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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3. 2024

일하고 싶다고요?

오륙 년 전 어느 날. 같은 동네에 사는 한인 부부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육십 반의 그 집 남편은 일주일에 두 번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다. 에 대해 그 집 남편은 불만이 많다. 은행에 오래 근무하다 퇴직한 아내는 아직 충분히 일할만 건만 불평 자심하다고 못마땅해한다. 둘이 진종일 집에서 마주 보느니 잠깐씩 바람도 쐬는 게 좋지 않냐며 내게 슬쩍 응원을 청한다. 우린 둘 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데요, 하자 남자는 별종이라는 듯 날 빤히 쳐다본다. 실제 우리 부부는 건강만 허락된다면 평생현역으로 살겠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아니 은퇴 뒤에도 일을 하고 싶다고요? 노동이 형벌이란 뜻인 건 아시지요? 설마, 그럴 리가요... 찾아보니 맞긴 맞네.


노동이란 인간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활동 전부를 이른다. 한자 뜻풀이로 해석해 보면 힘써(勞:힘쓸 노) 움직인다(動:움직일 동)는 뜻이 된다. 노동의 어원은 속박과 고문이다. 프랑스어 travail의 어원은 라틴어 tri-pilium(3개의 말뚝)이다. 이 '세 개의 말뚝(tripilium)'은 소나 말에게 편자를 박을 때 가축을 묶어 놓는 기구를  이른다. 꼼짝없이 묶여버리는 속박, 그것은 노예의 족쇄와도 같다. travail은 또한  집행인이 죄인을 고문하거나 형벌을 가한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travail에서 하는 사람이란 단어 travailleur(노동자)가 나왔다는데 travailler(일하다)란 직공(artis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을 집행하는 형리, 또는 산모가 진통 중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같이 괴로운 들이다.


노동은,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노역이라 비하시킨다. 동물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노동활동은 필수다. 인간과 달리 동물에겐 생존을 위한 노동은 있지만 의미를 느끼기 위한 노동 같은 건 없다. 심리학계를 이끈 프로이트의 후배 빅터 프랭클 주장은 인간의 원초 욕구는 '의미에의 의지'라 하였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란 말에 나는 절대공감한다.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 정의하였듯 인간은 도구를 써서 노동하는 존재다. 도구와 기술로 자신의 의미와 사명과 생활을 조각해 나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 활동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고 표현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거 아닐지.


나이 든 은퇴지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노는 즐거움도 잠시, 시간이 진력나기만 한 은퇴자는 삶의 가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가 일하는 행복이라고 강조한다. 실직자는 아침에 출근할 곳이 있는 사람이 부럽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라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만큼 일하는 기쁨과 보람이 크기에 노역의 힘듦 자체마저 슬그머니 상쇄된다. 일을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는 각자 생각과 의지에 달렸다. 노년일수록 쓸데없는 근심 걱정과 스트레스로부터 놓여나기 위해서라도 일을 가져야 하며 건강하기 위해, 활기찬 삶이기 위해, 품위 있게 늙어가기 위해서도 적절한 일은 해야 한다. 일을 노년의 다정한 친구이자 조력자 삼아 지낸다면 고독감 따위 들어설 자리란 없다. 결국 신이 주신 축복을 누릴 자격 여부는 자신이 여하한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캘빈의 예정조화설에서는  노동을 인간의 의무라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일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나 로마인에게 노동은 인간의 비참함을 표현하는 것일 뿐, 인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게 아니었다. 조선조 사대부들은 땀 흘려 일하는 자체를 경시할 정도가 아니라 아랫것들이나 하는 걸로 치부하고 천시해 왔다. 그렇듯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노동은 고되고 힘든 데다 고통스럽고 비천한 것으로 격하돼 주로 노예들이 도맡았다.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이던 노동의 개념은 근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비로소 바뀌었다. 노동이 긍정적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던 것. 체면 따위 구애받지 말고 허드렛일이라도 소일거리 삼아 규칙적으로 한다면 노후에 건강과 용돈은 자동으로 따라온다.


