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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8. 2024

중세도시 에스텔라, 무상한 영고성세

Camino de Santiago

작은 개울로 변한 옛적 강 위에 놓인 '중세의 다리'를 건너 로마길을 지나 현대에 만들어진 고속도로와 만나는 길로 접어들었다.


너른 평원에 나직히 엎드린 농가와 소박한 교회 일별하고 걷고 또 무진 걸었다.

하얀 석벽이 병풍처럼 늘어선 안디아 산맥이 오른쪽 멀리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번엔 꼬깔 쓴듯 뾰쭉한 산이 불쑥 마중나오는가 싶더니 강을 낀 외딴 마을 곁도 지나갔다.     


나란히 일렬로 정성들여 가꾼 포도밭 곁에 끼고 한참을 직진했다.

밀밭 가에 양귀비꽃 지천인 들길 스치고 아카시아 꽃향기 날리는 언덕 위에 폐허로 서있는 낡은 교회도 스르륵 스쳐 지났다.


허허벌판에 선 자그마한 마을을 지키는 성모승천교회 앞에서는 잠시 목례를 바쳤다.

산모롱이 하나 돌자 불현듯 강폭 너른 강가 계곡에 안온하게 펼쳐진 에스텔라가 수변공원 앞세워 그 모습 드러냈다.

손녀 세례명이 에스텔이라 진작부터 귀에 익었기에 지명부터 어쩐지 친근감이 들며 반가웠다.

게다가 첫눈에 대뜸 혹해버릴만큼 도시경관이 퍽 아름다웠다.

그러나 청명하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천둥소리까지 음산하게 효과음을 깔기 시작했다.

안개같이 젖어드는 비, 다행히 소나기는 아니었다.

보슬거리는 빗속을 걸어 발코니가 있는 예쁜 주택가와 광장 사이의 알베르게를 찾아냈는데 후원이 퍽 아기자기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후원에 마련된 야외식탁에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는 중에 하늘이 푸르게 개여왔다.


와우~이게 웬 횡재인가, 흔쾌한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팔 내저으며 마을 산책에 나섰다.

골목길마다 돌을 박아 만든 탄탄한 보도가 중세유럽에 만들어진 도시임을 나타냈고 시내 여러 성전 스타일도 중세풍이었다.

스페인 나바라 지역에 위치한 Estella는  작은 프랑스라고도 불릴 정도로 풍광마다 예술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도시.

오래전부터 상업이 번성해 아주 부유했던 마을의 하나로 도시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데.

칼릭스티누스 사본은 에스텔라를 가리켜 최상의 극찬 아끼지 않았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고기와 물고기 등 맛난 음식이 넘쳐나 행복함을 주는 매혹적인 도시’라고 기록돼 있다 하니까.



15세기엔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로 북적댔다던 에스텔라.

1090년 산초 라미레스 왕이 바위산에 싸 안긴 에가(Ega) 강가 계곡에다 작정하고 만든 계획도시였다.  

그래선지 마을 뒷산 정상에 큼직한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고 각기 양식 다른 대성당이 여기저기 몇 개나 됐다.

현재는 도심과 도심을 잇는 높직한 돌다리만 성할 뿐 산 페드로 성당부터 매우 퇴락한 채 마모가 심했다.

대천사 미카엘 성당도, 산토 도밍고 수도원 및 나바라 왕궁 등, 중세의 훌륭한 건축물들이 풍우에 삭은 채 옛 풍모 일부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무너진 성터, 주추뿐인 왕궁 자리, 손발이 뭉그러지거나 상반신이 사라진 성인상은 훼손 정도가 무참할 지경이었다.

이목구비 형체가 흐려져 괴이해진 조각품들이 둘러선 성전 입구에 서니, 천지 안의 그 무엇도 영고성쇠의 철칙에서 예외가 아님이 여실히 통감됐다.

도시 초입에 정좌, 퇴락한 채로도 위엄 잃지 않는 미카엘 성당은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 건축물.

제 아무리 문 위에 아로새긴 벽감의 조각이 사실적이며 화려하고 우아하기로 이름나 있다 하나 감도는 폐허 분위기야 어쩔 수 없었다.

그랬다, 유서 깊은 역사가 담긴 유적지를 수도 없이 남긴 스페인이야말로 매 시대마다 격랑의 중심에서 투쟁사를 엮어갔으니.



알타미라에 동굴벽화를 남긴 그들은 로마의 점령에 이어 이슬람의 지배에 든 적도 있었다.

고군분투 끝에 통일왕국을 이뤄 세계 최강의 자리에 등극하기도 했으나 19세기엔 내전으로 몸살을 앓는 등등.

스페인 어디나 그러하듯 견고한 요새 같은 에스텔라는 바스크어로 별이란 뜻으로 도시의 문장에도 별이 그려져 있었다.

무너진 성터며 마을 고샅길 이리저리 훑다가 가게에 들러 저녁거리 마련해 알베르게로 돌아왔더니 앞 침상의 덴마크 아제가 꽁꽁 앓는 소리를 냈다.

열감기가 들어 끓어오르는 머리에 얼음찜질을 하는 중인 그에게 수녀님이 뭘 먹었느냐 물으니 입맛이 없어 온종일 굶었다고 한다.

봉사가 몸에 밴 수녀님이 누룽지에 우유 붓고 뭉근하게 타락죽을 만들어 주니 후루룩 떠먹고는 비 오듯 하는 땀을 닦으며 고맙다 인사했다.

오월의 스페인 날씨는 하도 변덕스러워 예측불허인 데다 우기가 겹쳤는지 다시 우중충 흐린 날씨에 비가 오락가락.

여전히 빗발 성성한 이튿날 아침, 탈이 생긴 발목 인대가 성까지 나 절뚝대는 수녀님과 우린 의기투합 버스를 타기로 했다.

포도주 수도꼭지로 순례객에게 잘 알려진 이라체 수도원과 산토 도밍고, 산 후안 등을 고속버스 타고 휙휙 스쳐버렸다.

온종일 비 부슬거려 왕창 점프를 해서 부르고스로 직행했다.


정오 무렵 도착한 부르고스 하늘은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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