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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4. 2024

책 읽기 좋은 날씨

칠층산


한 주간 내내 비가 온다는 기상예보대로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책과 친해지기 딱 안성맞춤인 날씨다. 이럴 땐 좀 묵직한 책도 괜찮다. 관상수도회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의 <칠층산>은 '20세기 고백록'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처음 이 책을 만난 건 영세 직후였다. 당시는 의무감 비슷한 느낌에 밀리다시피 하며 급하게 읽어 내렸다. 한 번 더 찬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다시 잡기가 왠지 버거웠다. 솔직히 854 페이지에 달하는 책 두께부터 질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형식을 빌린 것도 아니라서 읽어내기가 여간 팍팍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흡인력은 대단한 책이었다.



유소년기를 거쳐 청년기에 이르는 동안 격랑과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다 신을 받아들이고 엄격한 고행 생활을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기까지 머튼의 자전적 고백록인 칠층산이다. 머튼 자신이 말한 대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의 눈길 아래 나의 내면을 펼쳐놓'은 글이 곧 <칠층산>인 셈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전기적(傳記的)이고, 전기라 하기에는 너무도 소설적이다. 머튼은 성덕에 이르는 길에서 차이고 넘어지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가느다란 빛줄기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그리고 끝까지 붙잡고 나아간 머튼의 영적 고백서는 담담하면서도 진솔하다.  

  

사람 나름이란 말은 맞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어디까지나 다 사람 나름이다. 같은 로만칼라를 하고 있지만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가 있는 반면 콜린 맥클로우의 <가시나무 새>도 나온다. 히치콕 영화 <나는 고백한다>의 로건 신부처럼 신념에 충직한 사제가 있는가 하면 성 추문에 휩싸이는 문제적 성직자도 더러 있다. <울지 마, 톤즈>로 잘 알려진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오지에 희망을 심었으나, 동일한 살레시오회 소속이면서 어떤 신부는 단종을 내치고 자리를 차지한 수양같이 파렴치한 처신을 한 사람도 있었다. 청정 비구가 있는가 하면 불법승 삼보로 대접받으며 시정잡배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승복 입은 모리배도 섞였다. 재정 비리 의혹에 스캔들까지 불거진 조용기 목사뿐인가, 언필칭 정의를 논하는 사제라 하나 괴상하게 턱수염을 기르고 거리에 나선 선동자도 있다. 단, 기도와 관상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시정 한복판에 나설 수 있는 수도자라면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저마다의 내부에서 솟구쳐대는 근원적인 물음표들이 있다. 인간적 고뇌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질문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 평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고찰하게 만드는 칠층산이다. 일단 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아는 것이 퍽 도움이 된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프랑스의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뉴질랜드 태생의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화가였다. 그의 부모, 오웬과 루스는 파리의 한 화가 밑에서 같이 공부하는 중에 만나 결혼했고 그림에 몰두하며 살고자 프랑스 남쪽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다 1차 대전의 전화를 피해 가족은 미국 롱아일랜드로 이주해 그의 유일한 동생인 존 폴이 태어났다.



부모의 영향 탓인지 머튼은 다섯 살 때 이미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영특한 아이였다. 그러나 여섯 살 무렵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그는 지도를 펴놓고 혼자 보물섬 찾기 놀이를 하며 내면으로 빠져든다. 16세 때 아버지마저 타계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사는 양 대륙 사이를 오가며 성장기를 보낸다. 그림 전시회 때문에 곳곳을 떠돌던 아버지는 런던에서 뇌종양으로 숨진다. 당시 열여섯이던 머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었다. 18번째 생일 축하 선물로 받은 여행표와 돈으로 프랑스를 가로질러 로마까지 여행하는 머튼. 초기 교회들과 대성당들을 보고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에 매료되어 처음으로 성경을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방만한 청춘은 기어코 사고를 저지른다. 무책임한 생활방식과 성적 방종과 알코올 탐닉으로 점철된 혼돈의 런던 생활을 그로 인해 청산하고는 미국으로 떠난다. 그 후 컬럼비아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대학교수가 된 그즈음 시와 실험적 소설들을 썼고 재즈에 심취했고 여행을 즐겼다. 그러던 그가 세속적인 모든 쾌락과 명성을 뒤로하고 수도원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에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했다. 더 많은 땅과 자원을 정복하려는 세상의 탐욕스러운 열망을 보면서 머튼은, 이들 모든 소유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라는 하느님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내가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였다고 그는 일기에 썼다.    

