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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공황상태, 코로나 당시-2

by 무량화

열여섯-그래도 필 수밖에 없는 꽃(3월 25일)



눈총 주지 말아요.


이런 시국에 활짝 피어나기도 민망스럽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철되면 필 수밖에 없는 꽃인걸요.


사실 꽃들도 우울하긴 매한가지랍니다.


꽃만이 아니라 새들 노래하고 나무마다 새 움 틔우지만요.


지구촌 전체가 심란스런 판에 무슨 신명이 날 리야 있겠어요.


물아일체(物我一體)라지요.


유마거사가 진작에 설했더랬어요.


중생들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생명들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라고요.


그래도 철 맞아 만화방창 흐드러진 꽃.


하지만 미증유의 사태로 피폐해진 영혼들


가까이 다가가 위로나 위안이 되어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이렇게나마 꽃소식 전하는 것은 잠시일망정 고향의 봄을 꿈꿔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야생 복숭아꽃 연분홍 치마처럼 봄바람에 하느작거리고요.


산수유꽃 담장 안에는 눈매 순박한 순이가 살듯 하고요.


해풍에 마구 쓸리는 벚꽃길 걸으며 떠올린 오래전 진해 군항제도 생각나요.


분재하던 친구가 선물로 준 홍매와의 추억에도 빠져들게 하고요.


뉴저지에서 봄마다 아쉬워했던 고향의 꽃 할미꽃이며 보랏빛 향수에 잠기게 하던 반지꽃.


외갓집 사랑채 앞에 피었던 흰 매화 생각에 하염없이 잠겨봅니다.


험한 세월 아랑곳 않고 그래도 봄이 왔음을 알리려

환하게 피어난 꽃이 새삼 미쁘네요.



열일곱-코로나 블루 (3월 30일)


홀로 파도 거친 바다에 나가 물질하고 돌아오는 해녀를 먼 빛으로 보았다.


통상 그룹을 지어 작업을 하던데 그날 웬일인지 그녀는 혼자였다.


저 아래 바다 잔잔해 보이나 그때 따라 강풍이 불어 너울파도가 심했다.


오랫동안 해온 물질이라도 혼자서 파도에 뛰어들기가 겁이 나진 않았을까 괜히 짠했다.


너나없이 살아간다는 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인생은 고해라 했으리,


고통의 바다를 건너려면 예고 없이 닥치는 거친 풍랑을 극복해야 하며 세파에 시달리는 일 다반사로 겪는다.


유행병처럼 헬조선 운운할 때만 해도 자조하며 비틀어 볼 기운이라도 뻗던 호시절이었다.


입이 보살이라고 헬조선 타령하던 이들, 고해를 견뎌내야 하는 인생의 쓴맛을 이제부터 제대로 맛보게 될듯하다.


고도성장의 양지쪽에서 만판 즐기며 호기롭게 대량소비에 익숙해있던 사람들.


놀라 기겁할 일이 이번에 벌어졌다.


호된 시련기다.


아니 성찰의 기회다.


고통에는 다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을 일깨워주려 함일 수도, 자연계의 순환법칙을 어긴 탓일 수도, 진정한 평등을 가르치고자 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말들을 한다.


그간 살아오면서 진득이 자신을 되돌아볼 계기가, 시간이 주어진 적 있었던가.


너나없이 무언가에 쫓기듯 늘 바쁘게 내달렸지만 부질없는 허장성세, 손에 쥔 성과물은 별로 없었다.


난데없는 괴질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들 멈춰 섰다.


벌써 두 달이 지나 세 달째로 접어든다.


외출자제 권고에 따라 자유로운 바깥생활이 제약을 받고 있다.


이 상태가 장기화되자 고립감, 우울증 등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코로나 블루는 역병이 창궐하는 이 난세에 생겨난 신조어다.


이웃과의 교류가 통제되고 사회활동 역시 위축되면서 코로나 블루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염병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걱정 때문에 소화장애와 불면증이 나타나게도 된다.


무기력감과 아지 못할 분노가 차오르는가 하면 지나친 경계심과 적대감,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감염에 대한 불안, 외부와의 단절감, 경제적 사회적 위기감 등이 복합적으로 압박해 와 우울한 감정에 더해 답답함을 느끼는 코로나 블루를 아마도 대부분이 느꼈을 터.


사실 이런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당연하고 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불확실한 문제에 불안감을 느끼는 건 살기 위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기제다.


