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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에서 보목까지 걷다가 천리향 포로되어

2024

by 무량화


엷은 구름층 위로 일출 기운 느껴지더니 해 머리 쏘옥 내보였다.

일순간, 어느새 잘 닦은 금접시 불끈 밀어 올렸다.

찰나였다. 정말 금시였다.

하늘엔 구름 한 점 거느리지 않았다.

대기도 맑고 태양 눈부신 데다 바람 미미해, 더할 나위 없이 쾌청한 아침.

하늘 푸르른 날은 바다를 보러 가곤 한다

물빛 보석같이 투명한 쇠소깍에서 바다 끼고 걸으며 집까지 내처 걷기로 했다.

보목포구나 소천지에서 노을 어린 금빛 바다도 보고...


주말이라 올레꾼들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쇠소깍에서 검은 모래 해안으로 내려갔다.

오후라서 인지 해풍 세차게 불며 파도치자 물보라 하얗게 흩날렸다.

인근 해역에 자리돔이 버글거리고 스쿠버와 낚시꾼 놀이터라는 널빤지처럼 납작한 지귀도 자태도 또렷했다.

방파제에 오똑 선 흰 등대 붉은 등대가 풍경 달리하며 한동안 따라왔다.



느릿느릿 걷는 길이 올레길, 게우지 코지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물이 많이 빠져 현무암 들쑥날쑥 까맣게 깔린 해안가.

생이돌 주변을 둘러싼 기암 사이 선녀탕 비슷한 장소가 새똥 흔적보다 더 눈길 끌었다.

바짝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어 거기까지 내려가진 않았다.

대신 한라산으로 시선 돌렸다.

전에 봤을 적에도 비슷하게 백록담에서부터 산자락 따라 구름띠 덮여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

한라산 백록담은 구름을 잡아당기는 자기력 혹은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이라도 있는 걸까.

강력한 자기장이 있기라도 한 듯 정상부 능선 따라 솜이불 덮듯 포근 감싼 구름.

기묘하게도 산정 저만치서 너울너울 흐르던 구름장이 하나로 연결돼 능선 위에 얹히는 현상이 자주 목도한다.

다시 설렁설렁 해지는 서녘 바라보며 걸었다.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묵묵히 끌려 온 내 그림자가 거인 같았다.

보목포구 앞 섶섬이 저만치 드러났다.

그즈음 규모 큰 양식장 앞을 지나게 됐다.

한길가에 연달아 두 곳, 몰골로 봐서는 한참 전에 폐쇄된 상태 같았다.

우선 일차적 책임은 청정해역에 양식장 허가 내준 당시의 행정당국.

업주야 공장 팽팽 돌려 신나게 돈 벌어들였을 테고 현재도 저만한 너비의 번듯한 대지 깔고 앉았으면 저절로 돈방석.

미역 소라 오분자기 풍성해 해녀들이 물질하던 장소로, 큰업통이란 표지석이 선 걸로 미루어 알토란 해전​(海田)​이었을 이곳.

자리물회로 이름난 보목포구인데 양식장이 들어서며 해양오염 날로 심해졌으리라.

대형 양식장이 생기면 그 앞바다는 오래지 않아 심각한 오염으로 백화현상 두드러지며 슬슬 죽어간다.

양식장이 24시간 내보내는 폐수 때문이다.

도로 아래로 보이는 굵직한 하수관, 은폐시킨다고 시켰지만 바다로 뻗어나간 굵은 시멘트 관이 눈에 띄었다.

사실 뭣도 모르는 하수관이겠으나 괜히 눈 한번 흘겨줬다.



보목포구에 들어서니 몹시 추웠다.

비린내 푹 배인 전형적인 갯마을 어디선가 의외로 향긋한 꽃내음이 흘러 다녔다.

향기를 따라 돌담 정겨이 이어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짙어진 향으로 보아 아주 가까운 듯, 근처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불 밝힌 카페 대문 옆에도, 어느 집 담 모롱이에도 아! 소담스레 만개한 천리향.

너였구나. 진짜 오랜만이네.

덥석 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부산 이모집에서 처음 접한 이래 겨울 지나 영주암 정원에서 자주 만났던 향기로운 꽃나무.

대기 청량한 조춘, 새벽예불 시간이면 후각 어지럽히며 정신 수란케 하던 고혹적인 그 꽃내음이라니.

거기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미 송림 사이로 석양 뒤끝 홍시빛 연연히 어렸다.

포구마을 지나 작은 산모롱이 넘어서 소천지에 들렀다가 칼호텔이 보이면 바로 시가지다.

그 계획은 뒤로 미루고 서둘러 귀갓길에 올랐다.

중앙로터리에 닿자 시청사 불빛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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