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Apr 11. 2024

연애를 해봐


"사는 게 너무 심심해. 아무 재미도 없어."

동년배의 한 친구가 맥 빠진 표정으로 넋두리를 한다.

이민생활 43년 차,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닦아 이 땅에 뿌리를 튼튼히 내렸다.

자녀들도 다 키워 성혼을 시켰다.

다만 몇 년 전부터 몰아닥친 경제 한파의 영향으로 오래 운영해 온 비즈니스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이 한가한 편이긴 하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아침에 눈뜨면 일터로 나와 개미 쳇바퀴 돌 듯하며 하루를 보낸다.

미국 생활이 퍽 단조롭긴 단조롭다. 지루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나날,

단순하고 평면적인 일상이 권태를 자아낼 법도 하다.



"그래? 그럼 연애 한번 해봐."

단도직입적이고도 천연덕스러운 내 대답에 순박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치뜬다.

"망측스럽게 이 나이에 무슨 연애? 숭(흉)한 소리도 다 하네."

망령되고 삿된 소리라는 듯 제까닥 손사래질부터 친다.

유부녀 그것도 노인네에게 연애를 해보라 권하는 건 불륜에 빠져보라는 말이니 주책을 넘어 큰일 날 망발 아니랴.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꼭 청춘 남녀만 사랑하라는 법 있디? 로맨스그레이 영화도 있잖아, 그처럼 점잖게 빠져봐. 점잖지 않으면 어때? 정신없이 미쳐보면 또 어때?"

점입가경,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긴다.



연애란 말에 지레 놀란 것이다. 그 반응이 흥미롭다.

왜 연애 또는 사랑은 남과 여 사이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여길까.

한용운 님의 시에서처럼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사랑스러운) 것은 다 님'으로, 대상은 조국일 수도 있고 신앙 또는 시가 될 수도 있다.

사랑에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부터 아가페적 사랑, 에로스적 사랑, 필리아적 사랑이 있듯이 연애는 반드시 남녀상열지사만을 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단지 통상적인 선입견에 의해 남녀지정부터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할 뿐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만으로 국한시킬 일이 아니다.

분재나 요가에 미칠 수도 있으며 사진이나 영화 감상에 홀려들 수도 있다.

산행을 즐기는 이도 있고 테니스를 좋아하면 테니스, 골프면 골프, 수영이면 수영, 어느 운동이든 흠뻑 빠져버리면 그게 또 다른 이름의 연애다.



텃밭은 나의 연인으로 채소를 가꾸며 생명의 비밀을 알아가는 묘미가 여간 아니다.

이처럼 그녀에게 무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거기 몰두해 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는데.

바꿔 말하자면 즐겨 몰입할 수 있는 자기만의 취미생활을 개발, 내실을 키워나가는 동시에 충족감을 안겨줄 수 있는 도락을 가지라는 뜻이었다.



그냥 시간 땜질용이나 심심풀이로 즐기는 여흥의 단계를 넘어 기왕이면 진지한 자세로 마주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작업,

자기 성장을 도모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취미라면 더욱 바람직스러울 터이다.

미숙에서 원숙으로 서서히 무르익어 가면서
성취의 기쁨에 흠씬 취해들 수 있는 경지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뜨겁고도 치열한 열정으로 나름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창조 작업,

뭔가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희열은 생각보다 뿌듯하고 흐뭇한 기쁨이다.

 

사랑에 빠질 대상은 무수히 많다.

자신 있는 주특기를 발전시켜 그 방향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는 일로, 그림에 관심이 있으면 손쉬운 파스텔화부터 본격 유화에도 도전해 봄직하다.

치매 예방에도 좋다니 새로운 악기를 배워본다거나 제3의 외국어에 도전해 보거나.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이라면 자수에 심취하거나 문방사우 곁에 두고 묵향 삼매에 빠져보는 멋도 각별할 것이다.

동서 고전이나 요사이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는 인문학 서적과의 열애도 근사할 것이다.

어지간한 지역 도서관이라면 미국이라도 한글책이 비치되어 있으니 회원권만 준비하면 된다.

컴퓨터를 익혀서 블로그를 만들어 나만의 공간을 운영하다 보면 시간이 물 흐르듯,
그야말로 物外閒人의 아취마저 맛볼 수 있다.



글쓰기도 그중의 하나, 우선 무간한 친구에게 편지 쓰듯이 자유롭고 편하게 써보는 것이다.

