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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3. 2024

그리움

개구리 소리가 듣고 싶다.

봄밤을 완전 장악해 버리는 그 소리.

달빛 출렁이는 무논에서라면 더 좋겠다. 칠흑의 어둠 속이라도 개의치 않겠다.

쾌청한 한낮보다 어스름밤을 맞아 제 세상인 양 한껏 목청 돋우는 개구리 소리.

  


괄괄 괄괄. 숫제 소리의 소나기다. 소리의 폭포다.

충천하는 활력을 기세 좋게 분출해 대는 그 뱃심.


암팡진 위력으로 천지를 제압하려 드는 그 기개.

쭈뼛거림이 없다. 오만불손할 정도로 도도하고 당차다.

밤의 적요를 마구잡이로 휘젓으며 의기양양히 내지르는 점령군의 함성이다.

일사불란한 힘의 결집인들 대단치 않은가.

마침내 들 전체를 갈아엎을 작정이라도 한 것 같이 와글거리는 소리.

 

그렇게 떼거리로 한밤 지새우는 개구리 소리가 듣고 싶다.

그 소리에 흠뻑 젖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다.

생각하면 싱겁고 어이없는 노릇이지만 이 갈증은 입덧할 때의 막무가내처럼 거의 외곬의 치달림이다. 별일이다.

하고많은 자연의 소리 중에 왜 하필 개구리 소리인가.

어찌 좀 잘 봐주려 해도 도통 고운 구석이 없는 소리, 생짜배기로 시끄럽기만 한 개구리 소리다.

 

그러나 건강하다.

주어진 한 생을 빈틈없이 채우려는 맹렬한 의지에다 지칠 줄 모르는 힘찬 생명력이 미쁘다.

자그만 몸 전체로 살아있음의 기쁨을 열성 다해 노래하는 개구리.

존재 증명의 집념이 그 이상 확고할 수 있을까.

타성에 빠져 매사가 시틋이 여겨지는 근자의 내 일상에 새롭고 강렬한 삶의 의욕을 샘솟게 하는 개구리 소리.

그리하여 처진 어깨 추스르고 활기차게 생활 앞에 서고자 한다.



질주하는 차륜이 뱉어 내는 마찰음이며
울려대는 경적.

온 데 떠다니는 진동의 파장.

신경을 갉다 못해 이명으로 남는 소리소리들.

그렇듯 도시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서는 각이 느껴진다.

딱딱한 직각과 날카로운 예각의 비정함이
화살 되어 마구 날아온다.

자동차 소리에 한나절을 시달리고 나면 더욱 못 견디게 그리운 개구리 소리.

질주하는 차륜이 뱉어 내는 마찰음이며 울려대는 경적. 온 데 떠다니는 진동의 파장.

신경을 갉다 못해 이명으로 남는 소리 소리들.

그렇듯 도시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서는 각이 느껴진다.

딱딱한 직각과 날카로운 예각의 비정함이 화살 되어 마구 날아온다. 방어를 위한 초긴장.

불안한 바람에 품성마저 충동적이고 거칠게 되며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해지는 건 아닐까.

자연히 심성이 삭막해지고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뿐이다.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품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사치인가.


독일의 한 환경의학 보고서에 의하면 거리의 소음은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시키는데 큰 몫을 한다고 하였다.

음악의 위안마저 없었다면 산업사회의 더 많은 사람들은 조현증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들어 인도음악 쪽에 경도되는 내 취향도 우연이 아니리라.

자연에 가장 가까운 리듬이라는 인도의 라가. 그 밖의 신명나는 사물놀이 속 북소리도 좋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처방은 잠시나마 자연 품에 안겨보는 거다.

그리하여 날 선 귀를 순하게 다스리고 충혈된 시선을 맑혀 볼 일이다.



어쨌든 이번 주말에는 만사 제치고 도시를 떠날 참이다.

어디든 개구리 소리 흥건한 촌락에 들어 하룻밤 지새지 않고서는 생병이 날 듯하다.

첨예히 곤두선 신경의 촉수를 가라앉히고 위험수위에 육박해 있는 심신의 노곤을 풀기 위해,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환기시키기 위해, 나는 개구리 소리 와글대는 곳으로 가야만 하겠다.



이른 봄. 한 덩이 우무질이 변해 올챙이 무리가 되고 다시 개구리로 모습 달리해 갈 즈음.

논둑의 들찔레는 연한 순으로 마른버짐 핀 아이들을 불러냈다.

완두콩이 통통히 살찌며 아카시아 주저리가 향을 터뜨리는 신록의 계절.

처마 밑 제비가 새끼를 치고 보리가 팰 무렵이면 아이들은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갇혀 지낸 데 대한 반작용이듯 저마다 용수철처럼 튕겨 밖으로 내달았다.

 

삐삐를 한 줌씩 뽑아 들고 앵두와 오디로 앞자락 후지르며 물오르는 초목 되어 싱그러이 솟구치던 긴 긴 봄 하루.

그때에의 향수 때문인지 모르겠다.

자연에의, 고향에의, 유년에의 그리움 말이다.


잃어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지금은 그들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는 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한 격리나 되는 것처럼 절실함으로 간절함으로 더해 가는 그리움의 度.

 

이 며칠새 나의 안달은 극에 달했다.

성화 부리며 보채는 아이처럼 개구리 소리가 듣고 싶어 마냥 몸살 앓았다.

생생한 그 소리를 듣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나는 개구리 소리를 만나러 떠날 것이다.

가서 개구리의 충만한 생명력을 내게도 전이시켜 보리라.

완전함을 위한 변태의 거듭을 내게도 적용시켜 조심스레 시도해 보리라.

또한 하늘을 날지 못함이나 꽃 위에서 노래하지 못함을 불평할 줄 모르는 자족의 넉넉함을 배워 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은 나를 정결히 세탁하고 충분히 해갈시켜 데리고 오는 일이리라. -89.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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