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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언덕 아래 누운 젊은이

by 무량화

오전, 장미 언덕에 다녀왔다.


LA 주변에 사는 교민들은 다들 아는 그곳, 아... 하며 말을 잇지 못하지만 아무튼 잘 알려진 장소다.


Rose Hill Memorial Park, 푸른 잔디밭 새새 아름찬 소나무가 서있는 거기엔 길게 이어진 하늘로 가는 길이 열려있다.


이승과의 모든 인연을 묻어버리고 자그마한 동판 아래 누워 영면에 든 그들은 어떨지 모르나 남은 자의 비애감은 어쩌란 말인지...


바람 어지러이 부는 로즈힐은 영원한 작별의 슬픔이 무색하도록 하늘 짙푸르렀고 장미 아닌 국화꽃 색색이 피어있었다.



그녀 아들의 느닷없는 소천 소식을 듣고 교우 모두는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망연자실해졌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기골장대한 헌헌장부가 두 눈 꾹 감고 양손 가슴에 모은 채로 저리 가만히 누워만 있다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자녀라고는 오직 하나, 마흔도 중반 들어 느지막이 둔 외아들을 창졸간에 잃고 만 스테파니아.


무너져 내린 억장으로 어깨 계속 떨고 서있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어깨를 껴안았더니 그녀는 무너지듯 안기면서 다시 오열을 터뜨렸다.


비탄에 빠진 채 먼 허공만 바라보던 부친은 넋이 나간 듯 끊임없이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누구나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죽음이나, 이건 정말이지 너무 심하다 싶은 게 기막힐 따름이었다.



그의 모래시계는 순식간에 너무도 급하게 흘러내렸던가, 고작 서른여섯에 돌연사라니....


아직 미혼인 그는 현직 검사로 전도 양양한 젊은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쓰여있기는 하다.


늦은 저녁 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구토 증세를 보였으나 누구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을 정도로 평소 그는 건강체였다.


땀을 흘리며 흉통을 호소할 때까지도 심각하게 여기질 않았으나 갑자기 의식을 잃자 구급차를 불렀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쓰러지고 5분이 지나면 이미 뇌사상태에 이르고 만다는 심장마비(heart attack)였다.



천수를 누리고 가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죽음인데 아직 젊어 창창한 나이에 돌연사로 삶의 끝을 맞은 그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래서인지 장례미사 참석자는 한인 교우 외에 백인들이 예상 밖으로 많았고, 특히 또래의 젊은 동료들이 다수 참석했다.


미사 집전 중에 예서제서 흐느낌이 들려왔으며, 조사를 읽는 친구는 혈기방장한 한창 청년이건만 제대에 오르면서부터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자꾸 문질렀다.


문화가 다른 미국인들은 대체로 죽음 앞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 감정도 우리와 마찬가지.


장지까지 거의가 동행해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애통지사를 당한 부모를 싸안으며 위로했다.


하관 후 흙을 뿌리던 모친은 스르르 주저앉으면서 하소 하듯이 "이런 법이 어딨어, 이런 법이....."


억장이 무너지는 참척의 고통을 당한 어머니, 애끓는 통곡 대신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땅에 누웠어도 부모들 가슴에 묻힌 앨버트, 노쇠한 부모들 이 모진 고통 어찌 감내하라고 그리 훌훌 떠날 수가 있는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오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壽)을 으뜸으로 치며, 오복의 마지막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考終命)이다.


그러나 장수는 그만두고라도 이 경우 짧아도 너무 짧아 모두들 탄식하며 애석해 마지않는 터였다.


봄에 싹이 터, 여름 내내 자라고, 가을 되면 열매 맺으며, 겨울에는 땅속으로 사그라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이요 영고성쇠(榮枯盛衰) 역시 우주법계의 질서가 아닌가.


그 이치대로라면 별로 억울할 일도 아니겠지만 한창때의 죽음이라 못내 안타깝고 아깝고 허망하고 아쉬운 것.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은 다만 좀 더 먼저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일 따름.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교리를 믿으면서도 때 이른 한 죽음 앞에 태연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불교의 생사관으로는 매미가 낡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과 같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게 기본 인식이다.


허나 고승이 아닌 범부들에게 죽음은 허망한 종말일 따름, 이웃이 심히 괴로운 아픔을 당하니 내 마음도 절로 애닯게 저려왔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렇다.


나는 죽고 너희는 산다, 어느 것이 더 좋은가는 신만이 아신다고 읊조린 그. 글쎄다.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그러니 이 시대 사람들 적어도 평균수명만은 채우고 가면 좋겠다.


무엇보다 모든 젊은이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얼음판을 걷듯 매사 항상 조심하며, 젊다는 이유로 방만하기 쉬운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하라고.


행여라도 자식 앞세우는 불행한 부모만은 누구 건 절대로 되게 하지 말라고.


그리하여 맡겨진 사명 훌륭하게 잘 마치고 돌아왔다는 하늘의 칭찬 말씀 듣도록 하라고.


서구화된 식생활과 불규칙한 생활습관에 더해 운동 부족 거기다 업무상 과로와 일상의 온갖 스트레스까지, 건강면에 있어 취약하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의 삶이다.


젊을 때는 실상 아무리 건강의 중요성을 역설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괜한 잔소리 같아 그저 귓등으로 듣는다.


건강을 과신하여 몸을 소홀히 여기고 밤샘 술 마시며 허랑방탕하게 지내도 젊음의 탄력으로 쉽게 원상태로 회복이 되나 나이 들면 몸도 전과 같지 않아 진다.


나이 들어 그제사 후회하기 십상이나 이미 때는 늦다는 걸 세상을 좀 더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경험상 앎으로 이를 거듭 일러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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