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제주 이미지가 무색해지는 요즘이다. 육지로부터 멀리 외떨어진 섬이라 환경오염에서 자유롭고 천혜의 자연환경 자체가 깨끗해 청정제주를 당연시하였다. 게다가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가동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 제주도 아닌가. 부산에서 지내다 와보니 미세먼지로 불리는 황사현상이 부산보다 한결 심해 깜짝 놀랐다. 사방에서 해풍 몰아치는 섬인데 웬일? 답은 아주 간단하다. 지도를 보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부산에 비해 지형이 훨씬 서쪽에 붙은 제주섬이다. 결국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요 며칠 대기는 갑갑할 정도로 희뿌얬다. 해무 잔뜩 낀 양 미세먼지 심했으며 하늘도 우중충했다. 태양마저 그 빛을 잃고 희끄무레한 채 건공 중에서 겨우 존재를 알릴 뿐이다. 마치 안개 깊은 날 수은등처럼 초점도, 촉수도 낮게. 소설 The Road 배경 하늘에 가깝다면 과장이 심하겠지만 얼추 비슷한 상황. 한겨울임에도 가시거리가 매우 짧았고 한라산도 바다도 다 희미했다. 중국발 미세먼지는 유해한 중금속 투성이라고 하니 마스크 착용만으로 안심이 안된다. 강한 편서풍의 영향으로 봄철에는 더 탁하던 공기다. 요사이도 그못지 않게 대기의 질이 안 좋아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일도 자제했고 외출 역시 삼갔다. 며칠 만에 모처럼 하늘빛 푸르게 깨어났기에 가까운 보목포구까지 걸었다. 바다가 보이는 거처에서는 쾌청하다 여겼는데 백록담이 딴 나라 풍광이듯 아슴하게 떠올라 낯설었다. 북동풍이 불었고 대기질 지수는 보통이었다.
며칠 조신하게 집에만 있다가 불현듯 나선 걸음이다. 신창 친구가 집뜰에서 꺾어다 준 수선화가 기어이 외출을 부추켜서였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자 밤새 마루에 고여있던 오묘한 수선화 향이 품 안으로 스며들었던 것. 그 향기는 지난해 보목 어느 골목에서 매혹적으로 안겨든 천리향의 기억을 일깨웠다. 작년 그때는 이월 초였지만 혹여 한 두송이라도 피기 시작했으려나 싶어 길머리를 잡은 보목이다.
서귀포 동문로터리에서 언덕 아래로 꺾어 들어 칼호텔 스치고 소천지를 지나면 보목포구.
눈에 훤한 길, 바다 오른편에 끼고 휘적휘적 걷는다. 한 시간 여를 놀멍쉬멍 걷는다. 그렇게 닿은 보목항 초입이다. 바짝 섶섬이 다가와 앉는다.
거처에서 볼 때와 달리 육덕 듬직한 것이 꽤 크게 보이는 섶섬이다. 마을 어딜 들어서나 애기동백 한창이고 어느새 비파꽃, 돌담 아래 수선화 피었으며 매화 봉오리 발그레 부풀었다. 천리향 무더기 소담스럽던 그 찻집은 시골마을이라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조급했던가, 천리향 꽃송이들은 팥알만큼 단단한 채 송알송알 맺혀있을 따름.
나선 김에 보목항 테우며 돗대불도 둘러보고 보목 출신 시인의 <자리물회> 시를 눈으로 읽었다.
....
인생의 참뜻을 아는 자만이
그 맛을 안다
한라산 쇠주에 자리물회 한 그릇이면
함부로 외로울 수도 없는.
우리들 못난이들이야
흥그러워지는 것을
.....
아직까지도 된장을 푼 제주도 식 물회는 접수가 안 되는 1인. 톡 쏘는 재피 맛에/구수한 된장을 풀어/가난한 시골 사람들이/여름날 팽나무 그늘에서/ 한담을 나누며 먹는 그 음식을 언제나 주저하지 않고 먹을 수 있으려나. 바다 위에 납작하게 떠있는 지귀도, 자리돔 서식처라는 그 섬을 한참 바라보다가 솔바람 일렁대는 제지기오름이나 오르기로 했다. 중턱쯤 올랐을까, 인적 없는 외길이 갑작스레 휘휘하게 느껴져 온길 되짚어 타다닥 빠르게 하산해 버렸다. 천리향 꽃마중도, 제지기오름 산행도 미완으로 남겨둔 채로 다음 기회 약속하고는 짧은 해 설핏해지기 전 보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