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진종일 시야 가득 백설이 만건곤, 뿌옇게 내리는 뒤란 눈발을 이층에서 빼꼼 내다보았다. 사위는 10인치의 적설량에 심해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 동녘이 연보랏빛으로 깨어나자 창가 고드름은 푸른 기운 머금었다. 빛 청청한 겨울 하늘 시린데 고드름 츄아악~ 수정 주렴을 기다랗게 드리웠다. 이웃집 고드름이 대박이다, 저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 ~~ 눈이 많이 왔고 쌓였고 추웠고.... 사철나무 생울타리 위에 소담스레 쌓인 눈 녹자 한줄기 눈물 같은 수정 고드름. 뿐 아니라 현관 옆 호랑가시나무는 지붕 물받이 홈통에서 떨어지는 물로 재채기하며 주르륵 고드름 되었다. 바로 뒷집 부지런쟁이 빈 씨네도 밤새 거칠었던 눈 폭풍 지켜보다 늦잠에 혼곤히 빠졌나. 좌우로 우람한 나목 거느린 앞집도 휴교라서 온 가족 깊은 동면에 빠진 듯 하다. 뒷집 마이클 네도 아무 기척 없이 잠잠하다. 그 집 체리나무는 해묵은 가지에 쌓인 눈으로 고개 깊이 떨군 채 상념에 잠겼다. 눈 속에 발목 묻고 제 그림자 바라보는 동백나무, 고행승처럼 묵언 정진 중이다. 멀찍이 두 아름이 넘는 단풍나무 체리나무 나목인데 집 옆 늠름한 전나무 한 그루만 제철 맞아 청청하다.
열 시쯤이나 되어서 전화를 걸어온 친구. 도로가 빙판이라 필라델피아까지의 출근이 어려울 듯하다는 거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가는 눈발 푸실푸실 흩뿌릴 뿐 길이 얼어붙은 거 같지는 않기에 거긴 그 정도야? 했다. 옆 동네인데도 이리 날씨 차이가 나는데 대륙 저쪽인 서부에서야 에어컨 켠다는 말이 나오지, 하며 웃었다. 뉴스에서는 톱기사로 나이아가라가 얼어붙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집콕 상태라 잘 몰랐는데 어지간히 춥긴 추운 모양이다. 백여 년 만의 폭포 결빙, 눈폭풍이 몰고 온 살인 한파란 말이 과장 심한 기자들의 엄살만은 아닐 시 분명하다.
통화 끝나고 난 잠시 후부터 굵어진 눈발이 거칠게 퍼붓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막힐 정도의 대단한 눈보라였다. 쌓인 눈이 금세 두터워졌고 기온은 급강하했다. 창밖 풍경이 그만 물색없이 사람 들뜨게 만들었다. 천지가 온통 희뿌연 데다 사진 솜씨마저 없으나 일단 디카 들고 안 뒤뜰로 바쁘게 움직였다. 특종 기사감 낚은 기자 맹기로... 미동부에 20년 만의 지독한 한파가 몰아쳤다는 보도를 듣고 한국에서도 안부전화가 왔다. 눈보라 심해서 공항이 폐쇄되는 등 북동부에 맹추위 강타! 연일 매스컴마다 야단이었지만 정작 현지에선 별로 대단치 않게 느껴졌다. 체리힐 지역만은 다행히도 주말 날씨가 반짝 풀리면서 그전에 두터이 쌓인 눈을 녹여냈다. 눈 덕에 추위 핑계 대고 컴놀이나 하던 중. 내 집 문밖 일만이 아닌, 미 중서부와 북동부의 심각할 정도라는 한파 소식을 접하며 가게 일을 보던 몇 년 전에 겪은 어느 아침 일이 떠올랐다.
