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이던 해의 4월이었다.
1587년 규슈를 정벌함으로 전 일본을 손아귀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힘이 넘쳐나는 무사들이 휘하에 즐비했다.
울끈 불끈하며 남아도는 힘은 어디건 분출구를 찾게 마련이다.
그 사이 화친을 꾀한 조선과 왜 양국 간에는 여러 차례 통신사가 오갔다.
선조가 앉아있는 조선 조정은 파당 싸움으로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무능한 집단이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서신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들어있었다.
명을 치겠다며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이었지만 대륙 침략 의도가 분명했다.
이를 놓고도 갑론을박하는 와중, 소서행장이 이끄는 칠백여 척의 왜선은 4월 13일 조선으로 향했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병이 조총을 쏘며 부산진성을 포위하자 부산 첨사 정발은 앞장서 결사항전을 했으나 첨사는 전사하고 성은 함락당한다.
다음날 아침 기세등등하게 동래성으로 진군한 2만 명의 왜군과 성을 지키는 동래부사 송상현 휘하의 2천 명 군관민, 당연 중과부적이었다.
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 빌려 주기는 어렵다)고 외쳤던 송상현 공은 조복 갈아입고 부친에게 편지 남긴 뒤 전사한다.
孤城月暈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지만
列鎭高枕 이웃 진들의 지원 기척은 없습니다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父子恩輕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하오리다.
그는 26세 되던 1575년(선조 8) 문과에 급제한 문관으로 왜적의 총칼에 맞서 동래성을 지키다 임진년 4월 15일 장렬히 순절하였다.
한편 경상좌도 군사책임관이었던 이각(李珏)은 울산에서 동래성을 지원하러 왔다가 왜군의 막강한 군세를 보자 도망쳐버렸다.
부산 해안 방어를 책임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水使) 박홍 또한 송 공을 도우러 왔다가 겁을 먹고는 멀리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때나 저때나 나라 녹을 먹고 산 자들 위기 시 구국에 앞장서는 게 아니라 비겁하고 비루하게 일신 돌보고 목숨 바쳐 태극기 들기는 민초들.
임진년 그날, 동래성이 떨어지자 거침없이 북상 길에 오른 왜군은 빠르게 한양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송공단은 임진왜란 초 동래성 전투에서 송상현을 비롯한 많은 순국선열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 터에 만들어진 제단이다.
현재의 송공단이 건립되기 전에는 동래읍성 남문 밖 야산 농주산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선열들을 추모하는 농주산 전망 제단이 있었다.
이 전망제단(戰亡祭壇)에는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부사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을 비롯한 순절 의사들을 모시고 있었다.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이 송공단을 세우면서 농주산 전망 제단에 모셔진 순절한 분들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송공단은 동·서·남·북 4단으로 되어 있으며 15기의 비석이 모셔져 있다.
북단 중앙에는 송상현(宋象賢, 1551~1592),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동래 향교교수 노개방(盧盖邦)의 비석이 서있다.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文德謙),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청지기 신여로(申汝櫓)의 비를 세웠다.
서단에는 무명의 이름 모를 순절자를 모셨다.
왼쪽에 따로 담을 둘러친 별단에는 노개방의 부인, 송상현의 첩 금첨(金蟾), 정발의 첩 애향(愛香) 등 순절 여성 비를 따로 마련했다.
남단에는 향리 송백(宋伯), 동래부 백성인 김상(金祥)과 무명으로 스러진 혼백들의 위패를 모셨다.
대상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제단의 높이와 위치를 달리 만든 것이 특징이다.
관청에서는 매년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며 선열들이 목숨 잃은 날을 기려 해마다 제사를 올린다.
끝까지 살아남아 송 공의 시신을 찾아 장례 치른 동래부 노비 철수와 매동의 충성을 기려 정조 24에 세운 비가 하나 있다.
고관노철수매동효충비(古官奴鐵壽邁同效忠碑)는 그래서인지 외따로 담장가에 홀로 서있다.
언뜻 보고는 죽어서도 노비인가, 죽음마저 평등치 않다니 너무했다란 탄식이 들었는데 가장 늦게 세워진 비였다.
하긴 부사나 첨사의 첩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으니... 아무리 시대가 그랬다 해도 40대 부사의 첩실이라면...
요즘 같으면 직위해제나 탄핵 감이 되고도 남겠지만 남존여비며 여필종부 관념이 시퍼러이 살아있던 조선시대였기에 가능한 일.
전면 입구에 외삼문과 협문(夾門)이 있고, 세 칸짜리 재실이 있으며 약간 높은 축단을 쌓았다.
송공단 비석은 2005년 11월 제14대손 송해석이 썼다.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은행나무 측백나무 모과나무 향나무가 뜰에 알맞게 안배된 송공단은 시장통 한옆이라 호젓하진 않아도 외삼문 들어서면 자못 경건해진다.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선열들의 호국 충절을 기리고, 이를 후손들에게 전하며 추모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제단인 송공단.
후대들에게는 나라와 향토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역사의 교육장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과 함께 하나의 적이 사라진다 해도 또 다른 적이 생긴다는 말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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