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래부 동헌에는

지하철 타고 부산 누비기

by 무량화


동래 고을 관아인 동헌 문 앞이라오.

관찰사나 수령(守令)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오.

군현의 크기와 시대에 따라 건축의 양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조선 후기 건물인 경우 일반적으로 3, 4층의 석축 위에 정면 6, 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柱心包) 구조에 팔작지붕의 장중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하오.

보통 중앙 3칸은 마루로 된 대청이며, 양쪽에는 1, 2칸씩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또 방의 전후에는 1칸씩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오.

건평은 40∼50평 정도가 일반적이었고 이들 동헌의 정면에는 ‘○○당(堂)’이나 ‘○○헌(軒)’ 등의 현판을 달았다하오.

동헌은 객사(客舍)·향교와 함께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이라 하오.

이는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그대로 옮긴 내용이오.

엄숙한 표정의 동헌 문지기는 마네킹이지만 제법 그럴싸하더라오.



"사또 나으리! 이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형방 이방 아전 관속들을 거느리고 동헌 한가운데 의자 위에 높직이 앉은 사또가 소장을 훑는다오.

“이것이 전부 사실이렷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한편 "사또. 억울하오이다" 발뺌하던 자는 사건 문서와 대조해 본 결과 마침내 죄의 전모가 밝혀지며 판결이 내려진다오. .

"저 자를 끌어내 형틀에 묶어라, 내 친히 문초를 하리라!"

불같은 사또의 명령이 저 동헌 마루를 얼마나 쩌렁쩌렁 울렸을꼬.



동헌 안에 들어가면 사방 벽에 여러 편액이 걸려있었소.


그중 필체 활달한 근심 없는 누각에 올라보고 싶었다오.

사극에서 대역 죄인을 문초하며 쓰던 주리 틀기에 쓰인 형틀이 봄볕 무색해하고 앉았더이다.


혹독한 고문의 총집합체였던 사육신 드라마에서 인두로 지지는 끔찍스러운 장면도 나왔지만 설마 지방에서야.



동래부 수령의 집무 공간인 충신당 외에도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은 부사의 휴식 공간이라오,


문루였던 망미루, 외대문 등 여러 관아 부속건물이 여러 채 늘어서 동래부 동헌의 규모는 아름차더이다.


형구(刑具)를 보관하는 형장고(刑場庫), 사령(使令)이 기거하는 흡창방(吸唱房)과 마구간 등이 모여있어 단일건물로는 규모가 꽤 컸소.

동래부의 행정, 국방, 외교, 교역 업무를 도맡았던 동헌 외삼문에 걸린 편액.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인 동래부 동헌 건물, 문 앞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소.


조선이 인정한 고문은 형틀에 묶어 볼기를 매로 치는 형문, 기와 조각 위에 무릎 꿇리는 압슬, 인두로 지지는 낙형도 있었다오.



부산 유형문화재 제4호인 망미루(望美褸) 웅자.


동헌의 대문이었던 동래도호아문(東來都護衙門, 망미루)은 한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망미루라 이름했더라오.


동래의 3.1 운동은 이 누각 위에서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오.



동래성 남문이었던 무우루/1880년대 사진

1920년대 사진으로 동래 세병문 지나 장터로 가는 장꾼들

동래성 남문에서 본 1910년대 동래 장날

동래성 안 1890년대 거리 풍경으로 현재의 충렬로

1910년대 동래성에서 연산동 방면에 난 온천천 돌다리

1907년에 설립된 부산 최초 공립 보통학교



동래 동헌의 외삼문인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 진영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東萊獨鎭)’이 되었다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