주말에 눈이 20인치나 온대~ 대단한 겨울 스톰이래~ 눈보라가 아주 심하대~눈길 조심해, 따뜻하게 지내~ 손님들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하늘빛 잔뜩 우중충한 전날 오후엔 생필품 샤핑들 하느라고 몰마다 북새통이라고 했다. 나도 빠질세라 신선한 야채와 고구마 과일 등 한국 마켓에서 장을 봐두었다. 어쩌면 오래 눈에 갇혀있게 될지도 모르니 두름성 있게 비상식량을 사재야 한다는 듯이... 금요일 저녁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아니고 풀풀 날리는 진눈깨비 비슷한 눈이라 별로 쌓일 거 같지 않더니만. 새벽에 밖을 내다보니 차체가 눈 속에 폭신 파묻혔다. 재밌게도 차마다 윈도 브러시를 곧추세워놓아 솜이불에 싸인 차에서 겨우 브러시 끝부분만 보이니 마치 달팽이 눈인 촉각 한 쌍이 연상됐다.
그렇게 밤새 내린 눈이 족히 20인치 넘어 쌓였다. 한국 뉴스에 '미 동부 90년 만의 폭설 강타, 비상사태 선포'라는 굵은 글씨를 보며 매스컴의 과장법에 혼잣소리로 웃겨~ 정말이지 풍도 과하셔, 이 정도 가지고 무슨... 공항 폐쇄야 그럴법하지만 어차피 노는 토요일인데 학교며 관공서도 다 문을 닫았다고 왕창 겁을 주고 난리인가, 싶었다. 하긴 정전사태라도 벌어지는 날엔 엄동설한에 난리도 그런 난리법석이 없겠다. 실제 수만 가구가 정전됐다는 워싱턴이다 보니 대통령 왈 스노마겟돈이 몰려왔다고 했다던가.
슬슬 출근 준비를 할 시각쯤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 눈. 밖을 내다보니 차도도 뚫려있고 괜찮지 싶기에 유유자적 일터로 나갔다. 문제는 이후부터... 휴대폰으로 가게 전화로 여기저기서 불똥 튀듯 바리바리 전화가 왔다. 아니 어떻게 나왔느냐, 어쩌자고 오늘도 문을 열었느냐, 다들 집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지내는데 거긴 도로가 열렸더냐, 차들이 다니긴 다니더냐... 이쯤 되자 내가 제법 직무에 충실한 열혈 지사나 하늘 두 쪼가리 나도 약속 지키는 대쪽 같은 의인 같았다.
이어서... 간밤에 뉴스도 안 들었느냐, 지금 워싱턴이고 델라웨어고 뉴저지 동부 여러 주에 눈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했다. 굉장한 윈터 스톰이라 응급상황 아니면 집 밖 출입을 하지 말라 했으며 차량 통행금지령이 내려 차 끌고 나왔다간 티켓 끊긴다고. 요셉하고 같이 나왔냐기에 요셉은 눈치우느라 집에 있다 했더니 무조건 빨리 귀가하란다...... 음~무식하면 용감하댔지. 아니 내가 뭘 모르고 너무 순진한 건가 고지식한 건가. 토요일 친구 결혼식에 축가를 부른다는 미시즈 오코너의 드레스, 그 약속은 어쩌지? 하긴 모든 도로가 폐쇄 상태인데 결혼식을? 응당 오늘 결혼식 자체가 취소됐겠지.
우물가에 아이를 놔두면 아이야 샘이 위험한지 어떤지를 모르니 설설 기어 물가로 간다. 그 짝이다, 어제 오후 세 시부터 주말에 걸쳐 폭설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는데도 뉴스를 안 들었으니 뭐가 뭔지 아무 영문 모르고 밖에 나온 나. 그러고 보니 도로에 차량이라고는 제설차와 구급차뿐 왕래하는 일반 차량은 전무 상태, 인적은 완전히 끊겼다. 아니 제설차 운전하는 단 한 사람이 몰 주차장에서 작업 중이다. 밤새 치우고도 다시 아침에 겹 쌓인 파킹낫의 눈을 제설차가 빙빙 돌며 두어 시간 계속 작업 중이었으므로. 파킹낫 눈 치운 값이 백 불도 넘게 나오겠군.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슬슬 퇴각 준비.. 으이그, 남사스러워~ 목이 긴 부츠에 눈만 빼놓고 머플러로 둥둥 싸맨 다음 그러나 보무도 당당히 길로 나섰다. 방법은 걸어서 집에 가기 뿐.(걸어서 20여 분 거리, 평소에도 잘 걷던 길이니 뭐...)