확진자가 다수 발생한 지역에선 자칫 정신적인 외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더욱이 SNS에 넘쳐나는 건강 관련 검증되지 않은 정보로 인해 혼란을 야기시키거나 건강 염려증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가급적 사람들과의 대면을 피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수라서, 갈수록 재택근무와 원격예배 원격수업 방식이 널리 채택되고 있는 요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는 어느 날 느닷없이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톨이로 살아가게끔 되었다.

갇혀 지내는 이런 때일수록 울적한 기분을 밝게 돌려야 하는 바 가능한 한 햇볕을 쬠으로써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켜 몸에 활력을 돋워줘야 한다.


면역력 증진을 위한 충분한 수면도 필수며 매사 낙관과 긍정의 자세를 견지하므로 정신건강을 튼튼하게 지켜나간다.


한국의 경우 확진자 증가세는 꺾였지만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찜찜한 얘기도 나온다.


그보다 더한 것은 경제적 타격으로 30년대 대공황보다 훨씬 힘들 거라는 예측치들이 나오고 한국은 IMF 당시의 곤경 정도는 약과라고 겁을 준다.


당장 코로나 문제에 코 박고 있느라 다른데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그렇지, 파탄나다시피 할 경제문제야말로 심각하기 그지없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전망치가 더욱 심난하게 만든다.


각국은 급한 대로 재난지원금을 풀기로 했으나 장기적 대비책 없는 임시변통만으로는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하루하루 주름 깊어지는 자영업자에 이어 소상공인이 무너지고 기업이 순차적으로 무릎 꿇는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해 나갈지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건물 공실률이 갈수록 늘어나고 공장 가동률은 부품이 동나서도 얼마 못 버티고 주저앉을 것이라 한다.


안 그래도 경제위기를 걱정하던 차에 코로나 창궐로 기업들이 휘청대며 벌써부터 실업률 증가세가 가파르다.


물론 인간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갖은 난관을 격파해 나가면서 눈부시게 진화해 왔다.


불원간 백신이 개발되고 해괴한 역병은 퇴각할 것이다.


하늘은 감당할만한 시련을 주신다 하였다.


코로나 블루란 신조어가 망각 속에 묻힐 그날은 틀림없이 올 터이다.


거친 바다에 들어 물질하는 해녀가 그땐 아름다운 풍경으로 비칠까.




열여덟-고통도 길이 들면(4월 4일)


바이러스는 지구촌의 풍속도를 바꿔놓았다.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다니지 않는다. 도로에 차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학교가 몇 달째 문 닫혔고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가 늘어간다.


소비 기회가 사라지며 가게나 식당이 직격탄을 맞았다.


바이러스보다 더 가공할만한 경제위기의 도래는 불 보듯 뻔해졌다.


반면 중국 공장이 멈춰 서자 뿌옇던 대기가 맑아졌다.


중동국가의 크고 작은 전투까지 중지됐다.


인도 정부의 엄격한 조치로 13억 인구가 자가 격리되자 히말라야 설산이 드러났다.


베네치아 운하에 물고기가 다시 돌아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은 섬뜩했다.


서구 마켓의 텅텅 빈 생필품 선반.


긴박하게 움직이는 땀에 젖은 의료진.


마스크 두 장에 생명 걸다시피 한 기나긴 줄 서기.


시신 즐비하게 안치된 딴 나라 성당.


국외로 탈출하려는 공항의 대혼잡.


상춘객을 막으려 갈아엎어버린 유채꽃밭.


비현실적으로 비어버린 도시의 가로.


활주로에 발 묶인 리스비 엄청난 비행기들.


식당 테이블 위에 엎어놓은 의자들.


입항 거부 당해 바다에 떠있는 크루즈선.


천진난만한 아이들조차 동작 그만, 등등등....




세계 뉴스를 듣다 보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완전 공상괴기영화의 장면들이다.


두 눈 가리고 손가락 틈새로 얼핏 얼핏 보았던 공포스러운 광경이 바로 현실.


커틴 사이로 외부동정 살피는 겁먹은 눈동자들.


전시상황이란 공식발표가 피부에 가까이 와닿는다.


이 판세에 어떤 리더는 두루뭉술 거짓말로 화를 키우고, 어떤 리더는 심각한 얼굴로 재난에 맞선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 냉정하게 대처를 잘하면 그나마 감염자 수를 줄일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중국 인접국인 대만, 베트남의 예를 보면 분명하다.


한국 인구의 반 정도이니 비교가 쉬운 대만의 경우 감염자 3백여 명, 방역 최일선에 전문가를 배치해 적극대응한 결과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 하였다.


물론 아직은 최종 결론을 말하기 어려운 시점, 추론할 단계는 아니다.


