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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Dec 21. 2024

동짓날 단상

작은 아버지는 우리 자매를 유난히 귀애하셨다. 국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좋아한 작은 아버지는 면모도 성품도 자애로웠다. 아주 어릴 적, 내 손을 잡고 점방에 간 작은 아버지는 먹고 싶은 걸 고르라 하셨다. 저고리 옷고름만 돌돌 말고 서있는 나 대신 작은아버지는 주섬주섬 과자를 골랐다. 밀가루 부대 종이로 만든 누런 봉지 안에는 센베이 요깡 미루꾸 껌 왕사탕이 들어있었다. 그때 첨으로 요깡을 먹어봤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질감의 그 독특한 것은 사르르 녹으며 연한 단맛으로 입안을 행복하게 해 줬다. 팥으로 만들었다는 건 먼 훗날 알았고, 듬성듬성 밤 알갱이가 씹히는 요깡을 그때부터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이민 떠난 지 여섯 해 만에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던 날. 공항에서 아들은 눈가가 붉어졌다. 원래도 수척했지만 바싹 마른 엄마가 속상해서였으리라. 집에 와보니 내 방 머리맡에 요깡과 웨하스가 한 보따리 놓여있었다. 말 안 해도 알 만했다. 평소 내가 즐기는 군것질거리였기 때문이다. 용케도 기호를 잊지 않았구나 싶어 찌르르 해졌다. 엊그제, 아들이 선물 포장지에 싸인 양갱 케이스를 소포로 보내왔다. 열어보니 다식판에 찍어낸 흑임자다식 송화다식처럼 똑 고른 요깡이 얌전스레 들어있었다. 



요깡이라 하니까 젊은이들은 양갱을 왜 자꾸 요깡이라 하나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자면 양갱羊羹은 양의 피로 만든 중국 제사 음식에서 유래한 말이다. 짱깨보다는 토착 왜구로 몰릴지라도 차라리 추억 오롯한 이름이 낫다. 요깡은 중국으로부터 만드는 법이 일본에 전해져 단맛을 첨가해 과자로 정착되었다고. 팥 소에 우뭇가사리인 한천(寒天)과 설탕을 녹여 잘 개어 가며 굳힌 연성 간식으로 수분이 적어 저장하기도 좋다. 마카롱 같은 서양 디저트를 대신할 수 있는 양갱으로 주목받으며 귀하신 몸으로 한창 떠오르는 중이란다. 특히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나 노인층이 선호하는 요깡이다. 요샌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정도라 레시피도 흔하다.



오늘은 작은설이라 불리는 동짓날이니 자연스럽게 팥죽이 따라붙는다. 올 동지는 음력으로 동짓달 하순에 든 동지라 팥죽을 먹는다. 동짓달 초순에 든 동짓날은 팥죽 대신 팥 시루떡을 먹는 날이다. 아무튼 팥을 먹는 날, 그래서 요깡 두 개와 녹차로 아침을 대신했다. 그러나 팥요깡만으론 아무래도 미진해 점심 삼아 팥죽을 사 왔다. 검색을 해보니 올레시장 내려가면 맛집으로 소문난 덕이 죽집이 있었다. 겉옷 하나 덧걸치고 쪼르르 내려가 총총 이어진 골목 상가에서 죽집을 찾아냈다. 평소 자주 가는 야채가게 바로 맞은편이건만 그간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던 곳이다. 죽을 즐기지 않다 보니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긴 줄 덕에 쉽게 찾았다. 동짓날이라 식당은 운영하지 않고 팥죽만 판매했다. 한 대접 사다가 향기로운 야국 앞에서 먹었다.



동지는 북반구에서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아, 한해 중 밤의 길이가 제일 긴 날이다. 밤이 길어 음의 기운이 가득해서 원혼이 활동하기 좋은 날이라 여겼던 동지. 그 때문에 붉은 기운을 띤 팥으로 죽이나 떡을 해서 잡귀를 쫓아버리자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팥으로 만든 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라 기원과 소망이 담긴 별식이었다. 엄마 젊었던 때는 동짓날 아침 집안 곳곳에 팥죽을 흩뿌렸다. 이처럼 액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며 가족의 건강과 집안의 안녕을 염원했던 곡물인 팥이다.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다시 낮이 길어지기 때문에 말하자면 해가 소생하는 날이 동지다. 태양이 부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 '작은설'이라 불리는 동지. 선대들은 동지가 지나면 한 살 더 먹는다 하였기에 팥죽 속에 든 찹쌀 새알심을 나이 수대로 먹기도 했다.  


요샌 이런 거 굳이 따지고 가려서 먹는 세월도 아니며, 요즘 사람들 이에 구애받을 리도 만무다. 여하튼 생애 최고로 무더웠올해는 또한 시국 뒤숭숭하니 끝까지 어려운 한 해로 백성들 꽤나 심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동의보감에 `적소두(赤小豆·붉은팥)를 달여서 죽을 쑤어 먹으면 심규(心竅 심장 작용)를 열어 마음속 답답함을 풀어준다`고 하였다. 국민들 깝깝한 속을 풀고자 한다면 올해는 부디 동지 팥죽이라도 찾을 일이다. 저물녘쯤 시장에 내려가 푸짐하게 김 오르는 떡집에 들러 액땜하게 시루떡도 사 오려한다. 기왕이면 두툼한 팥고물 얹힌 호박고지 시루떡이나 무시루떡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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