거기서 좀 더 발전하면 가슴 열고 일기 적듯 내 마음의 고해소를 마련해 볼 일이다.

반드시 등단 작가가 될 필요까지도 없다.

그냥 자신의 일상을 가지런히 정돈해 보는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 아니랴. 


속내 후련히 풀어헤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뿐더러 가끔은 기막힌 엑스터시까지 맛보기도 한다.

이렇듯 글을 쓴다는 것은 확실한 자기 위로인 동시에 자기 위안의 힐링타임까지 돼준다.

나아가 더러 신문 같은 지면에 발표되는 글로 잠시 들떠보는 기분도 꽤 괜찮은 거니까.

 

그렇게 道樂으로 문학이나 여타 예술활동을 즐기는 사람을 일컫는 어설픈 딜레탕트가 되어보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어느 분야나 전문 프로페셔널은 얼마든지 널려있다.

꼭 무엇이 되고야 말겠다는 작정으로 욕심내 다짐까지 하면서 부담 만들지는 말자.


각양각색이고도 다기다양한 저마다의 취미 세계를 좀 더 확장시켜 삶을 보다 윤기롭고 향기롭게 만드는 차원에서의 행복한 도락을 갖자는 의미라면 충분하다.

그리하여 심드렁한 일상에 활기를 보태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보약 아니랴.

특히, 맡겨진 일들 거의 마쳐가는 장년기나 노년기 즈음일수록 시간을 주체 못 하고 자칫 무료감에 빠져 허튼 생각을 할 위험 소지가 다분한 시기이다.   



친구는 감성적인 성품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따스한 마음씨에 살가운 낭만파다.

요리 솜씨에도 일가견이 있어 한식은 물론 양식에 중국음식을 두루 섭렵, 뭐든 척척해낸다.

세상살이 쓰고 단 풍파 겪으며 단련된 예지로 사물의 내면을 읽을 줄 아는 안목도 갖췄다.

평범한 표현도 시적이고 감칠맛 나게 잘한다.

딱 글쓰기에 적격인 친구다.



"글하고 사랑에 빠져봐, 시도 좋지만 산문 공부해서 팔순쯤에 자서전 한 권 묶든지
자녀들에게 전수시킬 비장의 요리법 같은 것 정갈하게 엮어보면 좋겠네.

또 누가 알아, 감춰진 재능 연마시켜 가다 보면 금맥이 터질지, 그래서 마샤 스튜어트 같은 유명인이 될지. 아니면 뒤늦게 혜성처럼 나타난 문단의 샛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는 친구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文才는 타고나는 것,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글쓰기가 작가들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꼬맹이들조차 무시로 날리는 셀폰의 문자 메시지, 블로그나 카페에 오르는 수많은 댓글들,

자유로운 자기 의사를 개진할 수 있도록 열린 광장이 신문, 잡지, 인터넷 매체 어디에나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문학 쪽에 흥미와 관심만 있다면 누구라도 글쓰기에 도전해 볼 만하다.



말은 청산유수인데 그 말이 글로는 이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글 따로, 말 따로라고 간단히 구분 지어버린다.

그러기 이전, 방금 전에 누군가와 나눈 대화체를 그대로 글로 옮겨보라.

머릿속에 잡다히 헤엄치는 상념 한 가닥 이끌어 내 차근차근 정리해 보라.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게 곧 글이 되는 것.

시도조차 안 해보고 나는 아냐! 단정 짓지 말기를.



그것은 하나의 씨앗을 싹 틔우는 작업이다.

누구나 가슴속에 아직 싹트지 않은 조그만 씨앗 하나 묻혀있을 수 있다.

씨앗은 발아할 조건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뜨거운 열정으로 그 씨앗을 싹틔우기 위한 사랑에 깊이 빠져들길 고대한다.

언젠가 그 씨앗의 눈이 푸르게 싹터, 잎 무성한 나무로 자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본격 작가의 길이 아니어도, 심심치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거기 열려있음이니.

조그만 달란트일지라도 발굴해 갈고 다듬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던 변모, 아주 뛰어난 글꾼으로 거듭나는 경우를 주변에서 실제 여러 번 보아왔다.

다이아몬드 원석이 흙에 묻혀있을 적에야 누군들 그 돌이 눈부신 광채 그리 빛나리라 예상했을까.

이참에 내 안의 씨앗이 품고 있는 그 꿈을 깨워보자.               

                                                                                     

*아이폰이 나오기 전 얘기다

작가의 이전글 물고기 종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