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폭설로 그간 한라산을 넘나드는 도로 전부가 통제됐다.
오늘은 오일육도로와 천백도로를 제외한 일부 도로가 열렸기에 남조로에 위치한 돌문화공원으로 달렸다.
근래 들어 한라산 일원이 대단한 적설량을 보인 터라 산행은 어림도 없으므로 그렇다면 꿩대신 닭이다.
한라산 품섶에 펼쳐진 30여 만평의 설원이라니.
목장지도 아니고 스키장처럼 경사진 산록도 아니면서 중산간 완만한 평지에 마련된 돌문화공원이 그곳이다.
제주도에 와서 여기저기 골프장이 하도 많아 제주땅이 넓긴 너른가보다 했다.
그러다, 제주가 생각보다 매우 큰 섬이라는 걸 재삼 실감한 곳이 돌문화공원이었다.
걷기라면 자신 있는데 이곳에서만은 돌아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전체를 한꺼번에 다 섭렵하질 못했다.
이번에는 돌박물관이나 갤러리는 들리지 않기로 했다.
오직 야외에서 까만 현무암과 백설이 조응하며 빚어내는 흑백화폭만을 감상하기로.
의외로 한파 속 눈바람 마다치 않고 찾아온 방문객이 꽤 된다.
드넓은 대지에 조성된 세 코스의 탐방로.
1코스는 전설의 숲길을 지나 돌박물관, 하늘연못, 오백장군 갤러리로 이어진다.
2코스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돌문화를 보여주는 야외전시장이다.
3코스는 전통가옥들을 재현하여 옛 제주인들의 민속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전설을 테마로 한, 제주에서만이 접할 수 있는 독특한 거석문화 경연장인 이곳이다.
이날 돌문화공원은 탐방객 모두에게 한폭의 거대한 수묵담채화를 선물해주었다.
돌문화공원을 보다 깊이 느껴보려면 먼저 설문대할망 설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제주도를 만든 여신인 설문대할망은 한라산보다도 덩치가 크며 자식을 오백 명이나 뒀다고 한다.
심한 흉년이 든 어느 해, 할망이 자기 자식들이 먹을 죽을 끓이다가 가마솥에 빠져 죽었다고.
끔찍한 얘기 같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거미처럼 배곯는 새끼를 살리려고 먹이가 됐다는 해석도 있다.
자식들이 돌아와 맛있는 죽을 먹었지만 어멍이 안 보이는 걸 이상하게 여긴 막내만 먹지 않았다는데.
곧 가마솥 바닥에 남은 어멍 뼈를 보곤 형제들과 지낼 수 없다며 막내는 차귀섬으로 들어가 바위로 변했고.
남은 형제들은 그대로 돌이 돼 버렸는데 바로 한라산 영실계곡의 오백장군바위가 그들이라는 전설이 그것.
제주돌문화공원의 또 하나 상징인 하늘연못 앞이다.
거대한 원형 연못 속에 하늘이 비쳐 이름 그대로 하늘인지 연못인지, 몽환적인 절경을 선사하는 곳이다.
지금은 꽁꽁 얼어붙은 빙판이지만 바농오름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있던 새파란 호수는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이 연못은 돌박물관 옥상에 설치된 것으로 방문객들이 직접 호수로 들어가 멋진 사진을 남기는 명소다.
지름 40m, 둘레 125m의 큰 연못이나, 입구에 비치된 장화를 신고 들어가는 걸로 봐 깊이는 얕은 편이겠다.
전에 한번 무용제가 열리는 걸 봤을 때 정말 신비스럽고 놀라웠는데, 연극이나 연주회 등을 위한 수상무대 역할도 한다고.
바람이 회오리치며 빙판을 휘감아 오르자 싸대기 치듯 얼굴에 흩뿌려지는 서릿발 같은 눈송이들.
목화송이처럼 포실포실한 느낌이긴 커녕 잘디 잔 얼음조각 같은 서늘하고 섬뜩한 감촉이었다.
그 서슬에 흠칫 놀라 쫓기듯 하늘연못을 떠나버렸다.
인류에게 되돌아오고 있다는 미세플라스틱의 역습이 그러할까.
잿빛 음산한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마구 날렸다.
저만치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일가족들 모습은 딴 세상 풍경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큰길은 제설작업을 마쳤으나 샛길은 아직 뚫리지 않았다.
대지가 워낙 너른 만큼 어디든 거의가 아무도 걷지 않은 처녀지였다.
그렇다면 길은, 미답의 눈 위에 첫 발자국 내며 걸으면 생기는 눈길이다.
누구나 맘대로 자유로이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진작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사방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와 강풍 대비해 따뜻한 방한복에 귀를 덮는 털모자와 장갑도 갖췄다.
차륜에 다져진 미끄러운 길도 있고 거의가 푹푹 빠지는 눈길일 터라 평지임에도 아이젠은 물론 스패츠도 준비했다.
그럼에도 사진 찍는 잠시동안 발끝 시립고 손이 곱더니 발갛게 얼었다.
아마 누가 시켜서 이런 일 해야 한다면 난리부터 칠 테고 아예 엄두도 못 내리라.
저 좋아서 하는 짓이니 신바람 나 추운 줄도 모르고, 아니 추워도 참으며 엄동설한 날씨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하긴 뭐 지난여름 기세 맹렬하던 염제의 횡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박타박 올레길 걸었듯이.
스스로 즐겨 취하는 도락에 빠지면 젊고 늙고도 없나 보다.
나잇값은커녕..... 돌아오면서 자신에게 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푼푼하니 거나해진 심사로야 아무도 부럽지가 않았다.
이만한 수묵담채화 누구나 다 지녀본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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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 064-710-77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