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왈 맹자왈, 고리타분함의 상징처럼 된 유학은 공자의 체계화된 사상이다.
그러나 이 시대 여러 방면에서 저항과 도전을 받으며 퇴조하고 있는 정신이다.
오죽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목의 책조차 버젓이 아니 호기롭고 당당하게 책방에 깔렸을까.
각자는 자신이 사회에 덕행을 끼치도록 행동하고, 위정자는 이상적으로 나라 다스리라는 가르침이 틀린 말인가.
어려서부터 4대 봉제사를 보고 자랐으니 일 년에 여덟 번의 제사, 거의 유학과 밀착되다시피 지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인 거개가 알게 모르게 침윤된 유교가 아닐까 싶다.
성인 반열에 오른 인류의 스승인 공자는 춘추시대를 살았다.
하루는 공자의 집 마구간에 불이 크게 번져 말이 타 죽고 야단법석이 났다.
이때 공자는 다친 사람 없는가부터 챙겼다는 말을 오래전 들었던 까닭에 인간 공자를 존경했다.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인간의 가치를 무엇보다 높이 여긴 공자다.
오늘날 팽배한 생명경시 풍조며, 스스로조차 제 가치를 부끄러움 없이 추락시켜 가며 물질을 탐하는 세상일수록 필요한 것은?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다.
마음의 근본인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간을 완성시키는 덕목으로 유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불교가 철학에 가깝다면 유교는 도덕 체계에 가깝다.
유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이며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다.
향교의 향(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의미하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듯,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 폐지, 학제 개편으로 향교에서는 유학을 발전시킨 대학자들의 위패 모시고 문묘향사를 거행하는 기능만을 이어왔다.
느닷없이 공자왈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이날은 각 지역마다 향교에서 석전(釋奠) 춘제를 봉행하는 날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성현(聖賢)들에게 봄철을 맞아 제사 지내는 의식을 치른다,
비교적 대기가 맑았던 어제 우연히 동래향교(東萊鄕校)를 찾게 됐다.
동래읍성 한 바퀴 걷고 내려오는 길목에 향교가 보이길래 들렀다.
동래향교는 동래구 명륜동에 위치했다.
조선시대 교육의 큰 틀로 삼은 유교의 핵심 정신인 명륜은 윤리를 밝힌다는 뜻.
명륜동에 소재한 향교는 인의예지의 인간 윤리를 가르치는 교육 시설로 부산시 유형문화재 6호다.
문이 닫혔기에 거죽만이라도 사진에 담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담장을 배경으로 기와지붕을 찍고 있는데 연세 지긋하니 점잖아 보이는 분이 다가와 관장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분으로부터 내일 열 시에 춘제가 열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와우~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내심, 옥색 도포에 탕건 갖춘 제관들이 향 피우고 첫 잔을 올리며 축문을 읽는 의식에다 합악(合樂)이 있는 성대한 제전 풍경 떠올렸다.
제례에 참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넣어봤으나 근자 들어 규모가 대폭 축소돼 제관들만 참여한다고.
대신 그분의 특별 배려로 잠겨진 문이 열리며 향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화해설사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 있는 설명도 들었으니, 대성전의 삼태극과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며 동재와 서재에 대해 폭넓게 배웠다.
먼저, 임란 초기 동래성이 떨어지며 순절한 동래 교수 노개방(盧盖邦)과 유생 문덕겸(文德謙) 사연이 궁금했다.
국난을 당한 지경에야 무장 따로 선비 따로 아니지만 치열한 전투 중 왜적에게 베임 당해 충렬사에 모셔진 두 선비에 대해 의아해하던 차.
동래성이 위태롭다는 전갈받은 두 선비는 급히 동래향교에 모셔진 위패들을 수습하고자 성안으로 들어왔다가 난리통에 순사한 것.
