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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로 살아봐도

by 무량화


시가 쪽 둘째 할아버지 댁은 애초엔 대곡동에서 방앗간을 했다.

그러다 대구로 나와 목욕탕을 오래 운영하셨다.

신도시를 끼고 있는 동네라 목욕탕은 아주 잘 됐다.

70년대 중반 할아버지 환갑 때 육촌까지 친인척 모두에게 한복을 맞춰 입힐 정도로 가세는 흥성했다.

가까이에 고급 아파트 단지가 점진적으로 형성되면서 인근에 시설 좋은 목욕탕이 늘어났다.

고급 사우나 시설과 나날이 진화하는 찜질방이 생겨나자 할아버지네 목욕탕도 계속 리모델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흥 자본의 럭셔리한 인테리어와의 끝도 없는 경쟁, 해마다 하다시피 하는 되풀이 공사에 지쳐 당숙은 결국 목욕탕을 닫고 말았다.

날로 세련되면서 새로워지는 첨단 건축물과 내부 시설물들, 하다 하다 당숙이 손을 들고 만 그 생각이 난 것은 초읍 도서관에서였다.

얼마 전 개관한 덕포동 부산 도서관의 훌륭한 시설과 비교가 되는 시립시민도서관은 전에는 부산진구 초읍동에 위치해 초읍 도서관으로 불렸다.

82년 무렵 원 자리에서 신축 이전할 당시만 해도 부산을 대표하는 위풍당당한 도서관으로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었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지난 지금은 외관부터 도서관이라기보다는 정보부같이 고압적이기만 한 데다 내부는 학교 도서실처럼 낙후돼 안쓰러울 지경.

중세 성전이 그러하듯, 육신이란 허물이 그러하듯, 일월 무한히 흐르고 흘러 세월에 치인 채 낡고 삭아진 것들은 이처럼 초라해진다.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게 없다더니 허황되이 그새 눈만 높아져서인가, 앉을자리도 없긴 하지만 도서관에 온 길이니 책 한 권 빌려 들고 그냥 나왔다.



서가를 한 바퀴 휘휘 돌면서 책을 골랐으나 딱히 보고 싶은 책이 눈에 띄지 않았던 건 미리 생각해 둔 책도 없었던 때문.

하는 수없이 인문학 도서 사이에서 이주 문학, 이민 문학으로 불리는 <디아스포라 문학: 정은경 저>를 집어 들었다.

식당 주방 그릇 소독하듯 때가 때이니만치 셀프 책 소독기에 넣었다가 꺼내 무인대출 시스템을 이용해 누구 하나 대면하지 않고도 책을 빌려왔다.

저자 서문에 이렇게 쓰여있다.

"디아스포라인들에게 '이산'은 그야말로 여행이 아니라 고단한 삶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이방인 혹은 이중 정체성은 절대로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산은 유쾌한 '유목적 삶'이 아니라 고통과 소외로 점철된 신산함이고, 개인을 넘어서는 사회 역사적 문제였던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제 나라 영토를 벗어나 바깥에서 거주하는 이민자로서 망명자, 난민, 이주노동자, 입양인, 불법체류자를 아우르는 말이다.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든 근대의 노예무역이나 식민 지배와 전쟁 등으로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 및 그 후손이든, 디아스포라인들은 정착한 새 땅에서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소수자이자 주변인이며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현재 약 700만 명에 이르는 코리안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다.

디아스포라 문학은 제 국경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포들의 문학으로, 이산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을 조명하거나 의제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공통된 의식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상실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즉 노스탤지어다.

점차 코즈모폴리턴으로 발전해 나가고는 있지만 이방인 의식에 따른 영원한 노스탤지어는 상상 속 고향,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염원이 투영돼 있다.

저자가 텍스트로 든 재일 동포인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 재미작가인 김은국의 순교자, 이창래의 Native Speaker, 재불작가인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등에서 아웃사이더로서의 소통 부재 그 고통에 대한 삶의 비의가 읽힌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인 홍세화가 소외된 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도는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모습이 낯선가.

아니다, 양상은 다를지언정 우리 역시 소통 부재 사회를 살아가는 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 강박증으로 대부분 지쳐들 가고 있다.

삶이 놓인 현장, 생활이 영위되는 장소가 어디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한동안 디아스포라로 살아보았으니 느꼈을 법도 하지만 안과 밖의 경계는 별 의미가 없더라는.....


소통 부재인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어디서나 디아스포라, 지나치게 예민 또는 둔감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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