 

문학적 재능과 학위와 대학 교수직까지 다 버린 다음 트라피스트회 소속 겟세마니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충만 그 자체였다. 백 명 이상이 모인 수도자 공동체의 단순한 일상, 침묵(수화로 의사소통), 제한된 힘든 노동과 함께 그는 기도로 살았다. 노동과 기도의 생활 중에 하느님을 만난 영적 만족감으로, 고행 속에도 그는 행복했다. 또한 침묵은 단순히 외적인 침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고요를 가리키며 이러한 내적 고요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밑바탕이 됨을 깨닫는다. 머튼은 내적인 고요 가운데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관상'이라고 정의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그 음성에 따른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토머스 머튼은 마침내 1949년 루이스 신부가 되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 창문턱에는 '오직 하느님께만'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의 침묵과 자연의 평화, 그리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녹아들어 가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칠층산>을 출간하고 나서 갑자기 명성을 얻은 토마스 머튼은  계속 글을 써야 했으며, 누구보다 바쁘고 소란스러운 상황과 접하게 된다. 침묵 수행자가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자 그는 더욱더 단순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린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돈이 필요한 가난한 수도원을 위해 그의 文材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오직 하느님께만' 쏟아부었던 열정은 점차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가는 길이 되었다. 그즈음에 수도원의 수도 청원자 수는 몇 배로 불어났다.

   

종파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이 영적 고백록을 읽어가노라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불교의 불성, 노장사상의 도를 만나게 된다. 칠층산은 구원의 여정인 동시에 가톨릭에서 말하는 칠종 죄인 탐식, 인색, 분노, 나태, 음란, 교만, 시기(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세븐 역시도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일곱 가지 죄성을 다뤘다)란 일곱 겹의 완고하고 부패한 의지 혹은 죄성을 이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발견하려면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일곱 개의 산. 삶과 죽음, 고통과 슬픔, 사랑과 두려움, 지혜, 영원 등 무엇이건 직면한 딜레마마다 곧 넘어야 할 산이 아닐까도 싶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았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용서할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 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 때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그분 만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면 족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고

그분의 위로를 갈망할 때

십자가의 침묵처럼

잠잠히 그분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길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토머스 머튼의 침묵의 기도에서>

                         

가톨릭 은수자인 머튼이지만 그는 가톨릭을 넘어 보편적 영성을 향해가는 구도자였다, 그를 기도로 이끈 것은 이냐시오 성인이었다. 그는 혼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에 몰입, 꼬박 한 달 동안 어두운 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성경을 읽으며 묵상했다. "과연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무엇일까"를 참구하면서 말이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살았던 26년 동안 수도원을 떠난 것은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깊이 천착했던 아시아 종교와 만나기 위해 1968년 아시아로 순례를 떠났다가 갑작스러운 감전 사고로 눈을 감는다. 장례 예절의 마지막에 <칠층산>의 끝부분에서 따 온 다음의 문구가 읽혔다. '나는 이 목적을 위하여 너를 창조하였고 너를 프라데스로부터 산 안토닌으로, 오크햄으로, 런던으로, 캠브리지로, 로마로, 뉴욕으로, 콜롬비아로, 성체 성당으로, 성 보나벤투라 성당으로, 겟세마니에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씨토 수도원까지 오게 하였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세 가지 특별한 은사(선물)를 받았다. 수도자로서의 소명, 文才, 정신적으로 충족된 신앙생활이 그것이다. 수도자의 임무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포장한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며 이는 관상의 본질에 속한다 하였던 머튼. 그는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지만 5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평화, 인류 평등, 종교 간의 대화 등 사회적 이슈에 관한 글을 썼다. 그러면서 그는 끓임 없는 기도 속에서 살았다. 또한 글쓰기는 머튼에게 거룩함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가 돼주었다. 그의 고백록 칠층산을 읽으며 마음에 가닿는 곳마다 걸음을 멈추고는 귀한 말씀들을 마음에 되새기며 책에다 수없이 밑줄을 그었다. 하긴 영성에 관련된 책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묵상 거리이다.



'악마는 죄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 은총의 수단은 꺼리도록 만든다.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통해,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로써, 명백함과 본질로써가 아니라 꿈과 정신착란의 환상을 통해 악마는 인간을 그릇되게 한다.' -80p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일체의 현실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130p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성인이라고 칭찬받는 이들은 죄인일 수도 있고, 그들의 빛이란 암흑일 수도 있다.' - 217p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경우에는 그 대신 휠씬 더 유익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확신할 수 있다.'-313p

'누구든지 깊은 내적 생활, 혹은 한층 더 깊은 신비적 기도생활을 하고 아울러 명상의 열매를 타인에게 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말재주가 없어 말로써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 모범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522p-

'어떤 의미로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긴 여행이다. 다른 의미로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 -842p

   

칠층산은 머튼의 동생 존 폴이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끝난다. 머튼의 하나뿐인 혈육인 존 폴은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으나 그의 비행기가 추락,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동생의 젊은 영혼을 기리는 한 편의 시를 썼다. 영성가이기 이전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던 그가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에 붙인 시다.
Where, in what desolate and smokey country,  
Lies your poor body, lost and dead?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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