눈보라가 마구 휘몰아쳤다. 시계 거의 제로... 그래도 다행히 날씨는 춥지 않았다. 처치 로드 차도 한복판을 걷는다.(차륜이 나있는 차도 한복판만이 그나마 걸을 수 있게 눈이 치워진 단 한 곳이라 그냥 도로 한가운데를 이용할밖에.) 전세 정도가 아니라 길 전체가 완전 내 차지다. 비록 도보이긴 하나 카퍼레이드 하는 대통령 부럽잖다. 천지사방에서 와~와~환호해 주는 눈발. 교통법 무시, 신호등 무시, 다 프리로 통과다. 오늘만은 이 길이 나의 독무대, 일일천하를 선포하노라. 우하핫!
좌도 우도 거칠 것 없이 이리왈 저리왈, 내 맘대로 방향을 틀며 여기저기 디카를 들이댄다. 어디라도 좋은 액자 안의 풍경, 설경 어우러진 숲은 황홀할만치 멋지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찍힌 사진에는 왜 이다지도 차이가 날까? 그건 물으나 마나 순전히 내 실력 및 솜씨 부족 탓이렷다.) 길엔 차도 인적도... 아무 거칠 것이 없다. 단 혼자임에도 참으로 경쾌 상쾌 흔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리도 아름다운 순백의 눈꽃 세상을 펼쳐 보여주시려고 이 아침 나를 부르신 그분. 감사드립니다... 하였던 어느 해 겨울 그날이 새삼 생각났다.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는 일월. 이른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흩뿌리더니 차츰 눈발로 바뀐다. 자욱하게 내리는 눈, 눈보라. 푸짐한 눈으로 온통 하얘지는 세상. 마음은 그만 아이가 된다. 생각 단순한 아이처럼 디카를 들고 나선다. 혹한의 매운 날씨임에도 설경을 담아두겠다며 무모하게 밖으로 나갔던 것은, 앞으론 이 동네에서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아쉬움 때문. 엘에이로 가면 눈을 찾아 일부러 높은 산엘 오르지 않는 담엔 이 순결한 은세계며 쌩한 냉기며 동심 분위기며를 만날 수 없겠기에...
동면하는 곰처럼 방콕 한 채 따뜻하게만 지내다 갑자기 냉기에 노출시키니 정신이 다 번쩍 든다. 빰을 후려치는 시린 바람결에 절로 옷섶부터 여며진다. 더구나 길이 빙판이라 조심조심 한걸음 뗄 때마다 긴장된다. 멀리 나간 것도 아니고 동네 안에서 잠깐 이웃들을 둘러보는데도 귀가 시려워~ 손이 시려워~ 겨울바람 때문에~꽁꽁꽁~노래처럼 벌써 한기 파고들며 손은 곱아 온다. 겨울 낭만도 좋지만 이러다 괜히 동상 걸리거나 고뿔 들라, 조심하자. 대충 사진 몇 장 담은 뒤 내빼듯 얼른 훈기 도는 집안으로 들어와선 온통 벌게진 손등 번갈아 쓰다듬으며 생고생시켜 미안해, 내 손이지만 안쓰러워 한참도록 다독거리며 녹여주었다.
지금은 한밤중, 창밖은 눈빛으로 인해 보름달빛 내리듯 하얀 백야다. 그래서 다시 생각난 그곳, 그립고 그리운 유년의 고향 겨울 풍경들. 토끼몰이하던 산자락에 소복이 눈 덮어쓴 망개 열매나 감나무에 남겨진 몇 알 까치밥이거나 초가지붕 추녀에 달린 고드름. 방죽에서 썰매 타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푸덕지게 눈 내린 뉴저지의 아침. 밤새 급강하한 기온이었으나 설마 하며 뒤란에 나가보니 수영장은 이미 덮개를 씌운 다음이라 괜찮았지만 대야에 받쳐둔 수도 호스도 얼어있고 대야 물도 꽝꽝 얼어 부풀어 올랐다. 앞뜰도 상황은 마찬가지. 제철 맞은 호랑가시나무 윤기진 잎에 작은 고드름이 달렸다. 똑 따서 입에 넣어보고 싶을 만큼 투명한 고드름. 추위라면 질색이니 꼼짝없이 은둔자처럼 칩거하며 순백의 설경에 파묻혀 영화나 보기로 했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