단지 갑론을박에 한마디 보탠다면 자화자찬도 금물이지만 비관도 낙관도 금물이다.


방향 수시로 틀어가며 마구잡이로 횡행하는 유령 같은 바이러스 속성상 지금은 그 누구도 웃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마냥 불안에 떨고 있을 때도 아니다.


또한 숫자, 수치에 강박적으로 얽매이는 어리석음에서 모두들 속히 탈피했으면 한다.


숫자는 바이러스처럼 관념적인 또 하나 미확인 물체다.


정치판 여론조사 막대그래프처럼 말이다.




하나 더, 현실의 고통에 길 들어가지 말고 제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 때가 지금 아닌가 싶다.


길들인다는 건 무언가를 자신이 다루기 편하도록 즉 익숙하게 만드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애완견을 훈련시켜 내게 맞게 길들이듯.


고통도 길이 들면 공포감이 둔화되며 쾌감이 되기까지 한다지 않는가.


그러면서 자칫 어떤 기이한 물결에 어라~어라~하면서 속절없이 휩쓸려 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Traumatic bonding 심리라는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방금까지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를 다시 보고 나서 가지 쳐나간 생각들로 이건 어디까지나 순식간에 든 주관적 느낌이긴 하다.


한국영화감독 중에 특별히 김기덕 영화는 거친 표현양식과 충격적 영상으로 호불호 층이 극명히 갈린다.


메시지 자체가 거북하거나 난해하거나 끔찍해서이리라.


그는 미투 연좌제에 걸려 곤욕을 치른 바 있으나 작가주의 예술영화를 표방하는 한국 유일의 감독.


황금종려상이 아니라도 국제적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요샌 소식 잠잠하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지만 아무튼 이번엔 장동건을 출연시킨 '해안선'을 다시 볼 참이다.


영화 후반부 삽입곡인 '과거는 흘러갔다'는 중독성이 있어서 왠지 자꾸 따라 부르게 되는데 이즈음 분위기에 딱이네.



열아홉-종잡을 수 없어 (4월 7일)


되짚어보니 2월 중순경부터 활동을 제약받았다.


식당에 간다는 게 께름칙해서 생일도 챙기고 싶지 않았다.


막상 식당에 들어가 놀란 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스레 사람들이 붐빈다는 사실이었다.


혼자만 과민하게 남의 나라 호떡집에 불난 걸 무서워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었다.


그즈음 부쩍 국내 뉴스가 심상치 않아 지며 나날이 올라가는 불안한 그래프를 봐야 했다.


강박적으로 아침이면 또 얼마나? 경쟁하듯 숫자 중계방송하는데 질렸으면서도 상황판이 궁금해진다.


설 이튿날 성묘 다녀온 걸 끝으로 외부와의 차단막을 스스로 쳤다.


가급적 뉴스는 외면한 채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고 고동을 줍고 들에서 어린 쑥을 뜯었다.


운동삼아 수시로 갈맷길 따라, 해파랑길 따라 한적한 바닷가를 무진장 걸어 다녔다.


언뜻언뜻 확진자 숫치가 보였고 대구의 심각한 확산세가 들렸으며 역병은 무서운 기세로 만 단위 고지 향해 내달렸다.


도서관, 컴퓨터교실 등 모든 시설이 문을 닫자 두려움이 점점 옥죄어왔다.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 한국 탈출을 시도해 본 적도 있다.


마침 랭커스터 집이 매매됐다기에 계제 김에 비행기표를 예매하려니 딸내미가 말렸다.


미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며 만약의 사태 시엔 의료체제가 공고한 오빠 옆에 있는 게 안심된다면서.


혼자 별 상상을 다 하며 초조해하고 내심 급박했던 이월이 가고 삼월이 왔다.


벌써 이탈리아와 이란은 난리북새통, 바이러스는 곧이어 스페인으로 어디로 들불처럼 유럽대륙에 퍼졌다.


사월, 눈에 보이지 않는 적병 바이러스가 세계 도처를 강타하고 있다.


미증유의 이 재난은 사회 체계의 존속마저 위협하며 마구마구 덮쳐 들었다.


시인은 재난을 일러 별이 없는 세상이라 했는데 그보다도 해가 사라진 듯 암울한 나날의 연속에 심신은 피폐해져 갔다.


