써야지 했었다. 기회는 아주 쉽게 찾아왔다. 학교에서 내준 미국 역사 숙제를 하는 도중이었다. 대공황을 이겨내게 한 뉴딜정책에서 뜻밖에도 마중물 효과를 만났다. 순우리말이라 정겨웠던 마중물이란 단어를 여기서 다시 접하다니...   



1930년대 미국에 대공황이 발생하게 되자 1933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을 시행한다. 국가 산업부흥법 등으로 과감한 공공투자를 진행하여 불황을 극복하고 종당엔 경기 활성화를 이루어낸다. 마중물 효과의 대표적 사례다. 2007년에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subprime mortgage) 사태로 금융위기가 닥치자 제로금리와 양적완화정책 등과 같은 통화정책을 시행해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이때 버냉키가 추구했던 것이 마중물 효과전략(pump effect strategy)이다. 선진국이 개도국에 기술이나 자금 지원을 해주며 돕는 것으로 개도국의 산업을 부흥시켜 나가는 경우도 마중물 효과의 일례다.


사막의 펌프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불볕더위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막 여행자의 수통은 이미 바닥이 났다. 그는 혀가 석고처럼 메말라들 정도로 몹시 목이 마른 상태다. 사막 중간쯤에서 그는 물 펌프를 발견한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펌프의 손잡이에 쪽지가 매달려 있다. “이 펌프 옆의 바위 밑에는 물이 가득 담긴 병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그 병의 물을 펌프에 붓고 펌프질을 하십시오. 당신은 갈증 해소는 물론 씻을 수 있는 물도 충분하게 얻게 될 것입니다. 물을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 병에 물을 가득 채워 처음처럼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오."


이때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쪽지 내용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엔 무조건적인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 과연 이 펌프를 믿을 수 있을까? 펌프가 정말 작동할까? 만일 물을 다 부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머릿속을 스치는 이런 의심들로 그냥 병의 물을 마셔버리고 만다면, 또는 앞사람이 마중물을 준비해 두지 않고 가버렸다면 뒤에 온 사람은 그 사막에서 목마름으로 인해 쓰러지고 말지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데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고, 한 통의 물과 펌프가 있을 때 어떠한 결정을 할는지? 성급히 물을 마셔서 당장의 갈증만 해소할 것인가?  아니면 펌프에 부어 넣고 열심히 펌프질해 갈증을 해소하고 얼굴도 씻은 다음 다른 사람을 위해 물을 담아둘 것인가?


누군가 헤어날 수 없는 늪에서 허우적대느라 기진맥진 상태다. 누군가 하는 일마다 벽에 부딪혀 의기소침 기운이 빠져있다. 이때 마중물 같은 자극 또는 에너지를 주어 그의 미래를 희망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면. 그런 성원의, 격려의, 배려의, 믿음의, 사랑을 보내는 마중물이 그대와 나 기꺼이 되어줄 수 있다면. 2015

작가의 이전글 홍신자, 여전히 도전 멈추지 않아 젊은 그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