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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7. 2024

왕비의 다리가 있는 푸엔테 라 레이나

Camino de Santiago

여태까지 걸으며 줄곧 봐왔던 밀밭이며 완두콩밭이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대신 척박해 보이는 산자락 땅뙈기 일궈 가지런히 가꾼 나무는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였다.

와인 산지 스페인답게 좁쌀만 한 포도가 송알송알 맺힌 포도원을 수도 없이 지났다.

길가 이끼 낀 허름한 나무엔 손톱만큼 자란 개복숭아가 가지 휘도록 맺혀 있었다.

먼 데서 뻐꾸기 소리 닭 울음소리 한가로운 시골길이 끝나자 불현듯 자동차 내닫는 큰 도로가 열렸다.

마을 바로 초입, 고풍스러운 외형에 이끌려 푸엔테 라 레이나의 옛 수도원을 개조한 알베르게에 들었다.

오후 세 시가 넘었는데도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주저주저하면서, 오는 길에 몇 개의 알베르게를 그냥 제치고 온 보람이 있어 흐뭇했다.

더군다나 공립이라 숙박료가 6유로, 사설 알베르게는 보통 10~16유로까지 층층이다.

공립이 그렇다고 시설이 뒤처진 것도 아니며 침상이 청결치 않은 것도 아니고 서비스가 나쁘지도 않다.

오히려 프란치스칸 수사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는 상처 난 발을 치료해 주는 봉사자도 있었다.

공사립 어디나 똑같이 일회용 부직포 침상 커버를 내어주므로 잠자리가 후지지도 않을뿐더러 흔히들 염려하는 베드 버그는 카미노 내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날씨가 맑아 빨래를 해 널고 아홉 시가 되어도 해가 있는 곳이라 시내 구경 겸 먹거리 재료를 사러 나갔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알베르게를 나와 큰길을 건너자 맞은편 골목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비좁은 길 사이에 두고 양쪽에 즐비했다.

중세 시대 영화 세트장같이 높직한 대성당과 수도원 건물이 연달아 서있었으며 그 아래로 담황색 지붕들이 가지런했다.

견고한 성벽을 따라 석조 주택이 조밀하게 들어찬 골목 풍경에서 시간을 거슬러 11세기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카미노를 걸으며 아름다운 자연에 도취되어 천지를 창조하신 분 향해 무수히 찬미 찬양드렸던 몇 며칠.

이번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장관, 무한대이듯 위대한 인간의 솜씨를 접하자 경탄이 연신 터졌다.

이미 11세기에 이토록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물을 올렸던 사람들.

수작업으로 일일이 바위 다듬어 굳건히 성을 쌓고 장엄하게 성전을 꾸미고 있는 장면들이 대하드라마 컷처럼 줄줄이 펼쳐졌다.  

두터운 성벽에는 일정 간격으로 포대가 열려있었고 성전은 워낙 너르고도 높다란 규모라 도무지 전체 모습을 찍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본 석성 규모와는 달리 엄청난 크기의 돌을 깎아 정밀하게 귀 맞춰 쌓아 올린 높디높은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

지금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완강히 버티고 서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카미노에서 질릴 정도로 흔히 만난 성당이 이 작은 도시에 무려 네 곳이나 됐다.

중세 기사단의 성당인 십자가 성당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티아고 성당을 비롯해 한 골목 안에 웅장한 성전이 서로 잇닿아 있었다.

산타카타리나와 산 로만 성당은 외관 퇴락한 채로도 아우라 대단했다.

비록 종탑에 새 둥지 짓고 벽에는 잡초 어수선히 자랐을지언정 과거의 영광과 위엄은 조금치도 손상받지 않은 채였다.

섬세한 조각품 팔 떨어져 나가고 코 이지러졌을지라도 압도하는 위용에 절로 위축감이 들 정도였다.

특히 입구의 부조 장식이 섬세한 산티아고 성당과 고딕 양식의 예수고상이 있는 십자가 성당은 바로크 풍의 화려한 금빛 제단 눈부셨다.

또한 순례자 복장을 한 야고보 성인의 조각상에서는 장인의 성심이 읽혔다.  

에스파냐 각지가 분할되어 있던 시절, 나바라 왕에 의해 11세기에 만들어진 순례자들을 위한 도시.

까미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소문난 무지개 드리우듯 한 우아하고 견고한 푸엔테 라 리에나 다리.

스페인어로 기품 갖춘 왕비의 다리라는 뜻의 뿌엔떼 라 레이나 다리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도 푸엔테 라 레이나다.

일찍이 순례자들이 도시의 출구 쪽 아르가 강을 안전히 건널 수 있도록 여섯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홍예교를 세웠다고 한다.

앞으로도 가끔씩 만날 무지개다리, 기껏해야 선암사 승선교 밖에 본 바 없는 안목이니 그 기술 놀랍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해 질 무렵 가까운 성당에서 여러 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밖에 있는 순례자들에게 밤이 되어 성문을 닫겠다는 예고로 중세부터 계속된 전통이라 하였다.

이번 카미노에서 뎅그렁 퍼져나가는 종소리는 거의 매일 듣다시피 했으며 종소리 덕에 새벽잠 깨기도 여러 번.

종교와 상관없이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듯이, 그 누구라도 거부감 들지 않는 평화로운 종소리다.

이른 새벽 푸엔테 라 레이나를 뒤로하고 왕비의 다리를 건너는데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 환청이듯 들려왔다.

박남수의 시 '종소리'를 웅얼거리며 잠시 다리 위에 서서 떠나온 도시를 건너다보았다.

.......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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