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얼마 전 LA에 나갔다가 한인타운의 한 서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시간 여유가 있기에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한국도서 일부가 할인판매 중이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책을 몇 권 샀다. 집에 와 은희경의 책부터 읽었다. 익숙한 주제임에도 젊은 세대의 필체는 어딘가 모르게 생경하니 당혹스러웠다. 그 후 한동안은 영화에 꽂혀 하루에 두서너 편의 외화에 몰입했었다. 책은 그동안 까무룩 잊혀지고 있었다. 세월없이 빠져들었던 영화에 질려들어 제풀에 물릴 즈음, 비로소 그때 사온 책이 생각났다.
2003년 이야기의 마왕으로 등극하며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탄 천명관의 첫 소설집. 눈길을 끄는 표제만 보고 무턱대고 사들고 온 '고래'를 펼쳐 들었다. 여태껏 보아 온 소설과는 다른- 비릿하니 날 것 같고 생짜 같지만 농익은- 이 소설을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읽어내자니 일단 낯설기에 어리둥절해졌다. 신화적, 설화적 세계에 가까운 천태만상의 괴담과 기담의 성찬을 강력한 말빨로 거침없이 이끌고 나간 내공에 흠칫했다. 반면 시정잡배들이나 입에 올릴법한 19금 너절하고 역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져 민망감이 들며 쓰레기 냄새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제도권 교육을 통해 글쓰기를 배운 바 없는 늦깎이 소설가인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법으로 종횡무진 소설을 써 내렸다. 일반적 소설의 작법, 그 테두리 바깥에 있었으니 순진한 독자야 혼란스럴만도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신인작가의 산실인 ‘문학동네소설상’이 또 한 명의 걸출한 대형 신인을 선보이게 되었다며 온통 극찬 일색이었다. 한 문학평론가는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꾼의 입담에 힘입어 소설은 엄격한 형식의 규제를 뚫고 민담과 전설에다 판타지 요소까지 뒤섞은 기묘한 세계를 펼쳐냄으로 거대한 서사에 목말랐던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줬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줄창 5~60년대 만화방에 꽂혔던 흥미 위주의 '야담과 실화'라는, 온갖 괴담을 통속적 욕망으로 버무린 성인잡지를 떠올리게 했다. 당시 우리야 '학원'이나 봤지만 표지부터 야하니 선정적이었던 '아리랑' 등 도색잡지도 널려있는 만화방이었다. 비평서인 사상계가 먹물 든 계층이 읽는 월간지였다면 문학청년은 '현대문학'을, 언니들은 '여원'을 구독하던 시절이었다. 어깨너머로 스리슬쩍 훔쳐봤던지 어쨌거나 소설 '고래'는 야담과 실화를 펴놓고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후일 영국의 부커상 후보로도 오른 책인데 말이다.
거부감이 강하게 일면서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굉장한 흡인력으로 책장을 넘기게 만들어 이틀 밤낮, 결말은 물론 심사평까지 꼼꼼스레 읽어치웠다. 이상야릇하고 허무맹랑한 주술에서 빠져나오고도 한참, 입맛은 왠지 찝찝하니 개운치 않았다. 얼른 그 상태를 희석시켜 줄 기분전환용 책을 펼 필요를 느꼈다. 추리소설이라 밝은 내용은 아닐 것 같지만 연달아서 '화차'를 집어 들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일본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쓴 스릴러물이다. 제목인 화차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지옥으로 실어 나르는 불수레'를 뜻한다. 거대 자본주의를 기초로 이루어진 현대 신용사회 속에서 망가져가는 개개인의 어두운 이면을 그렸다. 현대인의 필수품처럼 되어 있는 신용카드, 통신판매, 내 집 마련을 위한 대출 등 편의를 제공해 주는 것들이 잘못하면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소설이다.
부자로 살진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아직 남의 빚을 써본 적은 없다. 늘푼수없이 고지식한 탓에 젊어서도 월부나 계라는 건 한번도 해본 적 없이 다달이 은행에 적금을 드는 게 전부였다, 이재에 밝지 못해 큰 재산을 일구진 못했으나 대신 경제적 굴곡도 별로 겪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요즘 그 흔한 카드를 달랑 하나만 지니고도 불편 모른다. 반면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더니 한국사회의 가계빚 총액이 900조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총액 내역은 가계 대출, 카드사와 할부금융사 외상판매를 합한 액수로, 한 가구당 4600만 원가량의 빚을 진 셈이다. 교민들이 한국에 나가보며 한결같이 흥청망청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는 한국의 실상은 정작 이러하다. 가계부채의 심화로 속 빈 강정 꼴인 한국이라 언제 카드대란이란 뇌관이 터질지 모르니 시한폭탄을 안고 살건만.
그래서일까, 소설 속의 상황은 지금 한국 사회 나아가 현대사회 어디에서나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행복이라는 신기루, 넘치는 풍요 속에서도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끝없음과 사치스런 허영심을 좇다가 자신도 모르게 빠지는 함정은 도처에 깔려있다. 플라스틱 카드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맹점과 어둠을 가감 없이 그려낸 이 소설은, 허상을 탐하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임을 암시한다. 한 여성이 신용카드와 소비자 금융의 덫에 걸려 인생을 망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밀도있게 재구성하여 현대 소비사회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화차.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Global Debt)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1.7%로, 세계 2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이래 2023년까지 100%를 웃돌면서 약 4년간 '세계 최대 가계부채 국가'의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2023년 말 비율이 갑자기 93.6%로 크게 하향조정되면서 다행히 순위가 2위로 내려왔다고.
신기루 같은 행복이미지에 홀려 자칫하다간 부지불식간에 아무라도 개인파산자가 되어 불수레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같은 현대 사회에서 신용카드나 대출 때문에 파산까지 내몰린 사람은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경우가 많아요.(148쪽)" 세심한 필치,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라 첫 장을 열면 내리닫이로 날밤을 새우게 만든다. 화차/문학동네/미야베 미유키 지음/이영미 옮김 -2016-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4년 3분기 가계신용' 자료를 보면, 지난 9월 말 기준 한국의 가계신용(가계 빚) 잔액은 2분기 말보다 18조 원 늘어난 1913조 8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한국의 가계 빚이 1900조 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 기록을 또 경신했다. 2024. 11. 19자 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