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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인생문 앞을 지나며

by 무량화


삼한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동래 지방이다.

동래성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사>로 1021년 성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뒤 1387년에는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성을 크게 고쳐 쌓아 둘레가 3090자, 높이 열 세자라 하였다.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 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래읍성.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던 동래읍성에는 각 동. 서. 남. 북문과 암문 인생문이 있었다.

문마다에는 문루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중 망월산 자락에서 명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서있던 문이 인생문이다.

이 문을 통해 읍성에서 생긴 사자의 시신을 장지로 옮겼다고도 하고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의 통로였다는 설도 있다.

가장 신빙성 있기로는 성민 대다수가 순절한 왜란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천우신조로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거의 다 이 문을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하여 인생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날따라 뿌연 미세먼지인지 황사인지 심해서 시야 흐렸다.

이웃을 잘 만나는 거야말로 큰 복인데 재수 없이 중국 옆에 붙어 여러모로 곤욕 치른다.

중국은 중국대로 골 아픈 존재이고 일본은 일본대로 어지간히 우릴 괴롭혔다.

하긴 탓만 하기 전, 힘을 기르지 못한 우리 책임도 있긴 하다.

반대로 힘이 셌다면 현해탄 건너가 섬나라 섬 쪼가리 거두어 담을 수도 있는 일.

왜군이 쳐들어 온다더라, 염려 없다, 갑론을박이나 일삼다가 전쟁에 밀리자 백성 나 몰라라 하고는 의주로 내뺀 주군.

전쟁터는 광해에게 맡겨두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튈 작정이었다는 선조다.

못난 임금 만나 지지리 고생만 하다가 왜적의 칼날에 목숨 잃은 하많은 민초들.

인생문 인근에 피어난 파란 들꽃이 왠지 임란 당시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넋들 같다.

역사 가르침이 그러하듯 무능한 위정자 만나면 백성들 삶은 피폐해지고 종내는 나라마저 잃을 수 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 선진국 운운하나 우리는 의식의 선진화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강대국 대열에 끼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강대국 조건은 탄탄한 경제력과 함께 강한 군사력이 받침 돼야 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국강병책은 나라마다 일관되게 추진해 온 정책이다.

황소나 코끼리가 덩치 크다고 왕 노릇 못하는 이유는 힘, 맹수같이 호전적인 힘이 부족해서다.

정글의 법칙대로 약육강식이요 적자생존이다.



인생문을 지나며 인생에 대해 사색하기 어려웠던 건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 수상쩍어서였다.

무너져도 이리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을까.

이 나라 공무원들은 왜 이 모양인가, 화가 났다.

중국에서 수입하는지 오나가나 흔해빠진 화강암 건물들, 어쩐지 갓 지은 쌀밥처럼 뽀야니 정갈스럽더라니...

동래읍성 인생문을 복원시킨 지 십 년 만에 위 사진처럼 성벽 붕괴사고가 났다고 한다.

파보나 마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고

시공사와 담당 공무원 간의 부정 커넥션이 낱낱이 드러났다는데 어쨌든 멀쩡하게 복구는 시켜놨다.

내막 모른 채 번드르르한 외형만 봐서는 잘 가꿔놓았다 하겠지만 알고 보니 기분 씁쓸하다.

국고 다시 들여 재공사 하면서 혈세는 줄줄이 헛돈 되어 새나갔을 테고.

이런 비리는 규모가 무한 확대된 채 여전히 오늘날에도 현재진행형.

물론 공무원 일부의 일이겠고 그보다는 최상층부부터 썩어도 너무 썩어 문드러졌으니.

금융 경제 쪽도 국내외적으로 문제 첩첩 겹 쌓였다.

신도시 개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공사 사람들은 공무상 기밀을 알고 있겠지만

국회의원과 고위층 사람들은 극비 정보를 어찌 알았을까.

보나 마나 뻔하다.

기강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서야 발생할 수 없는 조직적인 권력형 범죄가 나날이 줄줄이 더 크게 엮여져 나오는데도 뻔뻔스레 공정을 말하는 철면피들.

부정부패가 일상화된 사회, 정권은 끝도 없이 양심도 없이 꿀단지 챙기기에 혈안이다.

이러단 밖으로 빙 둘러 왜적에 포위된 동래성 꼴이 다시 생기지 말란 법 없다.

아! 짜증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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