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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8. 2024

와인과 쑥개떡

어제까지만 해도 상큼하던 날씨가 부옇게 흐리고 바람마저 거칠 게 불어대는 기상도 때문이다.


오늘 와인과 쑥개떡의 만남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으나 머잖아 랑데부 이뤄지리니.

아침나절, 서울에서 오기로 한 친구는 김포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11시 15분 발 항공기를 예약해 12시 20분 제주공항에 도착하기로 돼있었다.

아홉 시경 헬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항이라며 기상악화로 제주행 비행기가 줄줄이 운항정지, 대기 상황이 호전되면 오후 늦게나 비행기가 뜰 거라고 전했다.

순전히 하늘의 주관사에 속하는 일이므로 속수무책이다.

열 시쯤 출발해 공항으로 마중 나가려던 나 역시 주춤 멈춰 설 밖에.

친구는 아들을 비롯, 이웃인 교민 부부와 동행하기로 한 이번 여행이다.

진작에 항공권과 렌터카, 호텔 예약까지 완결시켰는데 결항 사태로 일정이 다 어그러지게 생겼다.

친구는 하와이 은행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은퇴해 나와 같은 시기에 역이민을 했다.

미국에서 온 친구 부부는 교회에 다니다 알게 돼 이웃이 된 분들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고 했다.

이민 간 지 오래된 그분들은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고 세컨하우스를 장만해 양국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케이스.

여행사를 했던 친구 아들은 코로나 장기화 타격에서 벗어나 현재 사업체를 재정비하며 다변화를 모색 중이라 했다.

그렇게 넷이 모처럼 여행 기분에 들떠 김포공항에 나왔건만 항공기 지연 사태도 아닌 결항 통보를 받게 된 것.

사태를 관망해 봤으나 결국은 열한 시 다 돼서, 아무래도 어렵게 됐다며 스케줄 포기로 결론을 지었다.

사업과 연계, 미 전역을 여행 다닌 친구네 부부나 여행사를 운영한 아들조차도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다고 하였다.


섬에 들어와 불편 모르고 즐거이 산지 이태째, 중죄인 유배처였던 이유를 새삼 절감했다.


하늘길 뱃길이 막히면 세상과 단절되며 완전 고립무원에 빠지는 오지가 되는구나, 실감 됐던 것.

잠 설쳐가며 새벽부터 동동거리다 헛걸음하고 돌아가면서 그들은 아쉬운 대로 다음을 기약했다.

내가 괜히 미안쩍었다.

 


어제, 내 나름으로 친구 맞을 준비를 했다.

제주 지도를 펴놓고 코스 정하고 요소마다 체크를 해뒀다.

일단 첫날은 공항에서 서쪽 해안 따라 구엄리 애월 협재 금능 월령 해변 찍고 수월봉 송악산 산방산 스쳐 안덕계곡에 들를 계획을 짰다.

인근 화순에 있는 생선구이집에서 저녁 해결하고 서귀포 숙소로 올 작정이었다.

둘째 날은 중문에서 브런치를 먹고 여유롭게 대평마을 돈 다음 천제연과 색달해변 거쳐 서귀포로 와 주요 포인트를 섭렵하기로 했다.

셋째 날은 오후 7시 20분 비행기 타기 전까지 동쪽 해안 돌며 쇠소깍에서부터 섭지코지 성산이며 비자림 함덕 들러야지, 스케줄 촘촘 짜놓았다.

간만에 부지런 떨며 집안 정리 정돈도 하고 오후에는 안덕계곡 신록 확인차 나갔다가 별내린 전망대, 들꽃 무리 지어 핀 성천에 가서 쑥을 뜯었다.

작년에도 주변 환경 깨끗한 성천에서 쑥을 채취, 쑥개떡을 쪄서 이웃들과 고루 나눠먹었다.

쑥인절미나 쑥절편도 아닌 쑥개떡, 이름이야 개떡이지만 나이 지긋한 이들에겐 향수 어린 떡이라 다들 어찌나 반기던지.

촌스런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 나이 든 대부분이 쑥개떡을 격할 정도로 반겼다.

전에 살던 미국 동부에도 쑥은 있었으나 생김새만 쑥일 뿐 전혀 쑥 향이 없다 보니 그냥 예삿풀 취급했다.

쑥이 보얗게 올라오는 초봄만 되면 그래도 쑥잎을 괜히  비벼가며, 마치 입덧하는 아낙처럼 쑥개떡이 물색없이 왜 그리도 먹고 싶었나 모르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맞은 첫해 봄에는 소원풀이하듯 쑥을 뜯어다 쑥떡을 해 먹었다.

바닷가 양지 녘에 파릇파릇 올라온 햇쑥을 뜯어 데친 다음 떡방앗간에 가지고 가 멥쌀과 빻아서 반죽해 생애 처음 만들었던 쑥개떡.

이후 신춘 맞으면 연례행사 치르듯 해왔는데 올해야말로 여럿이 쑥개떡 쪄서 한입 베어 물으면 살뜰한 감동 여전스레 일었으련만.

 

오늘 공항에서 친구네와 조인하면 가까운 위치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서 점심 먹고 움직이려 예약부터 단디 해놨었는데..

친구네 아들은 와인과 치즈 등 안주거리도 최고로 마련했다며 어른들 모시고 저녁에 파티하기로 했다는데...

샌프란에서 온 교민분은 같은 캘리포니아에 살아 공통의 화제가 많을 거라며 어서 만나고 싶다 기대 컸다는데....

내가 쑥개떡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것 또한 그분들에게 옛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하와이에서 생활한 헬렌보다도, 훨씬 더 기나긴 세월을 타국 객지에서 살아온 그분들은 5~60년대 식 입맛 손맛을 어머니 그리듯 할 터.

포장 매끈하게 잘 된 유명 떡집의 떡이라면 미국에서도 온갖 종류별로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상품 떡이 아닌 손수 반죽해서 조물조물 만들어 쩌낸, 질그릇처럼 투박하니 모양 없는 개떡.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것에 사무치도록 향수를 느끼는 세대라서 그분들 염두에 두고 선뜻 개떡 빚을 생각을 했던 터.

내달 중순에 뉴저지에서 오는 갑장친구도 쑥개떡에 홀려 한국 방문을 한다 했으니 그녀를 위해 여분의 삶은 쑥은 냉동실에 넣어뒀다.

마치 달리기를 하다가 갑작스레 제동 걸려 급히 멈춰 선 양, 긴장감 풀리자 종일 허뚱거려지며 내 기분 역시 멍했다.

오늘 와인과 쑥개떡의 만남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으나 머잖아 다시금 자리 마련되리라.

바람 불고 계속 비 오는 궂은 날씨라 아마도 다음에 화창한 날 서귀포 방문하라는 하늘의 배려일지도.

잠언의 말씀대로다.

우리가 마음으로 앞 일을 도모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두부나 식혜 할 때 쓰는 베 보자기는 미국에서 쓰던 걸 지난겨울에 챙겨 왔다.

갓 쪄내 말랑한 쑥떡/ 하루 지나면 쑥개떡다이 짙게 변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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