애진작에 공공시설은 문을 닫았고 종교시설 체육시설 유흥시설 등은 운영을 제한받거나 폐쇄조치가 따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정국이 몇 달째 이어지자 행동반경이 축소된 채 제한된 공간에 다들 갇혀버렸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은 공황상태를 야기시키며 전전긍긍, 갈피를 못 잡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심리적 스트레스는 나아가 미미한 인간존재에 대한 자각에 이르며 무력감을 호소하게도 된다.


이번 코로나는 본능 중의 본능인 식욕마저 감염병에 대한 공포로 감퇴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가공스런 공포감이 사방에서 무작위적으로 엄습해 와 이성조차 마비될 정도였던 건 분명했다.


다행인 건 그나마 숙면은 취할 수 있어 꿈도 없는 잠을 여덟 시간 이상 푹 자면서 세상만사 하얗게 잊을 수 있음에 감사!




자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잘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정부의 존재이유이자 최고의 덕목이 된 작금.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코로나로부터 영국은 승리할 것'이란 특별성명을 낸 그날, 보리스 존슨 영국총리는 감염병 증상이 악화돼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미국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한 뉴욕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으로 줄어들자 트럼프 대통령이 '터널 끝에서 빛이 보인다' 했지만 브롱스동물원 호랑이까지 양성판정을 받았다는 뉴스가 곧바로 떴다.


한국의 확진자 수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2주 더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감염병을 확실히 잡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려움의 시간을 감내할 밖에.


무르익어가는 봄, 벚꽃놀이 명소를 폐쇄하고 봄꽃축제를 모두 취소했다.


그럼에도 지난 주말 화창한 봄 날씨를 즐기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꽃구경을 나왔고 산행인구도 늘어났다.


오랜 자가격리생활로 피로감이 쌓인 데다 코로나가 좀 수굿해지자 정신이 해이해진 것.


절대 안심하거나 낙관하기엔 이르다며 정부는 늘어난 이동량에 대한 강화책을 내놓으며 제동을 걸었다.




누구나 할 거 없이 난생처음 겪는 억지 칩거생활을 못 견뎌하지만 이젠 누구나 새로운 생존기술 역시 배워야 할 단계에 와있다.


앞으로 속속 색다른 요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소셜미디어의 영역은 더욱 확장될 거라 한다.


일상의 변화가 대폭적으로 발생하면서 첫째 온라인으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질 거라고 한다.


교육 쇼핑 등이 온라인 세상으로 이동되고 세계 경제의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시작될 거라 한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원격근무 방식이 자리를 잡아 홈오피스 개념이 자연스러워질 거라 한다.


동시에 빌딩 공실화가 늘어 자동적으로 사무실용 부동산 가치는 떨어진다고 내다본다.


바이러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자동화와 AI 개발에 나서서 근로자를 기계로 대체할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란 희대의 괴물에 놀라 가슴 벌렁거렸는데 앞으론 여태껏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과 맞닥뜨려야 한다니.


뭐든 적응하며 살게 마련이나 당분간 롤러코스트를 탄 듯 어지럼증은 계속될 거 같다.


특히 변화를 싫어하는 계층일수록.


정신과 클리닉에서는 팬데믹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번아웃되는 걸 막으려면 혼자 노는데 익숙해지라는 주문을 하기 전, 먼저 이런 조언을 보낸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또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 중에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는 취미 같은 걸 이때 적절히 활용하라고.


모두가 힘든 시기일지라도 여하히 적용하느냐에 따라 나름 가치있는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며 개발하라, 창출하라고 속삭인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중세에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썼다면서,




코로나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의 세상은?


한마디로 팬데믹 전과 후로 세상은 확연히 나뉘어질 낌새다.


생활과 직결되는 경제가 심하게 요동칠 것이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느낀다.


이에 팔순의 노석학인 리처드 실라 뉴욕대 명예교수는 최악의 충격이 눈앞에 와있다고 했다.


전방위적 경기침체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비화할 가능성마저 50% 이상된다고도 한다.


미국 증시는 역사상 가장 가파르고 빠른 추락세를 보일 것이며, 올해 대부분 나라가 제로 성장에 그칠 것이라 경고한다.


경제상태의 바로미터는 미국으로, 미국을 보면 대충 파악이 된다고 보면 맞다.


곧 실업률이 크게 상승하고 기업 생산량은 썰물 빠지듯 확 줄어들거라 한다.


주요 기업들이 도미노 파산하는데 여행사와 항공사 사례가 첫번째 타깃으로 경쟁력 있는 보잉사까지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


이처럼 어려운 입장에 놓인 기업들을 돕기 위해 과감한 정부의 재정 지원이 따를 터이나.