오늘 열리는 춘제, 춘추석전은 춘추 길일(春秋吉日)인 음력 2월과 8월의 첫 번째 정일(上丁日)을 택해 대성전에서 거행된다고.
중국의 유현(儒賢)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등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조선조부터 이어왔다고 한다.
향교마다 심은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檀)에서 유래했다.
이는 은행나무 자체가 두루 쓰임새 있듯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표상이라고.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병충해를 입지 않는 강건한 나무로 암수가 따로, 즉 남녀유별의 상징이기도.
하나의 원이 셋으로 분화되어 소용돌이치는 삼태극은 인간이 천지의 합체이자 소우주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
천지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태극에서 삼극(三極)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포괄하며 삼태극(三太極)은 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28호인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청운을 뜻을 품고 모인 교생을 가르치던 강학당이라는 것.
그 앞 동서 양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돼있는데 동재는 양반 자제 기숙사, 서재는 평민 중 부호 집 자제가 들었다.
당시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도 그러했다듯 학문으로 출세하려면 양반가에 태어나거나 부자 부모를 두어야 향교 입학이 가능했다는데.
이 시대 강남 스카이 캐슬이나 저때나 졸이 꿈꾸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뜬구름이고 높낮이 없는 평등세상은 요원한 희망사항?
향교의 출발점은 유생의 교육에 힘쓰라는 태조의 교서를 받들어 1392년 지방에 향교를 지었다 하나 임진왜란 때 거개가 소실되었다.
동래향교 역시 중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장소가 옮겨졌다가 순조 12년에 현재의 위치로 자리 잡게 됐다.
대성전은 1605년에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건립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6호다.
반화루는 1665년에 동래부사 안진(安鎭)이 건립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門樓)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도시가 팽창해 나가니 어쩔 도리는 없으나 지방 교육기관이자 유학자를 모시고 제향을 지내는 곳이 아파트 틈새에 낀 채 옹색하기만 하다.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 힘들게 빙 둘러선 고층 아파트 위세도 당당히 버티고 서있어 정신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듯 못내 아쉽고 허전했다.
동래향교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명륜당·반화루(攀化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동재(東齋)·서재(西齋)·좌우협문(左右夾門)이 있다.
그 외 역대 부사들의 흥학비군(興學碑群)을 비롯하여 하마비(下馬碑) 등이 서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필사본 책인 동래향교 고왕록(東萊鄕校 考往錄)이 있다.
이 기록에는 1782년~1900년까지의 동래향교와 관련된 통문, 추록, 등본 등 동래향교의 중수 및 중건 사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동래지역의 향교 연구의 기본 사료로 이용되고 있으며 향교와 향청 연구의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에 따르면 동래 향교의 정문인 반화루(攀化樓)는 명륜당과 동재, 서재로 들어가는 3문으로 되어 있다.
반화루 이름은 후한서에 용과 봉황을 임금에 비유한 반룡부봉(攀龍附鳳)에서 따온 것.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하는 뜻이다.
반화루의 바로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향교 앞을 지날 때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걸어가도록 되어있다.
대성전(大聖殿)은 공자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 공간의 가장 중심 건물인 바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어 관람이 금지된다.
배향 공간(配享空間)은 외삼문, 내삼문, 대성전, 동서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학공간 오른쪽에 위치한다.
조선 초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교학 정책에 힘입어 향교가 유학 이념을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재정적 부담이 커 교수 파견이 어려워 교육의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대신 신분 상승과 군역을 피하려는 상민(常民)의 증가로 문제가 생기며 중기 이후 사학이 점점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향교 재산법이 제정되어 동래향교의 재산은 재단법인 부산시 향교재단에서 유지 관리하고 있다.
1972년 1월 학교법인 대성학원의 설립 인가를 받아 사직동에 동인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봉행하는 춘추석전은 국고 지원 전혀 없이 자체 기금으로 운용하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따른다고.
에헴! 헛기침해봤자 예나 이제나 세상은 물질 곧 금력이 우세하니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