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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동백수목원 꽃송이에 취하다

by 무량화


사진으로 먼저 수인사를 튼 동백 수목원이다.

동백꽃 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동백꽃은 홑겹의 조촐한 토종 동백꽃이었다.

꽃 색깔도 일편단심 오로지 붉은색 단 한가지였다.

교배 잡종인 겹동백은 숱 많은 여인처럼 탁해 보일 정도로 꽃잎 소담스러워 무거운 느낌이 든다.

게다가 꽃색도 여러 종류이며 심지어 한송이에 여러 색이 배합돼있기도 하다.

어쩐지 라 트라비아타를 떠올리게 하는 겹동백, 카멜리아는 쾌락에 빠진 헤픈 여자를 연상시켰다.

귀 뒤쪽에 화려한 붉은 꽃 사려 꽂고 붉은 치맛자락 흔들며 춤을 추는 춘희가 퍼뜩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질 때만은 토종 동백이나 마찬가지로 단숨에 지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 가상했다.

하여 동백꽃, 하면 송이 째로 툭 떨어져 버리는 아름다운 낙화로 처연감 들게 하는 꽃이라 입력돼 있다.

어느 날 길가 조경수를 보며 도반이 동백이 피었네요, 하면서 폰에 저장된 동백꽃 사진을 보여줬다.

동백꽃잎을 저마다 둥그렇게 제 발치에 쏟아낸 동백 숲 사진은 퍽 아름답고도 신비스러웠다.

선홍빛 동백은 선홍색을, 흰 동백은 하얗게, 연분홍 동백은 연연한 핑크빛 점묘화를 지면에다 둥그렇게 그려놓았다.

여태껏은 산다화로 알고 있던 그 꽃을 여기선 애기동백, 심지어 그냥 동백꽃이라 불렀다.

도로변에서도 산길에서도 시골길을 걷다가도 붉게 만개한 그 꽃을 만났다.

그만큼 어디 가나 지천이었다.

여기서도 아직 동백철은 이르다.

흰 눈 펄펄 내리는 삭연한 겨울풍경 속에서라야 꽃봉오리 조신하게 여는 동백.

끝내 화들짝 가슴 열어젖히는 경망스러운 짓 따위 절대 하지 않는 게 토종 동백꽃이다.

그에 비해 혼탁한 세상사 겁내지 않는 듯 애기동백은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다.

완전히 속내 오픈하지만 그렇다고 자유분방하다기보다는 죄성에 물들지 않아 거리낌이 없는 촌애기씨 같다.

요즘 시절에야 그런 심성을 깊은 산촌 어디에 선들 찾을 수 있으랴만.

흐드러지게 만개한 상태는 아닌 수목원 동백은 입 꼭 오므린 봉오리가 아직은 더 많았다.

그럼에도 애기동백꽃에 취해 신선놀음에 빠졌던 몇 시간.

숫제 발길 옮기는 데마다 동백터널이요 동백숲이며 동백꽃그늘이었다.



동백수목원은 위미리 동백군락지 가까이에 조성된 개인 소유의 동백 화원이다.

꽃도 좋지만 둥근 형태로 잘 가꿔진 수형 아름다워 최근 핫플로 유명세를 타며 주중임에도 인파가 밀렸다.

SNS 인증샷 도배질 덕에 뜨거워진 인기? 사실 볼거리 진진인 제주 서귀포 여행 중에서야 필수 코스가 넘쳐나는데.

도민 할증으로 삼천 원인가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 한 시간여 정도 사진 찍으며 자연 더불어 소요하기 알맞긴 하나.

하긴 겨울 한철만 문을 열고 나머지 기간 동안은 성장 돕는 거름 주고 병충해 방제하고 나무 전지해 다듬고 등등...

드러나지 않는 숨은 노력이 줄곧 뒤따라야 할 테니 입장료를 받는 게 마땅하긴 하다.



여기서 좀더 마을길로 들어서면 동백 군락지인 토종동백 나이테 굵은 고목들을 만날 수 있다.

동백골 위미리 동백군락지는 제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백 자연 군락지다.

자연상태인 이 동백나무들은 관리가 잘 안돼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 등 생육부진 상태이나 지금은 그 자체로도 나름 풍경이다.

처음엔 동백나무가 방풍림처럼 귤농장을 둘러싼 듯 보였는데 점차 애기동백으로 수종을 바뀌며 훌륭한 수목원으로 거듭났다.

오늘의 수목원이 되기까지에는 1세기 훨씬 넘는 연륜의 나이테 굵직하게 쳐진 이곳.

1800년대 후반부터 동백을 심기 시작해 손자대인 1977년 본격적으로 식재를 해오며 수목원의 기틀을 마련해 왔다는데.

전설 따라 삼천리 각색에 의하면 황무지를 옥토로 가꾸기 위해 피땀 어린 정성 쏟은 한 할머니의 얼이 깃들었다는 이곳.

열일곱 나이에 깡촌인 위미리로 시집온 현 씨 할머니는 해초를 뜯어다 팔고 품팔이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렵사리 모은 돈 삼십 닷량으로 인근 땅을 사 동백씨앗을 심었다고.

너나없이 어려운 살림을 살았던 조선말이라 백의의 민초들은 근면 검소야 당연히 따랐을 테고.

눈만 뜨면 땅에 엎뎌 잡풀 뽑고 돌 거둬내며 척박한 땅 기름지게 만드는 노력 기울였을 터.

남들 다하는 귤 농사 대신 들에 멋대로 자라는 동백 가려 심은 뜻은, 남들과 달리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제주 여인의 부지런한 노고에 더해, 마을 수호신께 지극 성심으로 빌고 또 빌어 섬 할망신 도움 듬뿍 안겨주셨던가.

삼사 대 지나가 고손자 대 이르러 달디 단 열매 거두게 됐으니 말 그대로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대로다.

남원읍 위미리는 귤이 맛나기로 소문난 지역, 온데 감귤농장이 펼쳐져 있으며 금호 리조트와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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