미국은 GDP의 11%에 해당하는 슈퍼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며 앞으로 막대한 재정 부양책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고 노교수는 진단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이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려대듯 해도 모자랄 판국이 된 셈.


아르헨티나와 레바논은 이미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개발도상국의 타격은 한층 더 심해 장기간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듯하다고 진단한다.


뉴스가 쏟아내는 전망들을 듣다 보면 어질어질 뭐가 뭔지 종잡을 수 없어 현기증이 절로 인다.


그래도 여전 세상은 돌아갈 거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테지만.




스물=무얼 추려내려고? (4월 10일)


한참 전 시애틀 인근의 성헬레나 산에서다.


히로시마 원폭 몇 백배에 달한다는 화산이 폭발하자 용암이 흘러내리며 걷잡을 길 없이 큰 산불이 났다.


하늘을 가리며 널름대는 시뻘건 화마, 사방이 뿌연 연기에 휩싸이자 다투어 달아나는 뭇 짐승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불길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졌다. 잿빛 두터운 화산재 아래 묻혀버린 채 한동안 헬레나는 아무런 조짐도 없이 죽은 듯 잠잠했다.


몇 년 내리 적막만이 지배하던 그 산에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의 일이라 했다.


그곳을 여행할 즈음, 둑방길 따라 봄 쇠뜨기 쑥쑥 치솟듯 한 뼘 남짓 자란 전나무들은 저마다 기운찬 생명력 충만했다.


묘목 같이 자디잘던 전나무도 지금쯤은 보기좋게 자라 낮은 숲으로 어우러졌을 것이다.




옐로스톤에서 가이드가 들려준 말이다.


주변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화마가 덮친 건 88년도 일로 처음엔 불길을 잡지 않고 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국립공원법에 산불이 나면 자연진화 될 때까지 얼마간은 기다린다는 것.


그다지 겁먹지 않고 방관만 하던 불이 예상외로 몇 달을 두고 지칠 줄 모른 채 타올랐다.


산불 범위가 워낙 넓어지며 피해가 커지자 그때서야 화급히 진화에 들어갔지만 이미 시기를 놓쳐 전역이 불길에 휩싸이게 됐었다던 옐로스톤.


성난 파도처럼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이듬해 새움 돋아 연하고도 푸른 소나무 그 생명들이 어여삐 자라고 있다 하였다.


이처럼 얄궂은 산불조차 일련의 자연생태계의 순환작용, 세대교체를 위해서라 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출산의 진통이 이리 심한 걸까?




새움을 피워내기 위해서는 만추의 단풍 낙엽되어 씨눈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 순리다.


땅에 누운 낙엽은 눈비에 푹 삭아서 숲의 거름이 된다.


기이하게도 산불이 나야 비로소 번식하는 뱅크셔 나무만의 자기희생이 아니다.


씨방이 너무 단단해 뜨거운 화염에 그을려야만 씨를 터뜨린다는 나무.


산불의 화기에 그을려야만 씨방이 터져 싹을 틔운다고 알려진 호주 토착식물이 있다.


생명을 퍼뜨릴 방법이라고는 한바탕 불길에 담금질되고 난 후에만 제 씨앗을 털어낼 수 있는 뱅크셔 나무.


더구나 5 억년 전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잎새 화석이 있는 걸로 미루어, 대규모 지구의 기후 변화에서도 살아남았다고.


왜일까? 무언가를 추려내려는 걸까?


근자 이런저런 음모설도 난무한다.


혹독한 난세를 맞아 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되돌아 봄으로 오히려 현재의 시련을 유익한 피드백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송진에 단단히 굳어진 열매가 불길에 녹으며 비로소 씨방을 연다는 희생적인 고난사가 싸하다.


모든 것이 타고난 뒤에야 검은 숯 위로 연한 싹을 내민다는 뱅크셔나무를 나희덕 시인이 그의 시에서 알려주었다.


시의 불꽃을 피우는 또 하나의 부싯돌이 되어준 그녀의 뱅크셔 나무.


글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이다,라고 말한 그녀의 시가 미증유의 코로나사태로 야기된 혼돈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시기적으로 수난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을 묵상하는 성주간이라서 더욱 의미롭게 다가왔는지도.




스물 하나-진실게임 / 거센 파도가 토해낸 쓰레기(4월 18일)


일요일 오전 바닷가로 나갔다.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됐다.


2월, 난데없이 덮친 코로나로 세상이 괴상해지며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대구에 폭발적인 기세로 역병이 퍼지자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고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이들 학교는 개학을 미뤘고 공공시설이 문을 닫았고 공장은 멈춰 서고 회사는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모든 동작 그만!!! 상태가 그럭저럭 세 달째로 접어들었다.


