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Apr 17. 2024

퍼붓는 비 아랑곳 않고 걷다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출발일을 정하기 전, 일단 구간별 일기예보부터 체크했다.

기상상태를 보고 가급적이면 일정을 깜냥껏 조정할 생각에서였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스페인 북서부 날씨는 달력 사진의 봄소식과 달리 사월에도 눈발이 날렸다.

더구나 피레네의 경우 산악기후라 눈은 물론 우박까지 내리는 등 변화무쌍, 예측할 수가 없다 했다.

체질상 추운 건 질색이라 당연히 봄 햇살 다사로워질 오월로 출발일이 넘겨졌다.

봄이 천지 간에 무르녹는 계절의 여왕 오월의 날씨, 장기예보를 꼼꼼히 살펴봤다.

겨울철이 우기라니 설마 만화방창 꽃 나들이 철에 종종 비는 아닐 테지, 란 바람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오월도 그렇지만 유월도 마찬가지, 해와 구름 우산 그림이 번갈아 나타났다.

갈리시아 지방은 세심하게 시간별로도 검색했는데 역시 해, 구름, 우산, 어느 날은 구름에 번개 표시가 있는 등 대강 엇비슷했다.

결국 쾌청한 날 1/3 구름 낀 날 1/3 비 오는 날 1/3이니 열흘 정도는 비 맞을 각오하고 떠나기로 맘먹었다.

출발 당일 서울은 섭씨 20도 가까웠는데 파리 공항의 바깥 기온은 섭씨 6도로 매우 쌀쌀했다.

카미노 여정에 오르고도 날씨는 여전 오락가락, 이른 시각 길을 나서면 자주 손이 시렸고 코끝이 빨개졌다.

보온을 위해 옷을 있는 대로 겹겹 껴입어 몸놀림이 부둔할 정도였지만 그나마 마른 체형이라 감당이 됐다.

그러다 기온이 올라가면 허물 벗듯 한 꺼풀씩 벗어서 배낭에 걸치고 걸었다.

사흘에 한 번꼴로 구름 또는 비, 평상시 날씨가 궂으면 괜히 심란하고 처량스러워 우울 모드에 빠지기 쉽다.

그런데도 잔뜩 찌푸린 날씨 거나 더러 폭우 속을 걸으면서도 만나는 이 모두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번졌다.

우린 자유로워 행복한 방랑자였으니까.




스페인 날씨는 해 쨍쨍하다가도 갑자기 구름장 밀려와 하늘을 뒤덮으며 순식간에 비를 뿌려댔다.

날씨가 종잡을 수없이 변덕스럽긴 해도 다행히 한국 장마철처럼 계속 궂은 날씨는 아니었다.

밤새 비가 내리다 아침이면 시침 뚝 떼고 맑게 개일 적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비는 오후에 잘 내렸기에 길을 걷다가 여러 번 비를 만나게 됐다.

안개비나 보슬비는 그럭저럭 맞을 만 하나 소나기 거세게 쏟아지면 재빨리 피할 곳을 찾거나 단도리할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얼른 방수 판초를 꺼내 덧입고 배낭에도 방수커버를 씌우고 유유자적 걷노라면 빗줄기의 리듬을 음미하는 여유까지도 생긴다.

퍼붓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걷다 보면 아랫도리가 거지반 축축하게 젖고 트래킹화에도 물이 들어와 질퍽해진다.

당장이야 물론 구적거리고 기분도 좀 찝찝해지나 잠시뿐, 곧 익숙해지며 텀벙텀벙 더 후질르고 싶어 진다.

폭우로 인해 구질구질해도 다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남 의식지 않고 어떤 노래건 흥대로 불러대도 요란스러운 빗소리에 묻혀버리기에 참 좋다.

판초를 두드리는 거친 빗방울은 가벼운 마사지 효과가 있어 좋고, 산허리에 감긴 안개구름을 감상하는 재미도 이런 날이 주는 특혜의 하나다.

또 있다. 비로 하여 우수 어린 눈빛 되니 메마른 감성의 텃밭 물기 머금어 촉촉해지며 시 한 소절 그냥 읊어지므로 이 아니 좋을쏜가.

덩달아 마음까지 착해지고 연해져서 평소의 강퍅진 말투도 여린 음성으로 순하게 변한다.

그럴 땐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 절로 '올라~' '부엔 카미노~ ' 정감 어린 인사말도 보내게 된다.

올라는 스페인어로 힘내라! 잘한다! 좋아! 만세! 잘했다! 는 찬사겠고, 좋은 길이란 뜻의 부엔 카미노는 순례자들에게 행운과 축복을 기원하는 덕담.

그뿐 아니라 비에 젖어 고개 숙인 들꽃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물가 개구리에게도 전부터 아는 척 가족에게 안부 전하라 한다.

초지에서 비 맞으며 유유히 풀 뜯다 건너다보는 소에겐 "속눈썹이 길어서 눈에 비 안 들어가 좋지?" 물어도 본다.

길섶으로 나온 민달팽이, 지렁이조차 징그럽다 찡그리지 않고 "밟힐라, 어서 집에 가~" 안위를 챙겨준다.

하늘 푸르게 맑은 날이 좋긴 하지만 이래서 비 오는 날이 싫지만도 않다, 서정적인 달밤처럼 말이다.

쏟아지는 비 아랑곳 않고 걸어가는 저 많은 길손들 표정이 마치 데이트하는 연인들처럼 다정다감, 사랑스러웠다.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 시골 카페 마당에서 잠시 서성대며>

<비 오는 하루 동행이 된 프랑스인 장년 커플은 왜 '홍실' 혼자 왔냐고 물었다, '청실'은 걷는 걸 아주 싫어해~ 간단명료한 내 답변>

<보무도 당당히 앞서가는 독일에서 온 두 아가씨, 차림새가 완전무장한 채 폭우 뚫고 행군하는 병사 같았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며 짓거리는 전혀 힘들거나 싫지가 않다. 빗속을 걸으면서도 기분 상쾌 흔쾌한 카미노 길손들>

<이런 기상상태에 등짐 나르는 인부였다면 푸념이 나올 법, 묵직한 배낭 무게로 구부정한 채 질척거리는 산길 걷다>

<ㅉㅉ~우중에 이 무슨 생고생이람, 비 피해 파라솔 아래 옹기종기 모인 친구들마다 바다거북이 등처럼 버겁게 매달린 배낭 >

작가의 이전글 왕비의 다리가 있는 푸엔테 라 레이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