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r 08. 2024

왈종미술관, 창작력의 마중물 되어 준 서귀포

이왈종 화백 인터뷰

봄이다. 온 누리에 용솟음치는, 뜨거운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봄이다. 스프링!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게 하는 활기찬 봄이다. 나목마다 눈엽 움트게 하고 들풀 새순마다 발돋움 힘껏 하는 계절. 물오르는 수목만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두 생기롭게 깨어나는 신춘이다. 유채꽃 수선화 매화까지 탐라 골골에 피어나 향기로이 스며들고 있다. 이 눈부시도록 화사한 계절과 가장 잘 매치되는 예술인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레 연결되는 곳이 있다. 왈종미술관이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운 시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고 최대한 농축시킨 시다. 시 중에도 순하고 고운 언어로만 빚은 동시 같다. 가슴으로 와닿는 진솔함이 그러하다. 따라서 엄숙하지 않고 천진난만하다. 능청맞을 정도로 천연덕스러운가 하면 정감 따스히 넘쳐나는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표정 환해지게 마련이다. 절로 잔잔한 미소 그득 어리게 마련이다. 화폭마다 밝은 기운, 긍정 에너지가 샘솟는다. 다사로운 동심 품은 순수 무구한 세계가 살갑게 어우러져, 밝고 따스한 서정이 녹아들어서이다. 연연한 분홍, 산뜻한 노랑, 신선한 하늘빛 바탕에 펼쳐진 풍경은 더없이 여유롭고 화평스럽다.  


느낌이 밝고 경쾌하다 하여 가벼운 건 결코 아니다. 자유로운 화면구성과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감 역시 그만의 고유 트레이드 마크. 재료나 기법에 있어서도 아크릴을 사용한다든지 부조 기법 등을 차용한다. 동서양 재료를 망라하여 작품 제작에 적재적소 활용할 뿐 아니라 장르 넘나들며 조각, 도자기 등 입체까지 다룬다. 평면 회화에서 한지 채색 부조, 목조와 판각, 도자기와 향로, 테라코타, 설치 미술, 최근에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미디어 아트도 선보이고 있다.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노력파다.



한국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 화가로 평가받는 이 화백. 대한민국 미술계를 주도하는 블루칩 작가라는 그. 마니아층 역시 두텁다. 그의 작품은   현대판 민화이자 풍속화에 가깝다. 전통 동양화가 추구하던 이상화된 풍경 묘사에서 벗어나 그는 전공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다. 그는 고인 물이기를 거부한다. 물이 고여  정체되면 썩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찾아 새롭게 변신해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 여전히 그가 남다른 매력을 지닌 작가로 사랑받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까닭인지 컬렉터들이 가장 많이 찾는 화가로 새 그림이 나오기 바쁘다.   



그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살고자 하며 안주하면 가뭇없이 잊히고, 방심하면 마침내 죽게 된다는 이치를 믿는다. 나이 들수록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부 예술가들과 달리 변신을 위한 창의의 칼 예리하게 벼리는 그. 항상 새로워지려는 자세 잊지 않기에 그는 늘 젊은 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예술에 임하는 자세 또한 치열하다 못해 죽을힘을 다하기에 작품마다 영혼의 마지막 진액까지 전부다 쏟아붓는 그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며 맹렬히 정진하는 구도자의 자세에 다름 아니다. 오로지 일심으로 부단히 정진해야 얻어지는 몫, 그 무엇도 쉽게 이루어지는 건 세상에 없다. 간절함으로 절박함으로 결연하게 그렇게.



