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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당 미술관 명예관장 우성 변시지 화백

by 무량화


서귀포에는 미술관이 서넛이나 된다.


그중 1987년에 개관한 기당미술관.

국내 최초의 시립 미술관으로 제주가 고향인 재일교포사업가 기당(寄堂) 강구범 씨가 건립, 서귀포시에 기증했다.

서귀포 대표 작가 조명전으로 <변시지 유럽 기행>이 기당미술관에서 열린다 해서 찾았다.

낟가리를 형상화시켰다는 미술관은 외관에서 보다 나선형 동선으로 이어진 실내에 들어서면서 느닷없이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전시실 천정의 목조 구조물은 한국의 전통가옥을 연상시켰다.

거기다가 자연광에 가까운 조명 빛 은은한 전시공간이 주는 일종의 위로감 때문이었을까.



입구 첫 상설 전시실에는 기당의 형님인 수암 강용범 선생의 서예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행서와 초서를 속도감 있는 필치로 활달하게 구사하는 필법이라는 설명이 옆에 따랐다.

이어서 우성의 유럽기행화첩 하나하나를 골똘히 읽어나갔다.

유화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연필로 쓱쓱 저 풍경들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유럽여행 내내 했더랬지.....

그런데 거리 한 귀퉁이를 웅크리고 걷는 한 남자를 발견하자 묵지그레한 존재의 외로움이 싸하니 전해졌다.

간결하게 단순화시킨 형태의 황토색과 검은색 선만으로 외곽을 처리한 그의 그림들.

몽마르트르 광장이나 고성 앞에서도 고독한 존재는 늘 웅크린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기당 미술관 초대 관장이었다가 지금은 명예관장인 고 변시지 선생.

전시실 거의를 채워나간 제주 화가의 제주 풍경 앞에 섰을 때 그 강렬한 인상에 납작 주눅이 들고 말았다.

미국 스미소니언 뮤지엄에 '폭풍의 화가'로 잘 알려진 변시지의 작품이 장기간 전시되기도 했다는데.


물 흐르듯 잘된 글을 일러 천의무봉의 필체라 하듯 화가의 그림 역시 그 경지 진작에 이른 우성.


이번에도 거듭 느꼈듯, 그의 그림에서는 고해에 던져진 일엽편주인 존재의 외로움이 처연스레 사무쳐왔다.

동시에 파도 심하게 치는 날 미친 듯 후드껴대는 바람 소리 같은 환청이 마구 휘감기며 파고들었다.

변화백의 그림 편편 마다에서는 숙명적인 존재의 고독과 고뇌가 뼈 시리게 엄습해 오기 때문이다.

‘황톳빛 제주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유명한 서귀포 출신 화가의 작품들은 그러나 보는 내내 마음에 납추가 달린 듯 묵직했다.



그는 1926년 서귀포 서홍동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소학교 2학년 때 씨름을 하다가 오른 다리를 다쳐 자유롭게 뛰어놀지 못하게 된 그는 평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게 된다.

그에게 닥친 불행조차 운명이었을까, 그림에만 몰두했던 그는 이듬해 아동 미술전에서 오사카 시장상을 수상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학과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1948년에 광풍회 공모전에 최고상을 수상하여 광풍회 정회원 나아가 심사위원이 된다.

일본 화단 최대의 권위를 누리는 광풍회는 일본 문부성 주최의 일전(日展)을 주관하는 최고의 중앙화단이라 한다.

화려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그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인한 심적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었던가.

서울대학교의 초청으로 뒤늦게 한국에 돌아와 강의하였고 후에 제주대로 옮겨 작품 활동을 하였다.

고향에 머물며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지는가 싶었으나 그는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깊이 갈등하며 고뇌에 빠졌다.

여기에서 작가의 쓸쓸한 황갈색 바탕색이 짙어졌으며 태풍이 몰고 온 거친 파도를 접하며 고독한 실존의 근원에 천착하게 된다.

세찬 바람에 쓸리는 대로 구부정하게 웅크린 늙수그레한 남자와 야윈 말이 묵언 중에 전하는 비애스런 적요감.

누구라도 여태껏 데불고 걸어온 자기 그림자에게 잠시 따스한 위무의 눈길 보내며 지난 생을 들여다보게끔 하는 그림들이 아닌가.

관조와 성찰은 그러나 저리고 쓰린 것.

저녁놀 기명색으로 어린 언덕길 내려오며 그래도 스스로의 손등 토닥거려 주었다.


촌부/서귀포 풍경/풍파
귀로/그리움/열대
봄날의 한라산/파도/일출봉
정방폭포/천상에서/더불어
한라산/내고향/한가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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