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일요일 아침 날씨는 무척 화창했다. 며칠 전 꽃샘추위가 몰고 온 한바탕의 눈비. 그 여파로 바람은 찼으나 봄볕은 여간 따뜻한 게 아니었다. 맑은 하늘의 눈짓이 아니라도 이대로 집에서 하루를 견딜성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금정산행 버스를 탔다. 가깝다 보니 별 부담도 없는 데다 산세 거칠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어 즐겨 찾는 금정산이다.
여태껏은 범어사에서 시작해서 산의 능선 따라 남문이나 동문으로 빠지는 코스였다. 산성터에서 조망해 보는 바다. 암벽에 올라 마시는 솔바람의 매력. 그러나 그윽한 숲도 없고 호젓한 오솔길도 아닌 탓에 내내 해를 이고 다녀야 했다. 오늘은 그 길을 버리고 금강 공원에서 출발하여 케이블 카 따라 산을 오르기로 했다. 이곳은 같은 맥의 산줄기인데도 그간 보아온 금정산과는 영 다른 분위기였다. 기암과 조화 이룬 노송, 그에 못지않게 운치있는 잡목림으로 하여 여름이면 녹음이 퍽 무성할 듯 하였다.
숲 사이 외길은 한적했다. 아마도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날씨 탓이리라. 움츠린 춘심(春心)이지만 이미 겨울은 전송해 보낸 계절. 제아무리 굼뜬 듯해도 봄의 발길은 겨울의 자취를 하나씩 지우고 있지 않던가. 어느새 공원 안에는 개나리꽃 피고 도리화가 연분홍 미태를 수줍어하며 봄을 영접하고 있었으니. 제법 비탈진 산기슭을 계속 오르자 덧걸친 점퍼가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이마에 땀도 솟았다. 길 옆 바위에 앉아 운동화를 벗고 잠시의 휴식을 취했다. 이런 곳에서 먹는 과자나 음료수는 같은 거라도 왜 맛이 각별할까.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차지 않았다.
다시 운동화 조여 신고 산길을 오를 때는 피로도 가시고 훨씬 가뿐했다. 산정 가까울수록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굵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나뭇가지엔 아직도 희끗이 얹힌 눈이 있었다. 응달엔 제법 쌓인 눈이 새하얗다. 바위 뒤켠 그늘에 소복한 눈을 뭉쳐 두 아이가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신이 나 재잘대는 소리가 새소리만큼 청량하게 퍼져나갔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보니 그곳은 온통 백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순백의, 순결한 설원(雪原). 아이들은 환호했고 나는 차라리 숙연해졌다. 정말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설경인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눈, 눈. 피부에 와닿는 바람은 시린듯하면서도 삽상한 감촉이 신선했다. 인적 끊긴 고요가 오히려 최적의 선물이다 싶었다. 드넓게 이어진 눈길은 그래서 처녀설 그대로였다.
발목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다가 벌렁 드러누워 전신으로 눈사진도 찍었다. 잔등이 눈에 젖고 신발에 눈이 들어가는 것쯤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역시 눈밭에서 흔연스레 마냥 뒹굴며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모처럼 갖는 무구한 기쁨의 순간. 이곳에는 오직 하늘과 눈과 우리들뿐이었다. 햇살 사뭇 반짝대며 눈의 향연에 초대받은 우리를 축복해 주었다. 두 아이들은 해맑게 티 없이 좋아했다. 가슴 활짝 펴고 이리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일찍이 본 바 있었던가. 듬직하니 말이 적은 맏이까지 기분 좋게 들떠 있었다. 막내는 아예 강아지처럼 눈 범벅되어 마구 뛰다 미끄러져도 깔깔댔다. 아마도 우리를 보면서 하늘에 계신 근엄한 어른께서도 빙그레 미소 지었지 싶다.
우리는 눈길을 좀 더 걷기로 했다. 만덕 어디쯤에 있다는 석불사. 눈 속의 석불을 뵙고자 서쪽 능선을 밟았다. 어디가 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눈길. 종아리까지 묻히는 눈 속을 걸으며 목청 돋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눈 속에 남았다가 진달래 피는 날 메아리로 살아나리라.
이윽고 양지쪽 누런 풀숲이 나타나며 설원은 끝이 났다. 눈이 녹은 곳은 진창이다 보니 젖은 운동화에 황토 흙이 무게를 덧보탰다. 거기서 초로의 등산객 부부를 만났다. “반가워요” 그분은 은발 나부끼며 인사를 건넸고 아이들은 “조심히 가세요” 합창하듯 낭랑히 외쳤다.
그렇게 굽이를 돌고 산을 오르내리며 두어 채 산마을도 지났다. 응달에는 눈, 양지녘은 진흙탕이 번갈아 기다렸다. 눈 속에 들면 그때마다 아이들은 눈 맑은 노루가 되고 귀여운 산토끼가 되었다. 비탈길에선 미끄럼도 타고 소나무에 얹힌 눈을 흔들어 눈사태 아래 서보기도 했다.
산속의 산. 겹겹의 산은 끝없는가 싶더니 저만치 석불사 입구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지금까지의 설원(雪原)은 맞은편 산기슭에 남겨두고 그곳을 향해 봄볕 거느린 채 걸었다. 건너다 보이는 산자락은 그윽한 수묵화 한 폭이었다. 행여 안개라도 드리운다면 그야말로 영락없는 설경산수도 아니랴. 그 화폭 안에서 석불님들이 고개 늘이고 우릴 기다릴 터였다.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