한국화와 서양화와 조각을 아우르고 노장사상을 넘어 중도에 와닿은, 거칠 것 없는 자재로움은 천의무봉 그 자체다. 원효대사의 무애행이 도를 향한 길 중 하나이듯, 그는 무엇에도 얽매임 없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근거지 주변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나아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 뿐 아니라 꽃과 물고기가, 자동차와 사람이, 한 화면 속에 노니는가 하면 사물의 크기 따위 의식치 않는다. 경계를 초월하는 파격의 미랄까. 모든 구속감에서 벗어나 존재의 자유로움을 형상화시키는 것이 중도(中道)의 개념이라고 파악한 그. 사십 대 즈음 홀로 서귀포에 와서 숱한 날 놓치지 않아 습관이 된 명상과 요가 덕일까.  그렇게 터득한 중도관에서 비롯된 예술세계라서 그러하리라. 치우치지 않고 분별치 않으며, 대립은 물론 높낮이나 크고 작음 구분치 않는다. 삼라만상은 평등한 불이(不二) 사상을 토대로 존재하는 것.  고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하여 누구라도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거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 대입은 지양해야.   


경기도 화성에서 1945년에 태어나 미군정 시대와 6.25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병약한 소년이었다. 그 시대 이 땅의 백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개가  궁핍 속에서 곤고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운크라에서 지원해 주는 유엔 구호물자로 연명하다시피 하는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다. 구호품 우유가루를 받아본 그라서 일까. 유니세프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초심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시대 상황은 그러함에도, 지체 있는 집안 자제라 서예를 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먹을 갈아 드리며 자연스레 글과 서예를 배우게 됐다. 먹과 종이가 있는 환경이 일상화된 터라 소년은 어느새 어떤 형체든 그려내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돌연변이가 아닌, 당시 벌써 국전 나들이를 할 정도의 문화적 환경이었던 집안 분위기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리라. 어릴 적 환경이 평생을 지배하며 영향을 미친다는 건 뇌과학자가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71년 이미 국전에 입선하고 74년에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은 그였다. 국전에 작품을 낼 때였다. 하나는 본명인 李禹鍾으로, 또 하나는 이왈종으로 작품을 접수시켰다. 이때의 입상작은 그가 본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아닌 이왈종이란 이름으로 낸 작품이었다. 그런 면에선  이력이 있기도 한 그다. 65년 대한적십자사가 주최한 국제친선미술대회에서 <추색>으로 고등부 1등 상을 받은 학생은 서라벌 고교 3학년 이왈종이었으니까. 76년부터 국전을 공개심사하기로 하자 “심사 공개를 시발점으로 문화계의 모든 부조리가 뿌리째 뽑히기를 바란다"라는 발언으로 기존의 화단에 대한 비판 서슴지 않았던 그.  이후 한동안 타의에 의해 화단과는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됐으나 개인전으로 꾸준히 세상과 소통했다.  그 결과 미술기자상(1985), 한국미술작가상(1991)을, 제5회 월전미술상(2000년)을 받은 건 50대 중반이었다. 화집과 저서만도 열두 권 펴냈다.


일찍이 정상부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나 사람에 치이고 부대끼는 일만큼 성가시고 피곤한 게 또 있을까. 1989년 그는 대학의 안식년을 기화로 제주에 내려왔다. 사철 꽃이 피는 매혹적인 서귀포의 자연은 용천수 솟구치듯 강하게 그의 혼을 뒤흔들었다. 서정적인 감성이 삶을 관조하는 철학적 사유에  녹아들어 <제주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라는 단일 주제로   한결같이 그림을 발표해 온 그.  서귀포는 그렇게 창작력의 마중물이 돼주었으며 더불어 마음의 평화까지 선사했다. 아름다운 풍광이 그의 예술적 영감을 최대한 확장시킴으로 화폭을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 되었음은 자명하다. 불가해할 정도로 다작이 가능했던 왕성한 에너지 역시  이 땅이라서 가능했으리라.