꼼짝없이 집안에 갇히내며 답답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


처음엔 정체불명의 병원체에 무한정 공포감을 느끼며 공황상태에 빠졌고 그다음엔 무지막지한 병균을 퍼지게 한 대상에 대하여 격한 분노감에 휩싸였다.


그다음엔 엉망진창이 된 생활에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그다음에 적응해 가며 무기력하게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바다는 평온했으나 해변은 난리가 지나간 듯 엉망상태였다.


밤새 거칠게 파도가 설쳐대더니 뱃속 어지럽히던 바다 쓰레기를 마구잡이로 뱉어버렸다.


한바탕 무섭게 뒤채일 적마다 바다는 밑바닥까지 뒤틀어가며 샅샅이 흔들어대 속에 것을 몽땅 토해낸 것.


뿌리 부실한 온갖 해조류가 왕창 떠밀려왔고 플라스틱병이며 부표 같은 어구류는 물론 넝마로 변한 옷가지도 섞였다.


비닐 쪼가리뿐 아니라 묵직한 자갈돌 조약돌까지 경황없이 밀려 나왔다.


대합 전복 조개 소라 가리비껍데기도 질펀하게 깔려있었다.


행정부처에서 이른 아침부터 해수욕장 청소에 들어간 모양으로 쓰레기를 담아둔 대형자루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일손이 딸렸던지 입구 쪽과 달리 해변 끄트머리는 난장판 그대로였다.


미쳐 치우지 못한 잡동사니가 볼썽사납게 물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시침 뗀 바다는 찰싹거리는 해조음으로 태연스레 귀를 간지럽혔다.




그간 얼마나 속이 더부룩하니 불편하고 쓰렸을까,


하구마다 온갖 더러운 것 쏟아내면 묵묵히 받아 안고는 푸르게 정화시키느라 고생 심했겠다.


품에 깃든 별의별 물상들, 한때 유용했으나 유효기간 지난 것들


별볼일 없이 떠돌며 그래도 한자리 잡고 설쳐대는 꼬락서니 지켜보느라 화도 났겠다.


이참에 그 모두를 시원하게 토해버렸다.


하여 속이 좀 편해진 바다.


세상사도 그러하리라.


마땅히 그러하리라.


며칠 전 <무얼 추려내려고?>를 쓰면서 그래도 설마설마했었다.


그다음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한때 운 좋게 잡은 금력이든 권력이든 그 영화가 영원할 수는 없는 것.


보다 보다 참다 참다 마침내 때가 차면 하늘은 반드시 판세 왕창 뒤집어 놓은 다음 새로이 판을 짠다.


바르게 균형 잡히도록 조절하여 올곧은 질서를 되찾게끔 이끈다.


음습한 곳에 돋아난 거짓이나 술수, 농간은 언제이고 진실 앞에 가면이 벗겨진다.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으며 최종적으론 선이 악을 이기므로.


그렇지 않다면 성서가 무슨 능력이 있겠으며 공자왈이 무슨 힘이 있으랴.


믿는다, 진실의 승리를!!! 크게 외치며 신동엽 시인의 시를 묵상하듯 음미해 보는 주일이다.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0년대의 부정부패, 독재체제라는 시대적 상황 앞에서 순수한 열정으로 불의한 현실을 강하게 거부했던 현실참여시.





스물둘-그때가 좋았군(6월 24일)


어느 결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닥친 새 질서에 길들여졌던가.


거부하거나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편하다.


타협의 여지 같은 건 추호도 없다면? 처음엔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처럼 맞대응한다.


부정하고 분노해 봤자 어림도 없다.


력하게 주저앉아 결국은 수용하기에 이른다.


보이지도 않는 거대하고 완강한 시스템 앞에 감히 어째보랴, 이해나 납득이 아닌 체념 그리고 순응한다.


안전제일의 틀 안에서 오도카니 도사리고 있는 게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나아가 자유롭기까지 하다. 외부의 모든 게 다 조심해야 될 경계대상으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 희한한 세상이 도래하자 뭘 모르고 마구 손사래질부터 쳤다.


헛수고였다.


적군처럼 조용히 다가든 바이러스.


느닷없이 분출된 마그마, 붉은 용암 되어 막무가내 물결 져 밀려오는데 이 불덩이 감당할 자 뉘 있으랴.




대중교통 이용을 꺼려 아예 당분간 먼 나들이는 꿈도 꾸지 않고 자제해 온 지 몇 달째다.