중세 때 성당 신축 공사장에서 세 석공이 부지런히 끌질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세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거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첫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보다시피 돈 벌고 있수다." 둘째 인부의 대답은 "돌 깎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인부가 대답하기를 "하느님 집을 짓고 있지요." 고된 노동이 아닌 보람과 긍지로 돌을 다듬는 그의 얼굴에는 틀림없이 천상의 미소가 서려있었을 게다. 아마도 그의 망치질은 가벼이 춤추듯 리드미컬하였으리라. 마찬가지로 마추픽추 일구어 나가던 잉카인들도 먼 데서 돌 옮겨 나르고 일일이 다듬는 노동을 버겁다 여기지 않고 기꺼이 신께 자신의 일손을 봉헌했으리라. 반면 목화밭의 노예에게 노동은 죽는 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다름 아니었을 터다.


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다. 일을 꼭 수고스러운 노동이자 밥벌이라 여기지 말고 세 번째 석공 같은 자세로 임한다면 노동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은 형벌이고 고통이다.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보람 느끼며 즐겁게 하는 편이 현명한 노릇. 나이 들어 은퇴한 경우, 정기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적절한 취미활동이나 사회봉사 등 소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기나긴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누구에게나 각자 나름대로의 재능과 은사를 하느님은 주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에 맞는 일을 할 때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자기가 좋아하고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면 누구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그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무슨 일이건 건강히 임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축복, 무료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역할 없이 지내는 것도 고역이다.



이제는 자타가 인정하는 백세시대다. 은퇴 후 길게는 사오십 년, 짧더라도 이삼십 년을 살아내야 한다. 무수한 여백의 그 시간을 여하히 보낼 것인가.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문화가정 심리상담사 자격을 취득했다. 타국살이 고충을 십 분 이해하기에 동남아에서 온 그들을 돕고 싶어서였다.  문화해설사가 취향에 맞지만 65세까지만 신청 가능. 나이 제한 없는 노인 일자리를 찾아보다가 다문화가정 지원 한국어교사를 이태 넘어했다.(며칠째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이유, 참조) 나름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면서 말이다. 말 설고 물 설은 타국에 건너와 어렵사리 정착하려는 이들을 손잡아 이끌어주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니까.언어와 풍습과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느끼는 이질감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스럽게 적응하도록 도와주는데 의미가 있으니까. 그러다 실내를 벗어나 야외활동을 하고자 요즘은 곶자왈 매니저를 택해 하루 세 시간씩 매일 일터로 간다. 칠십도 어언 후반부로 꺾였지만 팔십 대가 되더라도 심신 건강하면 현역으로 살 작정이다. 그런 나에게 아들은, 무리하게 매이는 일은 그만두시라고 권하지만, 천만에다. 이 나이에 사회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과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기에 진심 감사할 따름이다.



심리학자인 앨버트 반두라의 이론인 Self-efficacy, 자기효능감이란 게 있다.노화가 진행되면 여러 기능과 능력이 약화되지만 그럼에도 쇠퇴하지 않는 유일한 기능은 자기효능감이라고. 자기효능감은 자신의 능력과 효율성에 대한 자신감이자 자기 확신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는 당당한 신념과 성취에 대한 확신, 이 같은 자기효능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자기효능감을 충분히 활용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 특히 노년기 삶의  질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자신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확고한 믿음, 곧 자신이 어떤 일을 잘 해낼 수 있고 잘할 수 있다는 확신감을 갖도록 항시 스스로의 역량을 연마하고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겠다. 맡겨진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감이 있다면 그 분야에 직접 도전해 볼 일이다.
보통은 나이가 들수록 심리적으로 위축돼 신체활동이나 사회활동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는 이도 있으나 남은 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매사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의 변곡점을 재도약의 기회로 만든다. 따라서 노년이 되어도 건강만 허락된다면 자기효능감을 보다 극대화시켜 나갈 수 있다. 분명 살아온 연륜만치의 누적된 지혜와 경험이 있는 노인은 그 나름 값진 자원이 아닌가 말이다.


고령화 사회다. 나이 들었어도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갖고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만족스럽게 인생의 의미를 채워나갈 수 있기를. 일을 한다는 자긍심에 더해 하루하루 삶의 보람을 느끼며 즐겁고 재미있게 생활할 수 있기를. 오늘 젊은이도 미구에 노인이 된다. 이에 대비한 준비 역시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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