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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4. 2024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 미션 -다시 제비를 기다리며

캘리포니아 미션


종소리를 좋아해 '종소리'란 아이디를 내건 채 이십 수년 웹서핑을 했다. 그 속에 빠져들면 잠시 나를 잊고 또한 고단한 현실을 잊고 별유천지에 들어 시간마저 잊곤 했으니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 인터넷 몰입을 나무라지만 나이 든 나도 한번 삼매경에 빠지면 쉬이 헤어나지 못하는 그 중독성이라니. 하여 걸림이 없다는 노년기로 향하는 이제는, 기분 좋고 흡족스럽게 즐기는 놀이의 한 방편으로 잡기일망정 늘어가는 여가활용 차원에서랄까.



그 공간에서 나는 오랫동안 종소리라는 별칭으로 숱하게 쏘다녔다. 종소리... 맥놀이 그윽한 범종소리만이 아니다. 교회당 맑은 종소리도, 수업을 알리는 학교 종소리도, 소 목에 달린 워낭소리도 나는 다 좋아한다. 소리가 아닌 종을 닮은 꽃마저도 사랑스러워 연연한 오월 오동꽃, 조롱조롱 귀여운 은방울꽃, 숲길의 요정 같은 둥굴레꽃도 좋아한다. 종과 나의 인연? 누생의 어느 시절 나는 쇠를 녹여 종을 만드는 장인이었던가. 때맞춰 종을 치는 종지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미션 순례는 오래된 종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정이기도 하였다.



이번에 찾은 곳은 미션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Mission San Juan Capistrano). 각 미션마다 상징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으므로 풍기는 분위기 역시 각기 다르다. 그에 따른 고유의 색채와 향취를 전해주면서 품은 사연도 제각각인 미션들. 일곱 번째 캘리포니아 미션인 이곳은 기록에 의하면 1776년 11월 1일  '모든 성인들의 날' 첫 초석을 놓은 것으로 되어있다. 잘 알다시피 핼러윈인 10월 마지막 밤은 이 날을 위한 전야제 성격을 띤 죽은 자들의 축제날이다.



설명서를 읽어보면 이 미션은 '미션 중의 보석'이라 칭해진다고 쓰여있다. 미션의 보석이라 불리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귀하고 아름다운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리라. 무너진 대성전은 아닐 테고 멋진 종? 아니면 역사적 가치? 보석으로 꾸며진 숨겨둔 유물? 매년 봄 일 주간 열리는 제비 축제가 유명한 곳이니 제비? 보석의 의미는 다름 아닌 정원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까닭에서란다.



제비도 이 미션과는 각별한 관계에 있긴 하다. 해마다 3월 19일 성 요셉 성인 기념일을 즈음하여 아르헨티나로부터 6천 마일이나 날아 제비 떼가 미션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황토를 물어다가 처마 밑에다 동그란 옹기 모양으로 집을 지은 제비 둥지가 추녀마다 눈에 띈다. 그리고 유독 여기저기 높다라니 솟아있는 종탑들이 시선을 끈다. 석벽만 남은 오래된 성전 앞에 고압적으로 버티고 선 두 개의 거대한 종과 마을의 경조사를 알린다는 크고 작은 종들이 뎅그렁~당그랑~묵직하고도 맑은 소리를 여운 깊게 들려준다.   



미션의 보석이라 불린 이유에 맞갖게 역시나 이곳 정원은 빼어날 정도로 아름답다. 초입의 정원만이 아니라 안뜰은 물론 후원에도 갖가지 화목으로 가꿔진 채전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온갖 꽃나무가 망라된 화훼 단지처럼 별의별 종류가 다 심어져 있는 이곳. 오래된 와이너리를 갖추었던 곳답게 포도나무부터 캘리포니아의 상징 야자수며 선인장에서 해묵은 석류나무 올리브나무 레몬 나무까지. 꽃은 우아한 장미부터 상사화며 칸나에서 키 낮은 금송화 채송화까지. 후원에는 토마토, 옥수수, 부추며 온갖 민트까지, 이름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향초도 상당수다.



정원마다 규모에 알맞게 설치되어 있는 분수대엔 물이끼 더께 져 넌지시 해묵은 세월을 일러주고 찰랑거리는 물에 되비치는 종각 실루엣은 꿈결만 같다. 박물관과 더불어 'ㅁ' 자로 둘러싸인 주변 부속건물의 내부 정원 정중앙에도 당연히 팔각형 연못은 자리했고 때마침 수련이 만발해 있다. 오래전 롱우드 가든에서 수련을 만난 후 꽤 오랜만의 재회라 무척 반갑다. 색색의 수련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듯 저마다 시선을 사로잡으며 내 작은 카메라의 앵글을 부른다. 여름의 꽃 수련 그늘 아래엔 그야말로 팔뚝만 한 잉어 떼들이 유유자적 한가롭고..



그럼에도 이곳은 미션 이전에 언뜻, 첫인상은 로마의 폐허를 연상시킨다. 무너져 내린 거대한 건물의 잔해 때문이다. 주 건축물인 'Great Stone Church'는 1797년에서 두 해에 걸쳐 완공됐다. 허나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남아 있는 제일 안쪽의 석벽을 제외하고는 1812년 대지진으로 와그르르 무너져버렸다. 바윗 덩이를 쪼아 견고히 쌓은 석조건물이 한바탕의 지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니 공들여 지은 성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수도사와 원주민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동상이몽에 빠졌겠지. 그럼에도 양측 공히 하늘의 진노 앞에 두려워 떨며 잔뜩 주눅이 들어 낮게 움츠러들었으리라.