꼼짝없이 집에 갇혀 몸살이 나다 못한 신유목민 언니는 드디어 캠퍼로 나섰다.


언니의 끈질긴 유혹을 떨구지 못해 어느 유월 이러구러 해남 길 위에서 조인했다.


남도 유람 잘하고 서울에서 다시 정선으로 향했다.


백운산 운해에 빠져 사흘간 꿈결 같은 신선놀음에 취했다가 부산으로 돌아오는 날.


아뿔싸! 강원도에서 부산 가는 교통편은 만만찮았구나.


서울로 향하는 언니와 제천에서 헤어지기로 했다.


전날 지도를 펴놓고 폰의 교통앱도 열어두고 원주로 갈까, 제천으로 갈까, 머리 맞대고 논의했다.


코로나로 이동인구가 없다 보니 총총 박혀있던 버스 편이 대폭 축소돼 시간대 맞추기가 까다로웠다.


문제는 어제까지 있던 버스 편이 하루새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현상조차 다반사.


결국 부산 가는 운행버스는 하루 딱 세 대만 있었다.


이른 아침 8시와 11시 그리고 오후 3시, 선택의 여지없이 11시 버스를 타고 영주 안동 영천을 거쳐

부산에 닿았다.




그날 일찍부터 서둘러 제천 시외버스터미널에 시간 맞춰 도착했다.


어디나 디지털 시스템은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전처럼 줄 서서 기다리다가 차례 되면 조그만 창구에 대고 버스표 주세요, 말할 필요 없이 무인발권기에 카드를 넣고 티켓을 구매했다.


전자동시스템인지라 매표원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낯선 풍경이라 얼떨떨하다.


기계에 서툰 촌할무이 버스표 사려면 말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바야흐로 무인시대가 도래 정착됐다.


갑자기 세상이 두렵다.


이렇게 기계에 일자리들이 점점 잠식당하는구나.


그뿐인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아날로그적인 나 같은 부류는 더듬수 놓다가 도태되기 십상인 세상이다.


겁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버스에 올랐다.


출발 시각이 되자 기사양반 앉은자리에서 버튼 하나 눌러 문을 닫았다.


빠르게 내달리는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때가 때인 만치 손님은 딱 세명뿐이다.


제천에서 동부산까지 버스요금은 26.500원.


인건비에 장거리 기름값에 고속도로 통행료도 대형차라 제법 될 거다.


도저히 타산을 맞출 재간이 없다 보니 사업자 측에선 차편을 최대한 줄인다,


기사는 직장을 잃고 주유소는 수입이 줄어들고.... 도미노현상처럼 줄줄이 무너진다.


아찔하다.


몰아닥칠 한파는 서릿발 같으리라.


앞으로의 세상 그런대로 적응해 맞춰가며 살아들 가겠지만, 돌아보니 지난 시절 그때가 좋았군.





스물셋-자유여행 끝? (7월 11일)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을 외쳐가며 신록 눈부신 오월과 유월의 나날을 즐겼다.


깝깝한 코로나 정국도 가랑비에 옷 젖듯 적응이 돼 가면서 전만큼은 신경 예민하게 쓰이지 않았다.


7월 초 그간 미뤄왔던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입원하고 여유있게 받기로 한 정밀종합검진이었다.


병원에 들어가며 발열체크를 받았으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입원실에서 간호사가 재는 체온계에는 약간의 열 기운이 있었고 이튿날 코로나 검체채취를 받게 됐다.


검사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열서너 시간 여, 과중한 스트레스 정도가 아니라 걱정에 사로잡혀 화탕지옥을 경험했다.


그 통에 심하게 오한이 나면서 목이 붓고 입안에는 수도 없이 물집이 생겼다.


이비인후과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대단치도 않은 증세였는데 생각보다 회복이 더뎠다.


음식을 전혀 못 먹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병원에 머무는 일 주간, 온종일 오픈된 TV 영화채널이 셋이나 돼 입맛대로 영화를 골라보았다.


그중 하나인 '오리엔트 특급살인'. 어차피 2009년을 끝으로 운행이 중지되며 오리엔트 특급의 126년 역사가 막을 내렸으니 타볼 수도 없는 열차다.


하고많은 여행지 제쳐두고 언젠가 터키를 가보리라 내심 꿈꾸며 여행목록에 끼워뒀던 곳.


영화 속의 이스탄불은 최종판 나의 버킷리스트였지만 이젠 더는 자유여행이 어렵게 된 세상이란 걸 안다.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항상 북적대던 공항이었다.


