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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 캐년 트레킹

by 무량화

이태전 손주와 다녀온 브라이스 캐년을 다시 찾았다.


네댓 번은 다녀왔으나 매번 패키지여행이라 명소마다 눈도장만 겨우 찍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일 주간의 그랜드 서클을 도는 코스 중에 들른 브라이스 캐년이다.


특히나 브라이스 캐년의 속살을 더듬는 트래킹 위주 여행길이며 동행은 친정식구들이다.



미리미리 준비를 한다고 하긴 했으나 일부 사전 정보가 부족해 미진한 구석도 없잖았지만 암튼.


파웰댐에서 콜로라도 협곡 급류를 탄다는 래프팅은 예약이 안 돼 아쉽게도 훗날로 미루고.

페이지에서의 이틀을 마무리한 다음 유타로 넘어온 것은 오후 무렵.

구성 멤버가 아이와 노년층이므로 뭐든 서두름 없이 느릿느릿하게, 가 모토다.

시간에 매이지 않는 자유여행은 이렇듯 여유로워 좋다.



우리 팀의 자타칭 가이드는 자못 뻐기며 유세까지 자심한 사십 대의 조카.

그녀의 두 아들과 그녀의 친정 부모인 울 언니 형부와 함께하는 여정이다.

샌프란에서 차를 몰고 우리집에 들러 이틀간 쉬며 컨디션 조율을 한 후 나선 길.

난생처음인 사막횡단 여행에 들뜬 조카 대신
시내를 제외하곤 주로 한국에서 오신 형부가 운전은 도맡다시피 했다.

거칠 것 없는 빤한 사막길이라 70대 중반의 형부도 부담없이 편안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신들의 정원이라는 브라이스 캐년은 여전히 내 눈엔 신들의 궁전으로 비쳤다.

핑크와 주황색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민 어여쁜 궁전에 사는 신은 여신일 것 같았다.

첫날은 포인트뷰에서 노을 속에 시시각각 스러져가는 캐년의 전체모습만 조망했다.

저녁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인 별자리 관측에 참가하여 밤송이 같은 별무리들을 보았다.

덕분에 낭만어린 '별밤'의 추억하나 간만에 보태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역시 느지막하게 기상.

각자 배낭에 제 몫의 물과 오이를 챙긴 다음 제반 채비를 갖추고는 눈부신 태양아래 섰다.

이날이야말로 본격 트래킹을 위한 날이다.

그랜드캐년에서는 거친 바람에다 장시간 운전에 지친 나머지 최단 거리를 택한 트래킹이라 겨우 흉내만 냈을 뿐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오금 저리던 호슈밴드에서야 고작 30여분 걸은 게 전부다.


자매끼리 같이 여행 다니는 게 꿈이었다는 언니, 이참에 소원풀이를 했다고.

브라이스캐년 국립공원 표지 앞에 앉아 기념사진 인증샷 한컷 날리고는 곧장 직진.

방문객 센터에서 우리 일행의 구성원들을 둘러보고는 적당한 코스를 골라줬다.


친절히 짚어준 대로 두 시간 여가 소요되는 어렵지 않은 무난한 길을 우린 택하기로 했다.

온통 붉은색 바위군들이 기기묘묘하게 둘러서 파노라마로 폁쳐진 저 아래 캐년.

지그재그로 내려가는 길은 미세한 모래흙이 깔려있어 매우 미끄러웠다.

언제 쓰일까 싶잖던 스틱이 요긴히 제 역할을 다했고 우리는 드디어 신들의 궁전 안으로 접어들었다.


멀찍이 내려다보는 것과 직접 품속으로 들어와 안겨보는 것은 느낌이 여러모로 달랐다.

혼연일체 표현 그대로 하나 되는, 한덩어리로 녹아드는 기분이 든달까.

깊고깊어 내밀한 곳, 일종의 엑스터시 상태로 용암 뜨거이 흘러들었던 그 한가운데로 주저없이 빨려 들어갔다.

