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은 있으나 실천이 없고, 사랑은 있으나 애덕이 없고, 소명은 있으나 순명이 없고, 자비는 있으나 자선이 없는 돌 심장... 나치 수용소에서 자기 목숨을 이름 모를 이에게 선물한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이 스스로에게 한 말인데요. 부산시 기장군 삼덕 길 야산 자락에 자리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예수 마리아 성심수도원에서 그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꼰벤뚜알은 함께 모여사는 ‘공동’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했구요. 수도회 초기부터 ‘작은 형제회’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순명 안에, 소유 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회칙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애덕으로 실천해 나가는 삶이라지요.
한국으로 돌아온 첫해 겨울, 우연히 들른 곳이었습니다. 삼덕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천주교 부산교구 소속이 아닌 꼰벤뚜알 소속이며 인근 음성 한센병 가족들의 정신적 의지처인 공소에 가깝답니다. 본회는 한국 진출 초기부터 본당 사목과 나환자를 거두어 돌보는 일에 진력했는데요. 196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는 수도원 한켠에는 성탄 구유가 검소하게 차려져 있었구요. 밝은 주홍빛 바스러질듯한 단풍나무 곁 헛간에 매달려 말라가는 시래기에서 청빈을 서약한 수도자들의 소박한 일상이 보이더군요. 빈자의 성인인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 ‘가난’의 길로 그리스도를 뒤따랐지요. 복음서에 쓰인 글자 그대로를 실행하고자 그는 모든 소유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노동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했어요. 마찬가지로 수도회 수사님들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그들 삶의 지표로 받아들여 살아가고 있는데요. 시성 되어 성인품에 오른 콜베 신부님도 프란치스칸이셨지요.
작정하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우연히 하얀 건물에 솟은 십자가의 인도에 따라 수도원에 닿았습니다. 근자 들어 주변에 신도시가 개발되며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바로 옆이건만 완연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는 '험지'를 거쳐서요. 실은 길을 잘못 들어 얼떨결에 흉물스러운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섰던 거지요. 번영 한국에 이리 퇴락한 움막 군락지가 폐허인 채 남아있다는데 경악했는데요. 한센씨 주민들이 이웃의 작은 아파트로 이주한 지 근 이십 년이 되건만 구 거주지 철거가 안된 상태로 방치된 곳. 혐오감을 넘어 공포감이 드는 현장이 대단지 고가 아파트라는 광채의 뒷그늘로 자리했더라구요. 필시 우연만은 아니겠지요. 가뜩이나 겁 많은 사람인데 경끼 일으킬 정도로 험한 지역을 만나게 한 까닭은요. 천차만별 세상사의 적나라한 이면을 통해 편벽된 관점의 폭을 넓히라는 뜻이었을까요.
사람됨이 지나치게 무양무양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스페인에서 카미노길을 걸으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일기 시작했고 점차 그 격랑은 파고 드높아졌습니다. 더 솔직하게는 갈등에 빠져 그 후 한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았는데요. 자꾸 분심이 들이차 열심으로 매달렸던 묵주기도도 슬그머니 손 놓았구요. 그럭저럭 몇 달째 교회에 발을 끊은 냉담자가 됐던 겁니다. 크게 부각된 티끌인 '겉면의 사치'에 걸려 넘어져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부족한 자'로 인정하는 겸손은 뒤로 한 채였지요. 그래저래, 성탄 무렵 판공성사도 걸렀습니다. 슬며시 꼬여버린 신앙생활을 원래대로 풀어주고 싶었지만요. 성사를 통해 교만에 빠진 죄인임을 고백하고 무한사랑이신 하느님께 잘못을 용서받아 걸림 없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싶었지만요.
정확히 절 넘어뜨린 걸림돌은 아이러니하게도 카미노 순례길 풍경들이었습니다. 순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일부 여행자의 일탈이나 낙서 행태는 차라리 순진스러웠구요. 중세 후기의 교회는 비대해진 신권의 전횡으로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빠르게 세속화되었지요. 그러면서 심각한 부패현상에 이르게 됐다는 건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인데요. 오직 믿음을 통해 받을 뿐인 구원의 은혜를 오도하는 각종 비행이 쌓여가며 교회 질서는 극도로 문란해졌지요. 권위적으로 치솟은 교회 건물은 그 위용만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순박한 민초들 압도되어 머리 조아렸구요. 천국 모습을 재현한다며 웅장화려하게 꾸민 외관에다 최고의 장인들이 황금으로 치장시킨 분위기에 절로 주눅 들어 숨죽였겠지요. 중세 교회의 타락이 극에 이르러 '때가 차매' 초기 교회가 지켜온 전통을 회복하자는 운동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입니다.
그러한 기존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대입되는 현장이 바로 스페인이더군요. 두어 가구뿐인 마을에 생뚱맞을 정도로 규모 큰 성전이며 메마른 산자락에 집 몇 채 거느린 중앙광장의 엄청난 성전.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 건물이거나 성루처럼 육중한 로마네스크 건축물들이었지요. 더러 소박한 건물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동네엔 보통 교회가 두서넛 더 있었어요. 스페인 전역엔 수많은 문화유산이 널려있었는데 대부분이 중세 가톨릭 유적들이더군요. 첨단 기술력에다 장비가 출중한 현대에도 건축현장 사고가 잦거늘 고층 구조물을 짓기에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던 당시. 졸지에 목숨 잃는 피해자가 오죽 숱했을까요. 물론 성전 벽돌 쌓거나 바위 쪼면서 환희심에 벅찰 수도 있겠지요. 허나 그밖엔 전쟁포로나 농노가 다량 투입되었을 테고 그들은 살기 위해 일하다가 맥없이 죽어갔을 겁니다. 수시로 드는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하느님 뜻은 이건 아니지'라며 고개 흔들기 일쑤였어요. 거기다 '정구사'의 행태는 저를 냉담자로 만드는데 일조했지요.
그렇게 교회로부터 멀어졌던 저를 불러들인 질박한 하얀 십자가의 집. 천사 모형의 성수반에서 성수 찍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우매한 제 죄를 씻어주시고 정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도와주소서, 기도가 소리 되어 흘러나왔지요. 성당 안에는 수수한 제대에 나무 십자가 상의 주님 홀로 그윽이 대림초를 내려다보시더군요. 침묵 피정 때처럼 한동안 맑은 고요가 주위를 감싸더니 은은한 빛줄기 같은 음성이 문득 들렸습니다 "오래 방황했구나, 잘 왔다. 이제 너에게도 평화를 주노라." 뭉클, 뜨거운 것이 북받쳤습니다. 때마침 고해소로 신부님이 들어오셨는데 의외로 노령의 외국 분이셨어요. 이탈리아에서 사제품을 받고 1969년 한국으로 파견, 금경축을 지낸 지금도 사목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안토니오 신부님께 성사를 봤지요. 좀 전에 빛줄기가 들려준 음성과 비슷한 내용의 사죄경과 함께 기쁜 성탄 맞으라는 축복의 안수도 해주시더군요. 무지근하던 짐 부려놓은 듯 홀가분해져서 감사 기도 드리며 내려오는 길. 늙은 감나무 꼭대기 빛 고운 까치밥 몇 개가 그제사 보였습니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