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애소하듯한 남자의 간절한 눈빛. "당신을 매우 좋아해요." 스물이 채 안 된 미소년의 가벼운 응수. "난 너 없이는 존재하지 않아..." 신음처럼 뇌까리며 허물어지는 중년 남자. 동성애를 다룬 <토털 이클립스>라는 영화 속 대사다.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볼 당시, 스크린 가득 찬 등 뒤에서의 포옹이 퍽이나 충격적이었는데 텔레비전에서 다시 보니 처음만큼 강한 인상은 아니다. 외설스럽고 불경스러워 어쩐지 보는 나까지 신성모독 비슷한 기분에 움츠러들었던 기억이 난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는 여러 편이 나왔다. 제약된 공간에서 동성끼리 살아가는 기숙사나 병영, 또는 감옥에 수감된 사람 중에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 영화의 소재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해서 동성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 가운데 내가 본 것만 해도 꽤 여럿 된다. 나름대로의 고뇌가 있는 사랑, 완벽한 소유를 원하며 질투에 불타다 종내는 서로를 떠나는 <해피 투게더>를 비롯, 여장 남자로 손짓 표정이 뇌쇄적이던 <크라잉 게임>도 기억에 남는다. 이성에게는 아예 성적 관심이나 흥미가 일어나지 않던 <결혼 피로연>과 장국영이 앵돌아진 여자 역을 절묘하게 해내던 <패왕별희>뿐인가. <모리스>며 <프리스트> 한국의 <쌍화점>도 동성애가 주제다. 어쩌면 그만큼 낯설지 않은 현실이라는 얘기도 된다.
막 데뷔한 신인시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연기를 만날 수 있게 한 영화 <토털 이클립스>. 여기서 그는 천재 시인 랭보 역을 맡았다. 아폴로 신으로부터 '그대는 시인이 되리라' 란 계시를 꿈속에서 받았다는 랭보다. 열다섯에 이미 뛰어난 시를 발표한 그는 영원한 태양의 환상을 품에 안은 격정 들끓는 소년으로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 속에서 살아간다. 프랑스 문단에서 혁명적인 천재라는 평을 받았던 랭보. 1871년, 스물이 채 안 된 랭보는 문단의 존경하는 선배인 폴 베를렌에게 그의 대표작 <취한 배>를 보낸다. 시를 접한 폴이 '위대한 영혼, 어서 오소서. 이는 운명의 부르심이니...' 그대를 기다리겠노라는 편지를 부치며 두 사람의 현기증 나는 관계는 시작된다.
모험 가득 찬 방랑을 즐기던 랭보는 즉각 시계를 팔아 파리로 가출을 감행, 두 사람의 저주받은 동성애가 충격적으로 펼쳐진다. 애당초의 폴은 재기발랄하고 시적 감수성이 남다른 랭보로 하여 자신의 녹슨 시적 영감을 일깨우고자 하였을 것이다. 랭보의 압도하는 젊음의 정열과 氣에서 폴은 삶의 위안과 창작의 힘을 얻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는 다른 동성애자들처럼 결혼생활 자체를 거부하거나 아내 마틸다를 탐하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매력적인 아내를 사랑하여 귀여운 아기까지 둔 보통의 가장이었던 그였으나, 랭보와의 만남 이후 절제할 수없이 남색에 깊이 빠져든다. 끝내 처자를 유기하고 국외로 사랑의 도피행을 떠나 돈이 거덜 날 때까지 무절제한 방황을 거듭한다.
대머리에 술주정뱅이로 볼품없이 나이 든 서정 시인 폴.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시를 써야 하기에 일할 생각이 없다는 자유로운 영혼인 미소년 랭보. 거칠 것 없이 당당한 젊은 랭보는 대시인의 가슴을 저밀 듯 아프게도 하는가 하면 행복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둘의 기묘한 사이가 파국을 맞는 건 권총 오발 사건에서 발단된다. 끊임없이 폴을 떠나려는 랭보의 바람 같은 날개에 불안해진 그는 '죽여버릴지언정 널 보내지 않겠다'며 절교선언을 한 랭보의 손에 총을 쏜다. 그 사건으로 브뤼셀에서 재판을 받고 동성애자가 용납되지 않는 법에 따라 신체 가혹행위죄로 죄수 생활을 하기에 이르는 폴. 랭보 역시 시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는 시인이기를 포기한 채 아프리카로 떠난다.
동성애자. 아직도 우리의 정서상 입에 올리기조차 금기시되는 단어다. 떳떳지 못함은 물론 결코 손뼉 칠 일이 못되지만 그러나 점차 동성애도 또 하나의 사랑으로 파악되는 추세이다. 사랑의 다양성 중의 한 갈래라고 하나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이 보는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동성애자는 스스로 자신이 원해서 동성애자가 되는 건 아닐 터이다. 동성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사람은 대체로 호르몬의 부조화나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남성적인 강건한 어머니를 둔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고 보고된다. 또는 유아시절의 환경적 요인에 의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으며 고정된 성 역할에 자신이 없거나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도 한다. 그러나 남성 속의 여성성, 여성 속의 남성성은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것이니 혹여 누가 아는가. 어느 날 갑자기 폴 베를렌처럼 예기치 않은 사랑에 함몰될지.
세상은 변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도덕성과 윤리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세워진 미국이다. 그럼에도 동성애자를 지지하는 무지개 깃발이 버젓이 나부끼는 나라이니 교회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동성애도 묵인된다. 근자엔 여러 주에서 종교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 결혼을 합법화시켰다. 올해 모 대학 총학생회장은 공공연히 동성애자라 밝혔다 한다. 동성끼리 우정 이상의 관계에 이르게 되는 요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성애자가 아닌 다음엔 이해될 수 없는 사항일 터. 자연의 섭리대로, 음양이 조화 이룬 이성을 사랑하지 못하는 동성애자의 비극, 꼭히 비극이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사랑이란 이성끼리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며 부당한 편견에 반기를 들는지 모를 일.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있어도, 멀쩡한 허우대를 한 채 말씨조차 여성스러웠던 유명 디자이너나 스스로 커밍아웃을 선언한 어떤 배우의 소문난 게이 행각에 눈살을 찌푸리며 혐오감부터 갖기도 했다.
동성애의 역사는 의외로 아득한 옛적부터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동성애가 죄악시되기는커녕 결혼제도를 보완하는 바람직스러운 방편으로 권장되기도 했다 한다. 신라의 원화 제도가 화랑으로 바뀐 이유의 하나가 동성애였으며 세종의 계비가 동성애로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성애자가 된서리를 맞기는 히틀러 시대로 유대인, 집시와 함께 나치의 표적감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타락한 부르주아로 매도되어 돌림을 당하는데 지금도 중국 교재에 그들은 정신이상자로 표현되고 있다 한다. 동성끼리 나누는 사랑, 부도덕을 넘어 비정상적인 결함으로 몰고 가며 타기시하는 세상의 질시를 외면한 채 왜 그들은 위험한 사랑을 할까. 그것은 어쩌면 일반인이 왜 그 남자를? 왜 그 여자를 사랑하는가와 마찬가지 질문이 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지옥과 행복의 정점인 천국을 두루 오가는 사랑의 감정은 그것이 이성간이든 동성 간이든 마찬가지라 하니까. 그리고 어떤 성의 형태를 선택하든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기도 하니까.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