그러나 상반기 한국에 입국한 여행자 수는 작년대비 5%대에서 멈춰 섰다고 한다.


트레블의 어원이 아무리 '고생'이라 하지만 위험 감수하며 탐험가처럼 목숨 걸고 여행하려는 이가 과연 있을까 싶다.


코로나19 이동제한 조치로 여행객이 95%나 격감했듯 각국 항공사는 물론 세계 최대의 숙박 공유 서비스인 에어비앤비( Airbnb)도 직격탄을 맞았다고 한다.


이처럼 여행문화가 당면하게 된 큰 변화라면 앞으로는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은 코로나 여파로 종말을 고했다고 봐야겠다.


물론 비행기가 아니라도 기차여행도 있고 도보 여행도 있으니 국내여행은 가능하나 해외여행은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 그 이후의 세상은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낙관을 불허한다.


이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감이 집단패닉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예측불가능이라고 진단되는 현 상황.


무언가를 더 소유하려 기를 쓰거나 멀리 있는 딴 니라로 떠나보려던 무한욕구도 조절할 때다.


당장 지구촌 전체 경제가 붕괴된다고 난리인 판에 지금 팔자 좋게 여행타령이냐고?


가고 싶던 곳 그 정도면 갈 만큼 가봤으니 더 이상의 여행은 이쯤에서 접기로 작정했다.


미증유의 코로나 사태로 제 뜻과 상관없이 뉴 노멀을 받아들여야 하는 작금.


곰곰 생각해 보니 우리 세대는 그런대로 여러 특혜를 누렸구나 싶어진다.


맑은 물, 청정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바다에서 건진 어패류와 오염되지 않은 흙에서 나온 올개닉 소채류를 먹고 살았다.


비록 어려운 전후시대 거치며 근검절약 정신 몸에 배었지만 고도성장의 단맛도 즐겼고 밀레니엄을 지나 격변하는 과학문명의 혜택도 듬뿍 받았다.




그간 솔직히 주체적 자아는 내던져버리고 최면이라도 걸린 듯 외부 물결에 어영부영 떠밀리며 여기까지 왔다.


건공 중에 붕 뜬 채로 무중력상태 부유하며 허황되이 살았음을 고백한다.


절제의 미덕은커녕 물자 귀한 줄 모르고 과소비와 낭비풍조에 동조했다.


문화기행이라 포장한 채 이웃집 드나들듯 해외여행 몰려다녔다.


나갈 때마다 젊은이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여겼기에 별로 가책도 받지 않았다.


이제와 보니 주어진 복 싹싹 알뜰히 긁어 쓰고 설거지할 빈 그릇만 남긴 꼴이다.


그런 점에서 후대들에게 미안한 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암담하고 험한 이 풍진세상을 미래랍시고 물려주게 됐으니 정녕 면목없는 선배가 되고 말았다.


물론 신인류시대가 도래해도 그 나름대로 적응하며 보다 나은 생존방식을 찾아야 가겠지만.




이번에 본 영화 얘기 서두가 삼천포로 빠지며 장황해졌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영화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명 추리 소설을 2017년 초호화 캐스팅으로 럭셔리하게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추리소설 특유의 긴장감에다 연기 탄탄한 배역진, 게다가 백설 두터이 쌓인 장엄 산세 감상만으로도 시간흐름을 잊을만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편집증적인 불안에 시달리던 남자는 폭설에 갇힌 한밤중, 열두 군데나 난자당하며 죽음에 이른다.


그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명탐정 푸와로는 특급열차에 탄 사람들을 상대로 알리바이를 하나씩 입증해 나가는데....


원래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침 발라가며 책장 넘기는 버릇을 고치게 한 루팡이며 셜록 홈스에 심취했으니 크리스티 여사의 이 소설도 오래전에 읽었다.


영화로 다시 보니 새롭기도 하거니와 눈호강으로 말하자면 특급열차라도 탄 기분이 들만큼 덤으로 왕창 호사를 누렸다.


여행은 꼭 비행기 타고 해외로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내 나름의 창으로 이처럼 실내에서도 얼마든지 여정 즐길 수 있음 역시 알았다.


자유여행의 종언을 고하게 된 시류야 어찌 타협해 볼 방법이 없다면?


대신 독서를 통해 영상을 통해 내 틀에 딱 안성맞춤으로 장착되는 여타 여행방법을 찾아볼 일이다.


여행 홀릭에 빠져 자칫 금단증세라도 오기 전에 나부터라도.


어쩔 도리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이처럼 어딘가로의 도피가 아닌 적극적 수용으로 선회해 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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