당시대를 풍미하던 그리스 로마 풍 건축양식의 영향도 영향이겠지만 미션마다 필히 회랑이 따른 연유는? 이는 지역적으로 지진 다발 지대라서 아치를 둔 회랑 양식을  더욱 선호했다 한다. 미션 건물 거의가 빠지지 않고 긴 회랑을 배치하게 된 이유다. 강렬한 태양의 캘리포니아임에도 어둑신 그늘진 뒤뜰의 묘지를 돌아 쪽문으로 통하는 곳에 아담한 예배당(Chapel)이 기다린다. 1782년에 만들어진 세라 채플은 캘리포니아 21개 미션들 중에서 처음 만든 그대로의 상태가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라고 설명서에 적혀있다.

 

채플 전면의 화려한 장식은 1900년대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지고 왔다 한다. 현재 심각한 경제 위기에 봉착한 스페인이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던 그 당시야 오늘날의 암담한 몰락을 과연 꿈엔들 상상이나 했을까. 금으로 칠갑을 하다시피 한 그 많은 제단들, 어딘가에서 침략자로 나아가 약탈자로 황금 덩이 끌어모아다가 자기네 신께 제물로 바쳤을 터. 그러나 어느 신이 속 시커먼 뇌물을 황금이라고 무턱대고 반길 리 있으랴, 어림없는 일이다.



중세 교회의 장엄 웅장한 건축물이나 현대의 으리으리한 교회 건축물 앞에서 드는 곁가지 생각 하나. 신에게 최고의 성전을 봉헌하고 싶은 오롯한 의지야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하느님이 정녕 바라시는 것은 그런 물질적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왜 그럴까. 간증을 들으면 수없이 하느님을 만났으며 뜨거운 성령의 터치를 느꼈다는 뭇 신앙인들. 그들에게 오신 하느님은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하느님이신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 체험, 그걸 뚜렷이 느껴본 적이 없다는 마더 테레사다. 오히려 너무도 비참한 몰골을 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할 적마다 불경스럽게도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들었다 한다.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긴 계신 건가? 자비의 하느님이 맞긴 맞나? 수없이 의구심을 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저잣거리 땅바닥에 내려놓고 남루한 차림으로 끝까지 봉사하는 삶을 살다가 갔으니 그 점이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만든 것이리라 여겨진다.



배곯은 이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챙겨 주는 이, 그가 바로 예수님께 마실 것을 드리고 입을 것을 전한 사람이다. 누누이 성서에도 적혀있듯 하느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웃과의 사랑 나눔, 곧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라는 것이 아닌가. 금칠을 한 제단 봉헌보다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라 하셨는데..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빠졌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려서. 캘리포니아 미션의 첫 설립자인 세라의 이름이 붙은 채플 앞. 출입구 오른편에 감실처럼 파인 자그마하니 조촐하나 아주 인상적인 기도방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무릎을 세운 한쪽 정강이에 길게 팬 상처가 도드라져 보이는 조각상, 이는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자인 성인 페레그린(St. Peregrine)이다. 자신처럼 병으로 고생하는 모든 이가 자비하신 하느님 손길이 닿아 완치되기를 간구해서인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기도처란다.



널리 알려진 대로 루르드의 기적은 수많은 병든 이를 일으켜 세웠다. 하긴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비손을 한 할머니 정성도 하늘에 닿는다. 지극지성 한마음으로 간원을 드리면 그 뜻이 반드시 하늘에 이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우린 너무 쉽게 기적을 바라고 찾는다. 불교에서는 가피라 하고 성당에서는 은총이라 이름하는 신비로운 기적. 특별나게 눈에 뜨이는 놀라운 어떤 가시적 현상이나 비현실적인 상황 전개를 기적이라 이른다. 하지만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바로 땅 위를 두 발로 걷는다는 그 자체. 이 험한 세상 오늘도 무사히 거기다 평안히 살아있음 그 자체가 기적 아니랴.



아침에 잠에서 깨어 새 태양을 마주하는 일만으로도 벅찬 기적이라 하지 않던가. 이런 통상적 경우 외에도 나 역시 살아오면서 여러 번 기적을 체험했다. 지나고 보니 아, 기적이었어... 속으로 경탄한 적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려운 또는 막다른 그 순간을 헤어나게 해 준 뜻밖의 어떤 힘, 위기나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까지도 영원하실 분, 세상 만물 모두 안에 임재하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와 늘 같이 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사는 나는 그러므로 복된 사람이다. 이처럼 때로는 축복된 순례자의 여정에 오를  있고...


미션 순례 중 이곳에서만큼 시간 오래 할애한 적이 없을 정도로 산후안카피스트라노 미션은 진종일 머물러도 질리지 않던 곳. 먼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보며 향기로운 꽃과 나눈 눈맞춤도 아름답지만 조용히 두 손 모을 수 있는 기도방이 기다려주는 이곳 미션. 오후 늦게 문을 나서면서도 아쉬움에 다시 무너진 석벽을 건너다봤다. 그 너머 하늘빛은 벽옥, 날씨는 쾌청, 상큼하게 밀려드는 바람결이 고양된 기분을 한껏 부추겼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가사 음정 제대로 모르면서도 멕시코 민요 '제비'를 내내 흥얼거렸다. 제비 돌아오는 봄, 또 한 번 찾고 싶은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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