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일요일 새벽. 베이커즈필드에 갈 일이 있어 이른 시각에 출발, 생 클레멘테 성당(Korean Catholic Community of San Clemente Mission Parish)의 여덟 시 미사에 참례했다. 첫 미사는 한국어로 진행되었다. 오랜만에 한국 미사에 임하니 전례 의식 하나하나가 더더욱 명료하게 다가왔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처럼 뜨거운 것이 목울대로 올라왔다. 한편으론 유년의 벗을 만난 듯 살갑기도 했다. 모처럼 우리말로 부르는 성가는 감동이었다. 미사에 참례하는 한 시간 내내 그야말로 감. 개. 무. 량. 그 자체였다.
특히나 신부님 강론은, 젖이 모자란 아기에게 떠먹여 주는 부드러운 암죽과도 같고 달콤한 솜사탕과도 같았다. 말씀 마디마디가 스르르 녹아 온전히 스며들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우리말이지만 사실 실천이 쉽지 않은 주제였다.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말씀은 스쳐 지나는 한갓 바람일 뿐. 예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처럼, 제대베오의 아들들처럼,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않고 선뜻 모든 걸 버리고 돌아설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부른 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임에도 우리는 과연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았던가.
베이커즈필드에 한국인이 얼마나 사는지 모르나 도시 규모에 비해 교우 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인 것은 아마도 내가 한인성당이 없는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흔히 접하는 혜택에 대해서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 물, 공기, 태양은 당연히 늘 곁에 있어 익숙하기에 참가치와 소중함을 모른다.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쏟아지는 물, 그 물이 없으면 5일, 눈에 보이진 않으나 공기가 없다면 5분 이상, 생명은 견뎌내지를 못한다. 무한정의 빛과 열 에너지원인 태양광선이 미치지 못한다면 이 지구는 얼음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교민사회 어디서나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 모양이다. 미국에 와서 뿌리내리고 사니 현지화되어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도 맞다. 바야흐로 국제화시대 아닌가. 한창 일할 때라면 비록 현실이 두려워 피하고 싶도록 겁이 나도 정면돌파를 불사해야 한다. 고단한 일주 간의 하루만이라도 신앙 안에서 영혼 푸근히 쉬고 싶다는 생각 그럴수록, 간절해진다. 그럼에도 차라리 모르는 대중 속에 섞일 때 편안한 반면, 의외로 안면 빤한 한인들 사이에서 괜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면? 공동체 안에 더러는 성에 안 차는 사람, 눈에 거슬리는 사람, 상처를 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용서란 단어가 추상적 단어로 머물지 않게 하려면 자기 마음속 교만부터 덜어낼 일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내 허물, 내
부족을 알고 남의 장점을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어떤 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각자 대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로 극명하게 갈린다. 2천 년 전에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따르는 무리와 막무가내 배척하는 무리는 반반이었다. 그처럼 모두가 좋은 이웃되어 따뜻이 하나 되는 사랑의 공동체 만들기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저마다 서로 역지사지의 자세로 뒷담화 대신 칭찬을, 불평 대신 감사를, 미움 대신 관용을, 배척 대신 이해를 먼저 생각하는 신앙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힘들 때 격려와 위로받을 수 있는 한인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왜 굳이 한인공동체를 만들었겠는가. 한국말에 고픈 한인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만나, 같은 언어로 동질의 정서를 나누며 서로 돕는 가운데 따스한 정 주고받자는 취지였을 터다. 미국인 교우들과의 친교 자리엔 커피와 도넛이 따라 나온다. 겉절이나 푹 삭은 배추김치를 냄새 개의치 않고 나눌 수 있는 건 한인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나 가능하다. 물론 세상사 어느 면에나 일장일단은 있게 마련이다. 영어가 자재로워 한국어 미사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경우라도 결국은 수구초심이 된다. 타국생활에 지쳐 심신 곤고할수록 기대고 싶은 모국어요, 나이 들면 들수록 점점 더 고향 쪽으로 기우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뉴저지에서 캘리로 거주지를 옮긴 후 그럭저럭 벌써 몇 년째 미국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영어 소통이 원활하다면 또 모르는데 영어는 거의 먹통이니 갑갑할 적이 수없이 많았다. 나이 오십 넘어 이민을 와 이미 굳어진 발음이라, 딴에는 혀를 굴려보나 문제는 미국인이 내 영어 발음을 도무지 못 알아먹는다는 점. 듣기 실력도 영 시원찮다. 다행히 세계공통인 전례 의식이라 따라 하는 시늉은 하나 신부님 강론도 반은 건성이다. 나름 귀 기울여 보았자 한국어처럼 머리에 저절로 스며들어와 파악되는 게 아니라 단어를 해석하고 뜻을 이해하려면 정작 중요한 말씀의 본질은 놓치기 일쑤다. 아직도 로사리오 기도를 드릴 때 한글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 영어로는 도무지 매끄럽지가 않다.
