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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산행 칠선계곡

1992

by 무량화


지리산은 그저 지리산일 뿐 달리 번설이 필요 없는 산이다. 구구한 설명이나 언어의 분식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산세의 벅찬 위용에 압도돼 저절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산. 지리산에 이르면 비로소 단어의 궁핍을 절감하게 된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울울창창한 원시림과 운무에 뒤덮여있다. 지리산은 그 무게감에 필적할 만한 유서 깊은 고찰만도 여럿이다. 국보급 보물 등 문화재를 다수 지녔으며 명승 비경 도처에 펼쳐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경관으로 꼽히는 지리 8경. 노고 운해, 피아 단풍, 반야 낙조, 세석 철쭉, 벽소 명월, 불일 폭포, 연하 선경, 천왕 일출을 품었다.


산이 크고 높으면, 계곡이 길고 험하게 마련이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숱한 명소와 문화유적이 산재, 역사 종교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동학혁명 와중에 산으로 들어와 은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일 의병들이 왜경에 쫓겨 숨어들기도 한 곳. 여순 반란군과 파르티잔을 끌어안아 숨겼다가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공비토벌작전 당시 화염에 휩싸이기도 했으니 민족 수난사와 궤를 같이 한 지리산이다. 그렇듯 이름 없이 죽어간 젊은 넋들로 골골의 산죽 이리 짙푸른 건지도.


이번 새해맞이 산행처로 방향을 잡은 곳은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으로 빠지는 코스다. 칠선계곡 쪽은 워낙 험로라 적설기 등반으로는 위험부담이 따르는 장소다. 다만 지리산 북부 기슭이라 눈은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다. 밤 깊어 출발한 차가 첩첩 어둠을 뚫고 지리산 산동네 중산리에 닿았을 때는 새벽 한 시. 끊임없는 차륜의 소음과 차체의 진동을 베개 삼아 자다 깨다 일어나 보니 칠흑 같은 한밤중이다. 산마을의 구멍가게는 그 시간에도 침침한 알전구 빛과 함께 깨어 있다. 바로 앞서 들어온 산행팀의 차가 있는 듯 웅성거림 속에 라면을 먹는 사람, 배낭을 챙기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원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옷차림을 갖춘 덕에 추운 줄은 별로 모르겠다. 그러나 쌩한 냉기로 얼굴이 따갑다. 주변에 쌓인 눈더미가 허옇게 빛을 반사한다.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딛으며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매표소에서 칼바위를 거쳐 무작정 앞만 보고 걷다 보니 어느새 망바위도 지났다 한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사위는 어둠뿐이고 발길을 인도하던 헤드랜턴조차 차츰 빛 흐려간다. 여분의 건전지도 짐이 된다며 차에 두고 왔으니 천상 앞사람 발꿈치만 열심히 따를 수밖에 도리가 없다. 눈길 오르며 아이젠 덕은 톡톡히 봤다.


로터리 산장에 닿아 라면에 김밥으로 요기를 때웠다. 눈길로 나서기 전, 고개 젖혀 하늘을 보니 별 무리가 초롱초롱 빛났다. 도시에서 만나던 별과는 비교될 수없이 그야말로 밤송이만 한 별떨기들이 바로 머리 위에서 반짝댄다. 어린 왕자의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한 밤이다. 이만한 날씨라면 기대하던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나 속단하긴 아직 이르다. 변화무쌍한 산상 기후라 잠시 후의 기상도 예측불허이니까.



해맞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발길은 곧장 산정을 향해 내닫는다. 앞서 걷는 한 아가씨의 배낭에 매달린 물컵이 지퍼 고리와 부딪치며 규칙적으로 방울 소리를 낸다. 옮기는 발길 따라 박자 맞춰 딸랑거리는 소리 명징하다. 한밤인 탓인가, 어쩐지 오래전 지리산 공비들이 마을 분탕질한 다음 산막으로 소를 끌고 가는 기척처럼 느껴진다. 해맑은 아침이라면 요들송 울려 퍼지는 알프스의 목장 풍경 떠오르겠지만. 이 시각 연상되는 것은 산속으로 끌려가는 순한 눈매의 소 그리고 뒤따르는 워낭소리다.


법계사를 스쳐 천왕샘에 닿으니 날씨는 급변, 눈발이 휘날린다. 꽁꽁 얼어붙은 샘, 두텁게 쌓인 눈. 휘몰아치는 눈보라로 시야가 흐려 바로 앞이 안 보일 정도다. 평상시 같으면 세 시간여 만에 오르는 천왕봉 길이 야간산행인 데다 눈이 내려 다섯 시간 이상 소요됐다. 반은 걷고 나머지는 기다시피 오른 천왕봉.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 쓰인 정상 표지석조차 날아갈 듯 거세게 눈보라 몰아친다. 내 정도의 몸무게쯤 단숨에 쓸어버릴 듯 기세등등한 눈바람. 마구잡이로 몰아대는 바람의 아우성에 떠밀려 얼른 칠선계곡 향해 길머리 잡는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답다. 깊고 울울한 솔숲을 빠져나와 계곡에 내려서자 길이랄 수도 없는 바위 비탈길이 무뚝뚝하게 맞아준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되풀이, 엄청나게 큰 沼가 있는가 하면 집채만 한 바위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도처에 크고 작은 폭포가 내린다는 칠선계곡의 겨울은 오직 눈과 얼음 그리고 기막힌 정적만이 감돌 따름이다. 첩첩 산은 계속되고 길고 긴 계곡은 끝없이 이어지며 가도 가도 막막한 눈길이다. 어디가 합숫골인지 칠선폭포는 어드멘지 선녀탕은 또 어디를 이름인지 눈 외에는 아무것도 분간이 안된다. 좁고 험준한 계곡, 급경사진 비탈길은 계속된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지그재그로 연결된 내리막길이 기다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거기다 눈보라를 동반한 산울림은 괴괴하기만 하다.



지리산의 오지 중 오지인 칠선계곡.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겨울 등반길은 산행이 아닌 거의 고행길이다. 열 시간 하고도 세 시간이 더 걸린 산행이니 고된 노역이기도 하다. 완전 파김치 되어 기진맥진, 지칠 대로 지친 심신 추슬러 겨우겨우 두치터를 지나고 국골을 뒤로한다. 국골, 추성 산성터는 가락국 마지막 임금이 머문 데라고도 하고 마한의 최후 왕조가 성을 쌓고 살았다는 전설만 남아 추연한 감회 서리게 하는 곳. 여력이 남아 있다면 들러보고 싶지만 기운이 다 빠져 너무 피곤한 데다 등산화가 눈에 젖어 질퍽한 상태다. 얼른 아랫마을 향해 하산 서두른다. 강가 이르러 아예 등산화 벗어서 얼음물에 헹궈 신고는 동네 어귀에 닿았다.



추성동 곡주 맛에 취했다가 주섬주섬 차에 올라 부산으로 달리는 도중 단잠에 빠져들며 기약한 다음 등반. 날개옷 바위에 얹고 목욕하는 칠 선녀를 만나러 녹음 짙푸른 여름 다시 찾고 싶은 곳, 그때까지도 칠선은 한편의 소설을 궁그리며 기다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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