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산에서 하차, 사계리 안동네로 들어서며 유채꽃과 한참을 노닥거렸다.
비가 올듯한 날씨 아랑곳 않고 여행객들은 유채꽃을 즐기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이 받쳐주면 연연한 노랑꽃 하느작거리며 이쁜 배경이 되어주련만.
그래도 선남선녀들은 선뜻 천 원을 내고 유채꽃밭에 들어가 요모조모 행복한 순간을 저장시켜 뒀다.
'명사 벽계'라 일컬어지는 사계해안 지나 산이물을 거쳐 송악산 들머리에 닿았다.
이번엔 습관처럼 들어서던 왼쪽 도로가 아닌 새길, 해송 울창한 숲길로 올라갔다.
시멘트로 다져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황톳길 걷는 감촉 또한 아주 좋았다.
어릴 적 외가의 기억을 소환해 내는, 솔잎이 누렇게 떨어진 소나무 숲길은 퍽도 유정스러웠다.
등록문화재 제317호인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 안내판을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좀 전까지 가비얍게 살랑살랑 꽃놀이 즐기며 고조됐던 기분이 급 냉각되고 말았다.
송악산 자락 해벽을 뚫고 견고하게 만든 동굴 진지는 진작에 봐왔지만 산등성이에 파인 동굴진지는 처음.
능선에 깔린 솔잎에 미끄러질세라 조심하며 가재걸음으로 내려가 동굴마다 들여다봤다.
물론 목책에 둘러쳐져 바짝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전시실의 오래된 두개골처럼 퀭하게 눈자위 푹 꺼진 새카만 공간은 음산했다.
일제가 송악산을 들쑤셔놓다시피 파헤쳐 가며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와 해안동굴 만든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하긴 당시 한반도 주둔 병력이 9만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총병력의 거의 반수인 4만여라는 엄청난 병력이 제주도에 집중돼 있었던 터.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수립된 ‘결7호작전’에 따라 건설된 군사시설들은 그러나 패전을 하며 대부분 미완성 상태로 남겨졌다.
해서 가슴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게 하는 을씨년스러운 몰골로 남겨져, 한층 더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송악산 제1분화구 외륜 능선에 일본군이 구축한 동굴 형태의 진지인 濟州 松岳山 外輪 日帝 洞窟陣地.
화산 분화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바깥쪽 산자락에 분포돼 있는, 일제가 구축한 동굴진지는 여러 개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아 미군의 상륙전에 대비한 방어준비를 하였다.
즉, 송악산 외륜에 분포된 동굴 진지들은 전략 요충지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경비하기 위한 군사 시설물.
주변의 군사시설인 비행장, 탄약고, 격납고 등의 경비와 연안으로부터 적의 상륙을 대비하기 위해 구축한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땅굴은 군수 물자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고 넓게 건설되었으며, 거미줄처럼 서로 이어지게 만들었다고.
지네 몸통같이 길게 판 동굴로, 출입구 형태는 지네 발을 닮았으며 확인된 입구는 22개.
일본군은 제주 지역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처럼 송악산 지하에 대규모 땅굴을 파고 지하 진지를 만들었다.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유적 중에서도 충격적인 해안동굴기지는 특공기지로, 자살특공보트를 엄폐하기 위한 격납시설이었다.
현재는 안전상의 이유로 동굴 안으로의 진입은 금지되어 있다.
오름 사면에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동굴진지라, 제주도 내에서도 출입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 때 남겨진 유다른 군사기지인 이곳.
맨손이다시피 바위 깨는 노역에 몰려 이름 없이 스러져갔을 이 땅의 무고한 백성들.
안타까운 고난의 역사 현장을 지켜보면서 후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렇다.
다시는 결코 외세에 굴복해 나라를 빼앗기는 일 따위는 없어야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굳게 할 줄로 믿는다.
이곳이야말로, 식민지 백성으로 핍박받으며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거듭하게 하는 산교육의 현장.
2005년, 정부는 제주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하였다.
다시는 비극적인 일들이 반복되지 않고 참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국가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
그럼에도 근자 벌어지고 있는 국내정세는 한마디로 가관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비상계엄령은 웬 뚱딴지같은 즉흥환상곡이며.
줄줄이 탄핵사태는 음표 기본도 모르는 바보들이 그려낸 행진곡만 같고.
국민만 바라본다느니 국민을 위한다느니 자칭 정치인들 제정신인가, 지금이 어떤 때인가 말이다.
트럼프 2기의 강공 드라이브로 요동질 치는 국제정세에 경제전망은 시계 제로, 이젠 피아 구별도 없이 적대적이다.
그 와중 국민분열만 조장하는 적대적 공생관계인 좌우 인물들은 모두 퇴출대상, 시대조류 거스름 없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리라.
지구촌 곳곳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전운 거둬지지 않고 있으며 북쪽에는 핵이 장착돼 있고.....
현 정국 그래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이다.
결국은 힘, 가벼이 얕잡히지 않도록 힘껏 국력을 키워 자체 방어에 만전을 기해야 함에도.
송악산을 한바퀴 빙 둘러 내려오는 길.
널빤지 쪽처럼 바다에 뜬 가파도와 최남단의 땅 마라도가 흐린 날씨임에도 저 멀리 보였다.