스스로를 고립시켜 오롯이 그림에만 집중하며 고독 속의 정신적 자유를 만끽하던 그때, 여기서 진정한 낙원을 발견했던가. 살고 싶은 곳으로 천국과 서귀포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 하면 주저 없이 서귀포를 택하겠다는 이 화백. 그는 작품을 통해 제주의 정취가 배어든 일상을 오롯이 화폭에 담아냈다. 제주로 거처를 옮겨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서귀포 시민상, 교육공로상, 한국미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어언 34년 차로 접어드는 제주 생활이니 인정 여부 차치하고  그는 명실상부한 제주 화가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예술인들이   한때의 유행 기류처럼 제주로 내려와 터 잡는 경우가 잦아졌다. 삶의 뿌리를 튼실하게 내리고 온전히 정착하기보다는 방전된 예술혼의 충전을 위해 몇 해 머물다 떠나는 예가 워낙 흔해서인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도, 신뢰하지도 못한다. 그 병폐가 저으기 안타깝다.


저지난해, 서귀포로 거처를 옮긴 다음 필자는 가까운 앞섶부터 차근차근 섭렵해 나갔다. 11월 첫날 이사 와서 열흘 남짓이 지난, 12일에 작성한 포스팅 제목은 <새와 물고기 노니는 왈종 미술관>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위치에 키 늘씬한 야자수와 종려수, 게다가 늙은 올리브나무와 로즈메리 같은 허브 때문일까. 정원에 들자마자 든 첫인상은, 프랑스 풍 혹은 스페인 같은 먼 나라 내음이 물씬 풍겨났다', 고 첫머리에 썼다.  이어서 '전시 공간으로 들어갔다. '현실과 환상을 자재로이 넘나드는 밝은 화면. 물고기가 너울너울 날아다니고 연꽃은 인물보다 월등 크다. 매화꽃 성글게 핀 가지 사이로 배와 자동차가 걸림 없이 넘나든다. 무구한 동자승의 풀꽃 같은 미소가 담겨있는 반면 한쪽에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 코너도 있다',고도 썼다. '삼층 옥상 꼭대기에 정좌, 남해 향한 관음상이 아니라도 곳곳에서 읽혀지는 반야심경. 마침내 화가는 그 묘법 증득하였던가', 좀 아는 체도 했다. 그 당시야 왈종미술관 주인공을 인터뷰하리란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허나 이미 그때  미묘한 연기법(緣起法)의 씨앗이 내재돼 있었던지도.



그는 화단에서도 외부인 안 만나기로 소문이 났다. 사람들과 번다히 교류하기 보다 홀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그. 지난해 봄호부터 필자는 서귀포 시청 소식지에 서귀포 거주 문화예술인 탐방 기사를 쓰게 됐다. 왈종미술관 전시실에서 화사한 화풍을 본 터라 봄호에 적격일 것 같아 전화로 용건을 밝혔다. 미술관장이 말하길, 화백께서는 와병으로 서울에 체류 중이라 했다. 여름이 되어 다시 연락을 취했다. 회복기라서 조섭 중이므로 어렵다고 했다. 삼세번이다. 올 연초에 다시 통화를 했는데 이번엔 완곡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제갈량을 모시고자 예를 다한 유비의 삼고초려 고사성어도 있으렷다. 원래 왈칵하는 성격에 참을성 부족한 필자이나, 그 정도의 고집 혹은 오기도 없다면 애당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다시 한번 더 정중히 청을 넣었다. 다음날 미술관에서 전화가 왔다. 드디어 토요일 오후 약속 시간이 잡혔다.


