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원한 것은 없나니

1997

by 무량화


비 추적거리는 아침.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나라 전체가 금융 위기에 처한 마당에 눈치 없이 무슨 해외여행? 실은 전시회장으로의 여행일 따름이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십만 명의 관람객이 몰렸을 정도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친 후 부산으로 내려온 전시회라 기대했던 터다.



시내버스 토큰만으로 이탈리아 남부 해안에 위치한 폼페이를 찾아 나선 그날따라 관람객의 줄은 인도변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박제된 채 남겨진 고대 세계의 신비와 비극의 순간을 만나게 해 준 <폼페이 최후의 날 유물전>. 오랜 침묵의 세월 끝, 다시금 우리 앞에 모습 드러낸 폼페이는 찬란한 로마 문명의 보고이면서 자연재앙의 가공스러운 위력을 실감케 해주었다.



서기 79년 8월. 폼페이 북서쪽에 위치한 휴화산 베수비오가 시뻘건 용암을 토해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불덩이. 용암은 급류를 이루며 마구 흘러내렸다. 지옥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화산재가 하늘을 가려 대낮인데도 거리는 칠흑 같은 어둠에 싸였다. 나폴리만에 위치한 휴양지이며 질 좋은 포도주 산지로 상업이 번성했던 도시 폼페이. 쏟아지는 화산재에 지독한 유황가스까지 합세해 폼페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미증유의 재난이 닥친 것이다. 처참한 비극의 현장은 4미터 높이로 쌓인 화산 쇄설물 아래 고스란히 묻혔다. 수많은 생명과 함께 아름다운 예술품을 향유했던 생활의 편린들은 물론 신앙의 대상이던 제신들의 상까지도. 대규모 화산 폭발이 일어난 베스비오 산에서 10km 거리에 위치한 한 도시의 종말은 그렇게 왔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우물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전설 속의 도시가 발견됐다. 눈부신 환생이었다. 잊혔던 또 하나의 로마 문명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화산재에 묻혀 지낸 2천 년 세월. 발굴단의 조심스러운 손끝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유물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한 도시의 생활상이 일목요연하게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의 성향이며 신앙관, 기호와 취미, 심지어 은밀한 밤의 풍속도마저도.



그들이 살던 주택 양식은 호화로웠으며 가구 등속과 일상용품에조차 예술성이 가미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공유한 그들답게 집 안팎에 정교한 조각품을 갖추고 섬세한 모자이크 장식재를 즐겨 사용했다, 고급스러운 은집기와 귀족적인 장신구를 선호했으며 하다못해 등잔 받침이나 침대 다리에도 예술적 안목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엉겨 붙은 화산재 파편이 잔돌로 박힌 채 그날의 정황을 설명해 주는 여체 닮은 난로를 제외하고는 말끔히 손질된 유물들. 쇠와 돌을 자재로이 다룬 섬세한 솜씨와 기술은 단연 돋보이게 탁월했다. 그 시절에 이미 그 정도로 높은 문화 수준을 보유했던 폼페이. 여기 질세라 로마에서는 콜로세움이 만들어졌으니 역사상으로는 폭군 네로가 세상을 뜬 얼마 뒤다.



당시 우리는 신라가 국호를 계림이라 할 무렵이고 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운 지 서른 일곱 해가 흐른 시점이다. 지금, 찬연한 헬레니즘 문화의 우월성에 감복하고 있는 우리 앞에, 잃어버린 가락국의 역사를 되찾아 낼 가망은 없는걸까. 어디선가 아직도 혼곤한 잠에 취해 있는 가야문명이 홀연 모습 드러내 그 진수를 보여주면 좋으련만.....



원래 나폴리만의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땅을 바탕으로 형성된 촌락이 폼페이였다. 올리브와 포도나무가 무성히 자라는 축복받은 대지에서 농경 일을 주업 삼았던 부지런한 사람들은 건강한 삶을 누려왔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해상무역이 번성하며 도시는 점차 팽창되어 갔고 삶은 활기가 넘쳤다. 거기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자리 잡아가면서 발전을 거듭한 폼페이.



그들은 신을 숭배해 신전을 세우고 경기장을 만들어 운동을 즐겼는가 하면 광장에 모여 정치를 논할 줄 알았다. 시 낭송회와 음악 연주회, 나아가 연극을 좋아해 유명 연극배우 팬클럽을 만들 정도로 예술을 열광적으로 사랑한 그들이다. 어느 민족 못지않게 미적 감각이 돋보인 데다 우아함을 추구하는 여유와 세련된 멋을 한껏 누리는 그들을 신이 질투했던가. 아니면 끝 간 데 모르는 자유분방한 생활에 노기가 솟구쳤던가. 그래도 그날의 징벌은 너무 가혹하고 무자비했다.



끔찍스런 불의 심판이 지나간 자리를 지켜보는 관람객들은 저마다 착잡하고 무거운 얼굴들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사지를 비틀며 최후를 맞은 개의 형상이 그때의 참혹상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전해주었다. 아주 오래전, 집에서 기르던 누렁이가 쥐약 먹고 죽은 쥐를 삼키고는 거의 발광 상태로 버둥대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걸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의 마지막은 더욱 처참하다. 쏟아지는 화산재를 피하려고 뛰쳐나오던 채로, 극한상황의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뜬 채로, 입과 코를 막고는 잔뜩 웅크린 채로, 품 안에다 아기를 꼭 껴안은 채로. 한꺼번에 뒤엉켜서 또는 가스에 질식된 듯 맥없이 쓰러진 무리도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정도가 심한 무차별 횡포요 지나친 독선이다. 신의 저주가 내려 마땅한 환락과 퇴폐의 도시였다는 매도를 어찌 할 수 있으랴. 성 문란 정도라면 그 당시를 수 백배 능가하는 부도덕과 비윤리가 자행되는 현세태 아닌가. 따지고 보면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중의 하나가 목욕 문화인만치 폼페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일이 아닐지.



종교계에서 해석하는 대로 신의 저주가 내린 재앙이라면 폼페이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없었단 결론이다. 아닐 것이다. 단연코 아닐 것이다. 베수비오산은 그저 시절 인연이 닿아 들끓던 마그마를 분출한 것뿐. 예측불허로 덮치는 자연재해 또는 불의의 사고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점에 연민이 깊어질 따름이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찬란히 빛나던 태양도 이윽고 바닷속으로 진다." 번성하던 폼페이의 갑작스런 종말을 예견이라도 했던가. 그 옛날 어느 폼페이 인이 골목길 벽에다 남긴 낙서다. 1997



https://youtu.be/5gbmKGbIeL8?si=NunaWoiIHqgza_5f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