전에 살던 곳은 동부 뉴저지 체리힐이었다. 2001년 봄 이민 오자마자 찾아간 한인성당은 교우가 백 수십 명이 넘었다. 인근 필라델피아를 생활터로 하는 전문직 한인들이 많아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인 곳이라 체리힐 한인성당 구성원들은 저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만치 자기주장이 강해 교회 내 갈등과 소요가 끊일새 없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죽하면 신부님들이 부임을 꺼리는 미주지역 골 아픈 사목지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니. 목사 내치는 이웃 신교 흉내라도 내듯 걸핏하면 분규 일으켜 신부님을 성토하고 축출하기까지 해 이미 악명이 나 있었다. 자신을 정화시켜 겸손의 덕을 쌓아가려는 신앙인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인 곳이었다.
한인성당 신부님 중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기도하는 신부님, 성경공부나 교리교육 시키는 분도 있는 반면 골프로 소일하는 경우도 있어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한다. 이는 사실 전적으로 신자들 하기 나름, 기도하는 신부님을 만드는 것도, 골프중독자로 만드는 것도, 다 본당 신자들에 달렸다고 본다. 또 하나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만 있는 종신부제직이 문제의 진앙지가 되기도 했다. 확실한 영어권이자 지역사회에 공고히 뿌리내린 현지인 부제, 반면 한국에서 갓 부임한 사제는 언어도 미숙하고 현지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 갭을 일부 세력이 교묘히 이용해 교회 내 분란을 일으키는 예를 실제로 접하기도 했다.
대구교구 신부님이 눈물을 뿌리고 떠난 뒤 오래 공석이던 자리를 서울교구 신부님이 발령받아 오셨을 때 일이다. 젊은 신부님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오른팔을 올릴 수 없어 거양성체를 제대로 못 하는 기가 막힌 경우도 목도했다. 한번 잘못 들인 공동체의 버릇(악습)은 고쳐지긴커녕 숫법이 더 교활해져 교회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일 년여 표류하게 되었다. 당시의 사태는 장편소설로 쓰고도 남을 롱 스토리, 어쨌건 그 사건으로 체리힐 성당 식구 백이십여 명 중 78명이 삼덕의 하나인 순명을 거스른 채 교구가 다른 인근 미국성당으로 교적을 동시에 옮기고 말았다. 우리가 둥지를 튼 쟌다크성당은 그 후 한인공동체를 위해 뉴욕 가까이에 있는 부산교구 신부님을 초빙해 한 달에 한번 한인미사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매달 두 번째 일요일 오후 세 시의 한인미사, 은혜 넘치는 그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소중히 여겼던가.
그 후 뉴저지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왔다. 새 동네에 와서 미국성당에 나가며 판공성사조차 거르기도 하니, 한 번씩은 고해성사를 보고 싶어 갈급증이 일기도 하였다. 참회예절을 통해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요한복음 말씀이 회초리 되어 종아리를 칠 적마다 무릎 꿇은 채 양심성찰을 하고 통회한 다음 보속을 받고 싶었다.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잘못을 고하는 시간, 오래 그 시간을 갖지 못해 때 타고 먼지 덧쌓인 영혼. 그날 잠깐이라도 생 클레멘테 성당 신부님께 자재로운 한국말로, 갈피갈피 꼬불쳐 둔 죄성 들춰내 고해성사 볼 것을.... 벌써부터 판공성사받을 수 있는 부활시기가 몹시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