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스트 타운에 갔다가

2014

by 무량화


일 주간의 서부 트래킹을 마무리 지은 곳은 고스트 타운이다.

애초엔 일박하는 라스베이거스 베네치안 호텔에서 베가스 분위기 즐기며 여독을 풀기로 했다

다음날은 그곳 수영장에서 느긋하니 쉬면서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려 했다.

도착하자마자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불빛에 놀란 조카.


야하기 그지없는 차림을 한 젊은 애들이 넘쳐나는
라스베이거스의 밤 문화를 접한 초행의 조카는 말도 안 돼! 기가 막혀~소리만 내동 연발했다.

"세상에~며칠간 영혼을 맑게 정화시켜놓고서, 더군다나 애들 데리고 하필 이런 데서 묵어야 해?"

난리도 아닌 조카는 불편한 얼굴로 계속 구시렁거린다.

자녀들과 머물기 좋은 시설을 갖춘 호텔도 있노라 했는데 굳이 여기로 정하더니, ㅉ!


미국 친구 말만 듣고 잘난 척 최신식 호텔이라며 자기가 덜커덩 예약해 놓고선 나보고 어쩌라구~



애들 교육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그녀라 훈육상 응당 좋은 것, 바른 것만 보여주고 싶겠지만 불야성을 이룬 밤의 라스베이거스가 어디 그런가.

요즘 같은 세월에 아무리 나쁜 거 안 보여주려 주의하며 숨기고 가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어차피 인터넷 검색 한 번이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세상이다.

컴 게임을 많이 하면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고 철석같이 믿을 정도로 애들이 아직은 어려서 순진하기 망정이지.

암만 그래봤자 조금 더 자라 사춘기만 되면 알 거 다 알게 되건만.

그래도 엄마 마음에 사방 어디도 눈길 줄 곳 없이 요상야릇한 환락의 도시가 너무도 민망, 황당하였나 보다.

어느 부모라도 '우리 아기 남의 눈에 꽃이 되고 잎이 되게 해 주십사', '우리 아이 세상에 필요한 도움 주는 유익한 사람 되게 해 주십사' 빌고 또 비니까.



황황히 밤의 라스베이거스를 뒤로하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모든 객실이 스위트룸으로 꾸며진 잠자리의 호사를 누렸다.

이튿날 드넓은 수영장과 자쿠지에서 겨우 점수를 만회하고 곤돌라로 한 번 더 기분전환을 시켰지만 여전히 궁시렁대는 조카.

라스베이거스에서의 네거티브 공세로부터 벗어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분위기 전혀 다른 고스트 타운만은 무조건 들르기로 했다.

이번엔 제목도 그럴싸한 역사탐방 시간을 갖는 것이다.

조카 아들인 4학년 짜리가 때마침 학교에서 한참 미션에 대한 미국사를 배우는 중이었다.

봄에 조카가 사는 샌프란을 방문했을 적이다.


조카사위가 가족과 함께 파견근무를 나와 있는 샌프란시스코.


내가 앞장서서 그전에 다녀온 돌로레스 미션을 둘러보러 가자고 하자 꼬맹이들이 흥분하다시피 좋아라 했었다.

켈리코 은광촌 역시 서부 개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니 현장학습 장소로도 마침맞겠다.



나로선 몇 번째 방문인 이번에도 입장료가 필요 없었다.

지난번 데스벨리 다녀오다가 들렸을 때도 해가 기웃한 저녁 무렵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우연히도 또다시 매표소 근무자가 일을 마친 시각에 도착하게 돼서다.

귀갓길이 늦어진 것은 베네치안 호텔 수영장에서 본전 몽탕 뽑을 만치 이 풀 저 풀 옮겨 다니며
애어른 할 거 없이 아주 맘껏 시간 잊고 놀아서이다.ㅎ

사막에 노을빛이 내릴락 말락 한 늦은 시각이라 매표소 문이 닫혔기에 고스트 타운을 본의 아니게 거듭 무료로 방문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긴 여행 끝이라서 피곤한지, 오직 한 곳 열린 기념품 가게 구경에만 흥미를 느낄 뿐 걷기를 주저하며 발걸음이 느려터졌다.

나야 이미 전에 구석구석 알뜰하게 둘러본 곳.

문화유적 해설사 겸 가이드를 자청했으나 따라나서려 들지를 않는다.



쓸모없이 버려진 마을이 사막 한가운데의 특별한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겔리코 고스트 타운.

서부 개척시대인 1881년 일대에 은광이 개발되면서 황금기에는 5백여 개에 이르는 광산이 있었던 전형적인 탄광촌이다.

한창때엔 3천여 명이 살던 마을로 타운홀 대장간 식당 술집 상점 학교 소방서 교회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러다 1896년 갑작스레 은 가격이 온스당 $1.31에서 63센트, 반값으로 폭락하였다.