여신의 부드러운 속살을 헤짚으며 혼몽 중에 내려갔으니 누군들 지칠 리야...




정비석의 산정무한이란 글이 생각났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痒)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 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금강산에 이르러 감탄사를 연발하며 춤을 추어대던 그의 현란한 수식어들.

그곳 만물상을 가본 적은 없으나 이만큼 무궁무진한 만물상이 또 있겠나 싶었다.


한 시간쯤 붉은 바위 사이 그늘 따라 걸어 내려오니 길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

삼거리에서 다시 되짚어 올라가는 길.


좀 더 멀리 돌아 캐년을 감싸안는 길도 있어 혼자라면 선뜻 택할 길이나, 그중에서 과히 힘들지 않으면서도 주변 풍치가 변화무쌍하다는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갈림길에서 땀도 들일 겸 고사목 등걸에 앉아 쉬면서 오이를 깎아먹었다.

한국에서도 산행시마다 잊지 않고 챙겨가던 오이다.

흠뻑 땀 흘린 뒤 시원한 물도 감로수가 되겠지만 이때의 싱그러운 오이맛이란 아는 이만 안다.



오이 하나로도 되찾아지는 생기와 활력.

저만치 올려다 보이는 산정이 아득한가 싶지만 새 기운 가득 채워졌으니 컨디션 다들 오케이~다.


옆에 주욱 시립하며 따르는 기기묘묘한 바위와 푸르른 솔바람이 있어 별로 힘든 줄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장딴지에 불끈 힘이 돋는다.



연신 변화무쌍한 비경들을 준비하고 줄지어 기다리는 봉우리들.

바닷속 붉은 산호군단이 바람 쐬러 나온 듯도 하고,

불가마에서 여러 번 담금질한 쇳덩어리이 듯 놋내가 나기도 하고.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벌건 마그마가 흘러내리다 멈춘 듯 어디서나 날 것의 에네르기가 철철 넘쳐난다.



한갓진 숲길이 끝나니 이번엔 미로 같은 조붓한 동굴이 맞아준다.

앤털롭캐년에서 인파에 밀려 놓쳐버린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가 여기서 기다린다.

말을 잃고 넋마저 떠나보낸 채 단지 느낌표 하나만 가만히 내려놓는다.

오.......!

하늘에 이르는 천국문 앞에 서면 아마도 빛부신 이런 광채가 뿜어져 나올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 향해 염원을 모아 돌탑을 쌓는가.

돌탑으로 이루어진 마이산이야 그로 인해 유명해진 곳.

미국에서 인상에 선연히 남는 돌탑으로는
화산 폭발로 민둥산이 된 센트헬레나 정상에서 만난 거친 돌탑이다.

호슈밴드를 둘러싼 돌산 여기저기에서 본 돌탑 중 어느 하나에 내 기원도 더불어 올려놓고 왔더랬지.



첫 외국여행이었던 오래 전의 유럽.

피사탑에서 바라본 이태리 하늘과 천사만 바다와 로마의 아피아 가도와 아비뇽 성벽과 남프랑스 해바라기밭이 이렇듯 극명한 색채대비로 어지럼증을 일으켰었다.

그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어서인가.


두터운 빙판 금가듯 브라이스캐년 암벽에 쨍하니 되울린다.



모처럼 제대로 땀을 흘린 만족스러운 이번 트래킹.

사실 모자가 필요없을 정도로 바위그늘이 계속 이어지는가 하면 솔바람까지 살랑거려 무덥지 않은 가운데 아주 쾌적하게 걸었다.


누리 만년 무궁히 쌓아온 일월의 깊이를 안고
묵묵히 침묵하는 캐년 머리 위로 찰나에 빗금을 그으며 무한 시공을 가로지르는 은빛 비행운.

산뜻하면서도 가볍게 하얀 화살 한 대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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