성공이다. 와우! 내심 탄성을 터트렸다. 인터뷰하기 어렵다는 그라서 더 의미 깊었다. 신바람은 날씨 화창한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내 정원으로 삼은 서귀포 바닷가 거닐며 지상낙원이 예로구나~ 한껏 고조돼 있던 찰나였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이 전화를 했다. 상기된 기분 시시콜콜 솔직하게 나눌 대상으로 안성맞춤인 딸이다. 시차 상 퇴근길에 전화를 한 딸은 소식 듣고는 "신났네! 신났어! 살 판이 났어요!" 한다. 아침부터 한껏 들뜬 음성 눈치챈 딸내미는 그래도 컴다운하라는 말 대신 "건강할 때 엄마 충분히 맘껏 누려요. 기회 닿을 때 신명풀이 제대로 해보고!" 성원 보낸다. "맞다, 날이면 날마다 신명 펄펄 오르고 살판 살맛 다 최고치다. 이러다 복에 겨워 까무러치지 않겠나 수위 조절은 하며 지내노라." 딸에게 답했다. 진심이고 실제로 그러하다.



진작부터 중섭 거리를 비롯 왈종미술관 정원과 소라의 성 언저리 풍광에 홀려들었던 터. 첫눈에 대뜸 반해버려 내 뜨락으로 삼았다. 아름찬 풍광은 소유주가 누구건 그 순간을 즐기는 동안은 내 것이다. 그랜드 캐년이 그러하듯 한라산도, 제주섬도, 매인데 없는 자연에 취해 있노라면 그 모두가 바로 내 것인 것을.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바위 끝 물가에 실컷 노니노라/그 나믄 여나믄 일이야 부러울 줄 있으랴. 윤선도의 시조 <만흥>이다. 안빈낙도의 경지까지 갈 필요도 없다. 통장 잔고에 동그라미가 몇 개 붙어있는 게 뭔 대수랴. 내 명의로 된 땅 한 뙈기 없는들 어떠랴. 주식 문서 한쪽 지니지 못했어도 나는 대단한 부호요 억만장자다. 안분지족, 앞 창 가득 섶섬 문섬 바로 안기고 복도에 나가면 한라산 마주 보이니, 비록 '정와'일지라도 나에겐 별장이고 나날은 당연히 축제의 장일 밖에.


왜일까,  까칠한 이미지로 그려졌던 이 화백인데 만나보니 의외다. 푸근하고 편안하다. 무애행을 닦은 수도자에게서 풍기는 편안함이다. 작품은 곧 그 사람이라 했다. 한국의 대표 화가인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따뜻해지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자체가 한 편의 잘 익은 시를 음미하거나 음악을 듣듯이 분위기 무한 아늑하고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  삶의 기쁨 샘솟게 하는 활발한 움직임 보여주는 화면은 역동적이라 활기가 전이된다. 그 세계에는 어떤 그늘도 불행도 없다. 그림마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니까. 여기엔 근심이나 고뇌 따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셈. 지상 낙원인 서귀포, 정방폭포 기운찬 물소리 들릴듯한 곳에서 즐겁게 작업을 한다지만 100호 이상의 대형 회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장시간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정신노동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통해 뭇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정감을 안겨준다면 매진할 동기 충분하리라.



그가 진작부터 천착해온 ‘생생한 실경과 민속적인 주제’에 주목한 뉴욕과 독일 화단에서는 그를 추상작가로 소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내 그림은 추상이 아닌 구상이어서 누구나 보기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아늑하고 행복한 마음을 일반인들이 느낄 수만 있다면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했다. 힘껏 북채 두드리는 여인의 생동감을 전이 받아 세파에 시달려 쳐진 어깨 추스르는 힘을 얻게 된다면 그로 만족한다는 이 화백.  그렇다. 여전히 최고의 매력을 지닌 작가로 사랑받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 있겠다.  슬럼프 겪지 않고 작품 활동을 지속해온 비결은 아마도 사욕에 사로잡히지 않은 이타행에 있는 듯. 조선백자를 닮은 서귀포 그의 미술관에서 고독의 벽 더 두터이 쌓아 올리고 그 외로움이 발하는 향기 모쪼록 오래도록 나눠주기를. 섶섬을 남긴 화가 이중섭이 영원한 서귀포인 되었듯이 언젠가 그가 묻힐 왈종미술관 인근에 이왈종거리가 조성되는 날을 그려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며칠째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