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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종낭꽃 즈려밟으며

by 무량화


종낭꽃이 시나브로 지고 있었다.

그동안 연일 비 내려 숲길 걷지 못한 사이, 오월 맑은 새소리에 화음 넣던 하얀 종소리 저 혼자 스러져갔다.

귀엽고도 맑은 얼굴임에도 꽃말대로 겸손히 고개 숙여 자세 낮춘 순백의 꽃 종낭꽃.

해마다 종낭꽃 새하얗게 조로롬 피어나 향기 스며들 즈음이면, 일부러 때죽나무 아래 오래도록 서있곤 했는데.

어느새 흩날리는 낙화, 자연의 섭리는 우릴 맥없이 기다려줄 만큼 한가롭지 않다.

시간은 강물처럼 무심히 우리 곁을 흘러 흘러 가느니.



종낭은 때죽나무의 제주도식 이름이다.

미국식 이름은 스노벨이다.

종을 닮은 꽃이 피는 낭구라 해서 종낭, 마치 조롱조롱 매단 조그만 흰 종 같대서 스노벨.

실상과 이름이 아주 흡사하다.

누구라도 이 꽃을 찬찬히 들여다봤다면 금방 수긍이 가리라.

긴 꽃대에 종 모양 꽃이 하얗게 피어나 신록 숲에 향기 풀어내는 이 나무.

근데 육지에선 하필 왜 때죽나무라 부를까.

풋열매를 갈아서 계곡에 풀면 물고기들이 잠시 기절하여 떼거리로 뜰 때 고기를 잡는 방식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긴 화승총을 쓰던 예전엔 이 열매를 짓이겨 화약으로 썼다고도 하니 주성분인 '에고사포닌'이 독성 제법 강했던 모양이다.

냇가에서 천렵 즐기는 시대도, 화승총에 의지하던 시절도 지났는데 여전 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름이라니.

내가 때죽나무라면 개명시켜 달라고 떼쓰겠지만 종낭은 그저 오월마다 흰 꽃 향기로이 피고 질 따름이다.

앞으론 나부터 이 나무를 종낭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때죽나무엔 언제부터인가 엄마 모습이 어려있고 거기선 엄마 음성도 들린다.

부산 수영강가 배산 근처 아파트에 살 적이다.

어쩌다 딸네 집에 오신 엄마는 아침마다 손녀를 앞세우고 배산 자락 숲으로 올라갔다.

겸상하기 왠지 편편찮은 사위라 출근할 때까지 자릴 떠, 산자락에 핀 야생화며 나무에 관한 얘기를 손녀에게 들려주곤 했다.

산모기에 물려 벌게진 종아리를 보여주며 약 발라달라고 집으로 쫓아온 딸아이,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오전반 오후 반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딸내미가 고기 잡는 꽃이 폈다며 내 손 이끌고 부리나케 산으로 달렸다.

할머니 젊어서는, 때죽나무 열매 불려둔 물에 흰옷 담가뒀다 빨면 묵은 때가 잘 빠졌다고도 했단다.

신록이 녹음으로 익어가는 그날 숲에선 아뜩할 정도로 향기로운 내음이 번져났다.

때죽나무에 핀 꽃 향이 은은한 그리움이듯 아련하니 좋은 걸 처음으로 느꼈다.

하얀 꽃이 피어난 그 나무 아래 서있던 엄마는 모기를 쫓으려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순간, 소금물이 튄 듯 눈이 쓰리며 가슴이 아려왔다.


요새야 그렇지도 않지만 전시대 사조는 아들밥은 앉아 먹고 딸네 밥은 서서 먹는다 했다.


엄마가 아들에 대한 소망탑 이루지 못하게 된 근원을 짚어나가다 보면 이르게 되는 어떤 존재.


뭍이나 섬이나 종낭꽃 필 무렵이면 신호처럼 모기가 성하기 시작한다.



오래간만에 청명한 날씨라 산으로 향했다.

한라산 품섶마다 종낭이 지천, 그래서 종낭꿀이 흔했구나 여겨져 고개 주억거렸다.

한동안 숲에 그윽한 향훈 자욱했으련만 연일 내리던 비,

너에게로 오는 길은 그렇게 막혔더란다.

혹여 서운했을까, 혼잣소리 흘려본다.

하늘 푸르게 갠 오늘에사 널 보러 이리 달려왔단다.

시답잖은 너스레 떨며 걷는 숲길, 무성한 나뭇잎 새새로 햇살 어룽져 빛 무늬 아롱다롱 그려냈다.

산속 어디나 길섶마다 온데 종낭꽃은 하이야니 깔려 있었다.

길가만이 아니라 풀숲에도 바윗전에도 종낭 꽃잎 흥건했다.

데크 양쪽 가를 따라 누워있는 꽃송이, 백설 내린 양 희게 덮여있었다.

발치 흙바닥에 떨어진 다섯 장 꽃잎의 하얀 꽃은 그 자체가 땅에 내린 은별 같았다.

나름의 결실 남기고 사명 다 하면 무엇이나 저처럼 고요히 흙으로 돌아가리니.

엊그제라도 올 수 있었더라면 송이째 떨어지며 흩날리는 꽃 세례 받았으련만...

대신 꽃잎 즈려밟으며 우리는 종일 꽃길만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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