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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불일폭포

1989

by 무량화


하동에서 섬진강 데불고 세월 잊은 채 오르다 보니 삼거리에 선 이정표가 문득 손짓 보낸다. 어느새 여기가 쌍계사 입구란다. 초행일지라도 소설 <驛馬> 통해 이미 훤하게 새겨진 길이다.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인가 하면 칠불암 불일폭포 들머리인 화개장터. 장날 아니어도 오고 가는 나그네로 하여 언제나 흥성거린다는 여길 그냥 지나기가 아쉽지만 지금은 강바람 눈바람만 노니는 곳. 물론 역마의 옥화네 주막집도 안 보이고 체 장수 영감인들 여직 있을 리 만무다. 초봄 산골 아낙들이 직접 따서 덖어 낸 야생 녹차를 됫박으로 살 수 있다는 곡우 무렵 장날을 기약해 두고 화개천에 접어든다.



유독 화개동천이라 불리는 이곳. 洞天은 산과 내가 둘러 있어 경치 좋은 마을. 하긴 겨울이라 물 마른 냇가에 바위뿐이지만 한여름에는 물소리 천지를 울릴 듯 대단할 것 같다. 거기다 삼신산에 싸안긴 마을 풍경이 육자배기 가락 닮은 버들가지 사이로 보이니 천상 아름다운 화개동천이라 칭할밖에.



차창 밖 스치는 한풍은 그지없이 淸寒하고 춘삼월 아닌 십 리 벚꽃길이 꽤나 한적하다. 빈 가지마다에 숨겨진 꽃눈을 헤이는 운치도 미상불 싫지가 않다. 하많은 꽃잎 구름이듯 피어날 벚꽃을 품은 때문인지 나목에 어리인 有情. 물소리 홀연 높아지며 석문 지나니 쌍계사 경내. 화개천 내원골 두 계곡이 합쳐지는 데라서 쌍계사인가. 한겨울 눈 덮인 산에 칡꽃 피더라는 그 터가 쌍계사 자리라 했다. 칡꽃은 아니 보여도 햇솜 인양 다사로운 겨울 볕이 밤새 내린 기왓골의 싸락눈을 녹인다.



육조 혜능의 頂相을 봉안한 쌍계사는 신라 왕실에서 각별한 정성 쏟았다는 천년 고찰. 대웅전에 예불 올리고 돌층계를 내려서니 의연히 선 비석이 마중한다. 龜趺의 거북 머리 두리두리한 눈망울에 새삼 긴장하고 올려다본 비가 바로 진감선사 대 공탑비. 범패 소리로 하늘을 감동케 했다는 선사의 거룩한 자취와 명문장가의 글 솜씨가 어우러져 더욱 빛나는 경지를 열었는가. 긴긴 광음의 흔적인 양 더러 금 가고 쪽 떨어지기는 했지만 검은 대리석 비에 새겨진 서체는 중국의 글씨 교본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하니 더 일러 무엇할까. 국보로 아낌 받으며 현존하는 금석문 중 으뜸으로 여기는 공탑비. 해서 진감국사는 고운과 더불어 이 지리산에 영생하리니.



만근 무거운 범종도, 아름드리 법고도 침묵하는데 실바람에 풍경소리 혼자 쓰는 너른 마당. 그 모서리 한켠, 산으로 이어진 조붓한 언덕길을 오른다. 이제 불일폭포를 상면할 차례다. 솔바람은 젓대 소리로 흐르고 산새 지저귐은 해맑기만 하다. 비록 은백색 설경 아니라도 이들의 환대만으로 겨울 산행은 충분히 의미로워 가슴 벅차오른다.



불일 평전에 이르러 목축이고 다시 산길 휘돈다. 철 난간 잡고 철 사다리 타고 조심조심. 저 아래 벼랑은 자욱하니 딴 세상 같다. 조선조 학자인 절필재에 이어 그 제자가 쓴 <속 두류기행>에도 이 인근을 지난 자취가 역력하다. 절벽 위의 불일암. 용추 아래 鶴淵에 내리는 청학. 그 새 데려다 거문고에 맞추어 춤추게 하고 싶다던 옛 분의 멋스러운 풍류라니.



가파른 비탈 딛고 깊이 들수록 더욱 놀랍게 마련된 비경. 이리 절묘한 선경 비장하느라 그토록 옷깃 꼭꼭 접고 있었던가. 쉽사리 열 수 없는 순결한 가슴인 양 여미고 여민 품섶. 그러고도 완강히 석벽 병풍 두르고 백학봉 청학봉 그 사이에 감추어진 裸身. 거기에 비로소 폭포가 있다. 불일폭포다. 아니 지금은 60여 미터 하얀 얼음조각이다.



눈부신 기도, 우렁찬 묵념으로 선 한 덩이 추상화 빙벽. 엄격하게 절제시켜 다듬어 세운 대형 조각품이 압도해 온다. 어떤 감탄의 형용사도 찬사의 헌시도 죄다 부질없고 그저 숨이 탁 막힐 뿐이다. 찰나와 영원. 승천과 귀의. 낙하가 멈춘 비상의 몸짓으로 그렇게 장엄히 서 있는 불일이여. 그대는 백두의 얼이 치달려 내닫다가 두류에서 다시금 순백의 정기 다스려 그 전부로 토해 낸 차디찬 열정.



그대 품은 지리산은 아무래도 예사 산일 수가 없다. 북에서 흘러내린 산맥, 한반도 남단에 이르러 크게 한 번 용트림한 산 지리산. 산의 화엄세계요 악곡 중의 악곡 웅장한 교향악인 지리산. 어느 봉우리인들 범상찮은 게 있던가. 어느 계곡인들 대수롭지 않은 게 있던가. 산은 치솟고 다시 가쁘게 깎아지른 암벽. 평원 닦아 원추리 꽃 철쭉꽃 피우며 숨 고르다 또 한번 씨억씨억한 기상으로 솟구친 능선. 저마다 드높은 웅지로 하늘 향한 연봉들이 굽이굽이 이어져 가위 지리산은 산의 大海다, 산의 大洋이다.



변화무쌍 예측불허로 파도치는 산. 산. 울울창창 수해 이룬 원시의 숲이 있는가 하면 기세 좋게 내지르는 계류도 있다. 차나무 잣나무 군락지에 고사목 지대가 격을 이루고 골짜기의 물조차 굽이쳐 휘감아 돌다 멈칫 소용돌이치고는 곤두박질로 때로는 급류로 멋 부린 조화. 어디 한 곳 어색하거나 허술한 데란 없다. 무엇 하나 함부로 객쩍게 놓인 것도, 허투루 다루어진 데 역시 없다.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가 완벽한 지리산. 그 지리산에 들 적마다 세상사 애증 잊고 차라리 굳은 돌 되어 여기 이냥 서고 싶어 진다. 더구나 눈부시게 희디흰 살결로, 풍만한 몸매로, 마침내 넋 읽고 가쁜 숨 몰며 혼절하게 하는 여인 불일폭포 앞에 서면 학이 아니라도 뉜들 잠시 구름 탄 신선 아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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