채굴해 봐야 타산이 맞지 않으니 폐광이 늘게 되고 사람들이 떠나면서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미 1990년 초에는 마을이 텅 비며 절로 유령마을이 되고 말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는 저마다의 한때 화양연화는 속절없이 흘러가버린다.

화려한 영화도 잠시, 빛나는 젊음도 순간이다.

成住壞空 말 그대로 형체 있는 모든 건 다 늙고 낡아 쇠락해지고 삭아가게 마련이다.

마침내 하릴없이 버려져 잊히거나 스러지는 게 비단 폐광뿐인가.

나이 들어 일선에서 물러나면 자칫 별 볼일 없는 신세로 쭈그러들기 십상이다.

그 이전, 다져놓은 능력을 유효 적절히 활용하여 인생 이모작을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미리 마련해둬야 한다.

인간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녹슬게 하지 말라고, 늦은 때란 없다고, 황혼녘 한적한 고스트 타운이 일깨워준다.

우연찮게 얻은 아름찬 수확이다.



버려지다시피 한 채 삭아가던 이곳의 가치를, 테마공원인 넛츠베리 팜을 운영하던 월터 넛츠란 사업가가 알아봤다.

1966년에 일대를 사들여서 전성기의 은광촌 사진을 기초로 시설물을 재복원하고 마을을 개발시켜서 샌버나디노 카운티에 기증,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서부의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반짝 생기를 주는 켈리코 고스트 타운이란 이름으로 민속촌 비슷한 관광지가 되었다.

한편 한국 민속촌은 그와 반대로 어물쩍 사유물이 되더니 얼마 전엔 증여세 탈루 혐의로 시끄럽기까지 했으니.


정작 대한민국은 타산지석 삼을 해외 사례가 무수하건만 앞선 선진국으로부터 배울 건 안 배워가고 괴상한 풍조나 과소비 작태만 골라 가져가는지.


국가 행정만이 아니라 공공선을 지향하는 기업인도 드물고.


한편, 요즘 여기는 홍수를 이루다시피 불어난 중국인 관광객들이 특히 필수 방문 코스처럼 여긴다는데.

그 까닭은 당시 가난한 중국인 노동자들의 애달픈 비사가 서린 때문이다.

예나 이제나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중국인답게 금문교 건설과 대륙횡단철도 공사에 대거 쿨리가 참여했듯이.

흙먼지뿐인 열사의 찌는듯한 갱도 속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처럼 은을 캐다가 타국만리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마을 입구 공동묘지에 묻혔다.

물설고 말도 선 이국땅 모래벌에 누운 고혼들이 밤마다 구천을 헤매 다니며 울음 울었을 테고.

안 그래도 객사한 원혼들인 중국 강시들의 곡소리라 목청도 컸을 거라 동네가 고스트 타운이 되고도 남을만하다.

그래서인지 중국 관광객들은 여기에 들러 거의가 단체로 묘지 참배를 하고 간다는 것이다.

지난번 벌건 산자락 움집 같은 토굴들을 둘러보다가 주변 곳곳에서 청화문이 그려진 사기 파편을 보았는데, 중국인들의 식기였으리라 쉽사리 짐작이 들 만큼 중국 노무자가 다수였다는 은광이다.

순전히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에 어렵사리 뿌리를 내린 화교들.

그러고 보니 전후의 피폐한 시기라 맨손뿐, 국제경쟁력 제로 상태였던 60년대 후반에
나라 위해 외화벌이꾼으로 나서서 경제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한 독일 광부가 겹쳐진다.

누군가가 희생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어주어야만 더 많은 씨앗을 거두게 된다 하였던가.



움집들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 사금파리를 보자 해도 힘들어 싫다 하니 대로변 대장간과 은 제련 장비만 훑어보고 사진 몇 장 찍다가 발길을 돌렸다.

갱도 속까지 둘러볼 수 있는 관광용 객차도 멎었고 카우보이 아저씨도 보이지 않는 저물녘.

그래도 폐광촌에 들르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거푸 든다.

한때 은성하던 타운의 전성기는 끝났으나 이렇듯 남겨진 여건을 십분 활용하여 또 다른 값진 역할을 되찾아내지 않았는가.

젊음의 세월은 가고 허망히 나이 들었을망정 다시 무언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는 생산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 늦은 때란 없다.

그래, 은퇴는 곰삭은 경륜이 뒷받침해 주는 제2막 인생의 출발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그렇게 현역으로 건강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고 싶다는 기원을 하늘에 새긴다.

바람결 소슬해진 저물녘 고스트 타운.

오동통 살찐 길고양이들만 슬슬 배회하며 조금 남은 석양빛에 잔등을 덥히는 걸 보니 고양이의 여름은 사흘이란 말이 맞긴 맞나 보다.

환락의 도시에서 흐려진 눈빛을 사막 가로질러온 바람결에 맑게 헹구며 느릿느릿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환청일까.

산모롱이에서 또가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휘파람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2014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