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구경을 나섰다가 헛걸음을 했다.
새벽에 온 안전 문자를 확인치 않은 내 불찰이었다.
눈이 오면 소형차량은 교통통제가 되곤 하는 천백도로다.
그간 몇 차례 가봤지만 대중교통수단은 통제된 적이 없었기에 유유히 길을 나섰던 터.
남쪽 하늘은 푸르렀으나 한라산이 선 북쪽은 눈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백설 만건곤한 한라산 인근은 아랫녘만 보일뿐 모습 아예 감감했다.
와우~ 진짜 이번엔 멋진 설경을 감상할 수 있겠구나, 기대감은 한층 더 증폭됐다.
중문 사거리에서 매시간 15분에 출발하는 240번 버스를 기다렸으나 삼십 분이 지나도 차가 오지 않았다.
교통종합안내센터로 전화를 했더니 오늘 천백고지를 지나는 버스 편은 전면 중단되었다고 했다.
말짱하게 푸르던 하늘임에도 구름장 몰려들기 시작하며 갑작스레 강풍 휘몰아치는 등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다.
서귀포 시내에서는 청명하던 하늘인데 강정쯤 이르자 눈발 제법 펄펄 날리더라니.
중문에도 '바람 찬 흥남부두처럼' 마구 눈보라가 흩날렸다.
보기좋게 바람맞았으니 도리 없이 뒤돌아서야 했다.
버스정거장에서 함께 차를 기다리던 한 여성이 그냥 집에 갈 거냐고 물었다.
고산지대 추위에 대비해 중무장을 한 채라 겨우 눈만 보이는 그녀에게 이왕 나선 걸음이라 삼매봉 올랐다가 귀가할 거라고 했다.
마침 그녀도 외돌개는 두어 번 가봤으나 삼매봉에 한 번은 꼭 올라보고 싶던 차였다고.
그렇게 우린 동행이 되어 삼매봉으로 향했다.
특별한 취미를 가진 데다 쿨하기까지 한 친구와 이처럼 우연스레 인연이 닿았다.
삼매봉 오르며 저 아래 외돌개와 범섬을 조망하는 자리에 이르자 그녀는 짧게 탄성을 발했다.
언덕길 가에 핀 동백과 유채꽃을 보고도, 무성히 자란 맥문동 보랏빛 보석 같은 열매에게도 감탄사.
내면의 느낌에 감각이 즉각 반응하는 매우 감성적인 연한 성품이었으나 역시 인간은 다면체가 맞다.
파격적이게도 제주에 와 자격증을 취득하고 스킨 스쿠버를 즐긴다는 그녀.
칠십도 후반에 들어선 그녀였다.
음성 조용한 데다 외견상으로는 자그마하니 단아해 보이는데 어느 갈피에 그런 불꽃이 갈무려졌던 걸까.
활달하고 액티비티 한 외향적 성격이거나 덩치 우람하고 강단진 중성 같은 체구라면 그럴 법하나 매치가 영 쉽지 않은 조합이었다.
나보다도 작은 키에 유순해 뵈는 천상 여성인 그녀인데 그 무거운 장비를 어찌 다룰지 신기하기만.
음악교사로 오래 근무한 후 명예퇴직을 하고 편히 쉬면서 취미인 수영즐기며 소일하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파킨슨으로 쓰러져 칠 년간 병수발 들었는데 삼 년 전 세상을 떴다고.
그간의 칙칙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거리를 찾아 제주에 내려왔다는 그녀.
혼자 제주살이를 작정했다면 응당 먼저 가족들과 논의 끝에 결정하는 게 보통.
여기서도 멋진 반전, 놀랍게도 그녀는 혼자 제주에 와 일주간을 지내보고 스스로 결정을 내린 뒤 자녀에게 '통보'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주체적으로 삶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과 심신 건강이 받침 되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더해서 고정관념의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아예 발상 자체부터가 가능치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뚝심 있게 당차거나 억척스러운 여장부 타입과는 거리가 먼, 음악회 즐겨 다니며 섬세한 정서의 뜰을 가꾸는 그녀였다.
제주 모슬포로 내려온 지 이태째라는 그녀는 제주도를 해안 따라 빙 둘러보았다고 했다.
서울에서 자주 친구들이 내려와 제주의 명소들 찾아보러 다니고 가끔씩 서울 집 오가며 지내다 보니 세월이 금세 흘러가더라고.
그녀 역시 제주에 매료돼 올해 말까지 여기서 지낼 예정이라기에 때때로 도반 되어 같이 길을 걷자며 우린 단박에 의기투합 했다.
삼매봉에서 하계 두루 감상한 후 점심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제주예찬은 끝없이 이어졌다.
무병장수 전설 속 남극노인성 별자리를 볼 수 있는
춘분 경, 삼매봉에서 다시 만나자며 오후 이슥해서야 우린 작별인사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