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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8. 2024

소나기 내린 날의 노을빛

Camino de Santiago

시라우끼(Cirauqui) 마을은 우연히 머물 게 된 곳이다.

아침 햇살 내리는 포도밭 사잇길을 두어 시간쯤 걷고 있는데 비구름이 몰려오며 멀리서 음산한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뇌성이 점점 가까워지며 툭툭 빗방울이 떨어졌다.

며칠 겪어보니 스페인 날씨야말로 도무지 종잡을 수없이 요상스럽기만 하다.

태양 찬란하다가도 갑작스레 먹장구름이 비를 쏟아붓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개이는 여우 날씨다.

이날도 그랬다.

올리브나무 잎새에 살랑대던 바람이 돌연 쏴아 쏴아 나무둥치를 뒤채이게 하면서 한바탕 돌풍이 불어 젖혔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는 돌연 거친 소나기로 변했다.

판초를 꺼내 뒤집어썼어도 그 정도로 감당될 비가 아니었다.

보통 대여섯 시간은 걸어야 그때 비로소 쉴 자리를 찾게 되는데 장대 같은 빗줄기에 쫓겨 부랴 사랴 저만치 보이던 마을로 서둘러 뛰어올라갔다.

바위산의 지형지물을 용케 이용해서 자연형태 그대로에다 집을 지은, 아니 집을 얹어놓은 형상이었다.

역시나 마을 중심은 성당, 정상에 세운 성당 앞마당이 광장이었고 꼬불탕한 골목길 따라 자그마한 마켓과 약국과 카페도 자리 잡고 있었다.

성당 바로 앞에 알베르게가 있었고 문을 여는 정오까지 추녀 아래 모리모리 모여 앉아 비를 피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지지리 궁상을 떨며 쭈그리고 앉은 우리지만 그럼에도 우린 즐거운 순례자였다.

오후가 되며 비 말끔 멎자 이마 말갛게 씻은 먼데 산이 가까이 다가서며 실오리 같은 산길을 훤히 드러냈다.


날씨 들자마자 가벼이 길 떠난 일부 카미노객 자취가 점점이 멀어져 갔다.

에이~ 그냥 계속 걸을 걸... 속마음은 그랬지만 이미 알베르게에 들었으니 좋으나 싫으나 하룻밤 유할 수밖에.


빗물 뚝뚝 듣는 빨랫감 세탁해 널어두고 지하실처럼 어둡고 냄새 퀴퀴한 숙소에서 벗어났다.


비에 쫓겨 급히 택한 방 위치가 북쪽 구석인 데다 동굴 속 같은 집 구조상 환기가 잘 되질 않는 듯했다.


창문을 죄다 열어 놓고 나온 김에 카페에서 저녁 요기를 하고는 마을 한바퀴 느긋하니 돌았다.


워낙 협소한 바위산에 얹힌 자그마한 마을이라 구석구석 꼼꼼히 둘러봤지만 금세 원위치로 돌아왔다.

저물녘이 되자 산 너머로 해지는 정경이 근사할 거 같아 동네 뒤편 허물어진 성터로 올라갔다.


거칠 것 없이 사방이 툭 트인 조망터는 훌륭했으나 널브러진 바위 무더기와 마을 이름 연결하니 어쩐지 기분 괴괴했다.

더구나 길고양이 두 마리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노을이고 전망이고 다 제쳐두고 냉큼 숙소로 돌아왔다.


흔들대는 알절구 불빛이 따사로웠다.


시라우끼는 바스크어로 ‘살모사의 둥지’라더니 풀섶 바위 위에 똬리 튼 살모사를 연상시키는 마을 원경.

일찍이 로마시대에 마을이 형성돼 도로를 닦았으며 이슬람, 기독교 문화가 혼재된 바위 언덕 위의 마을 시라우끼.

12세기 후반의 로마네스크식 성당 정문의 아치는 석조가 아닌 목조각같이 정교한 솜씨를 품고 있다.

흙이라곤 한 줌도 나지 않는 곳이나 화분에 꽃을 가꾸며 구불구불 비좁은 골목에서 정겹게 이마 맞댄 이웃들.

로마인들이 정착했던 유서 깊은 마을임을 나타내듯 집집마다 붙어있는 현관 위의 돌문장에도 시간의 역사가 새겨졌고...

동굴 속같이 음습하고 냄새 퀴퀴한 방이라 오후 내내 환기시킨, 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묵은 사설 알베르게.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가 녹아있는 성벽, 집, 지붕 감상하며 잠시 과거의 시간 속을 유영.

비가 와도 단숨에 쫙쫙 배수가 되는 경사진 거리는 물걸레질을 한 듯 깨끗했다.

산 로만 성당 (Iglesia de San Roman)   /         산타 카탈리나 성당 (Iglesia de Santa Catalina)

노을빛 정면으로 비치자 황금 덩어리로 변한 산 로만 성당의 종각.

소나기로 샤워한 산과 들 그리고 하늘, 하여 더욱 격조 있게 스며드는 황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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